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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가정, 아버지, 그리고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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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3시간에 걸쳐 남성문화의 잘못된 점과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남성관인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젠 남성문화, 남성관 변해야 합니다. 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남성상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80년대 들어 서구사회에서는 지나치게 여성에게 호의적인 남성을 '물렁한 놈(imp)'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애처가'나 '공처가'라는 말이 한 때는 그런 의미로 쓰였습니다. 처음 쓰일 때와는 달리, 요즈음 ‘애처가’라는 말을 들을 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공처가보다 더 물렁하게 아내 앞에서 쩔쩔매는 남편을 가리켜 '경처가'(아내 앞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남자), '까처가'(아내 앞에서 까무러치는 남자)라고 부르는 등 신조어를 계속 만들어 내면서 남성의 자기정체성에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웃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남성상은 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아니 잘못된 남성문화와 남성상은 변화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변화 움직임
EX)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 때문에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억눌린 삶을 살았다는 한 남성은 “나는 어릴 때 내가 남자로 태어난 걸 엄청난 행운으로 여겼다. 여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내가 여자가 아닌데 대해 쾌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철이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로 태어난 건 결코 행운이 아니며,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운은 더욱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차피 운명에 따라 정해진 성이므로 모든 면에서 동등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에서도 부단히 남성과 아버지들을 자각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가족회의를 실천하는 아버지들의 모임' 등은 돈버는 사람으로만 인식되었던 아버지의 자리 찾기를 시작하고 흩어져 버린 가족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그 외에도 '부자 모임'이나 '아버지 참관의 날', '아버지 교실', '부자 캠프' 등의 모임에서 그 동안 침묵 속에서 가족과 멀어졌던 남성의 자리 찾기를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들이 정말 남성다움을 찾아줄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움직임들은 분명히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가정을 만드신 분을 제외시켰다는 흠이 있습니다. 가정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움직인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진정한 변화는 가정을 만드신 분으로부터 자문을 구할 때 가능합니다.
변화의 전제
그 어느 것이든 변화는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남성문화나 남성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의 주체인 남성과 가족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에게 공부하라고 한다고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의 주체세력이 되어야 할 남성이 자신의 문화와 남성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변화를 시도할 때 변화는 이뤄질 수 있습니다.
 첫째, 기존의 남성상이 남성의 삶을 왜곡시켰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직까지 살펴본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잘못된 남성문화가 남성의 모습을 약화하거나 잘못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걸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의 남성 운동가 킴멜은 “남성다움이 여성에 대한 지배와 함께 남성간의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남성중심의 생각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는 남성은 중상층, 백인, 화이트칼라, 이성애자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 흑인, 블루칼라, 동성애자는 여기서 제외됩니다.
 둘째, 남성상은 가변적이며 어떠한 남성다움도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회학자는 "남자는 실패로 인하여 남성다움이 박탈되고, 여자는 성공으로 인해 여성다움이 박탈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성다움은 부양자로 규정되어 부양할 능력, 즉 돈을 버는 능력에 의해서 권위와 가치를 평가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통 혼잡 속에서 무기력한 자동차처럼 돈도 만능의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사회의 냉혹한 이윤 추구와 가족들로부터 돈 버는 기계쯤으로 치부되는 현실 앞에서 남성은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회가 변화되듯, 남성상도 변화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껍질뿐인 지배 의식을 움켜쥔 외로운 남성보다는, 울 수 있고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남성이 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남성의 모델
우리의 바람직한 아버지의 남성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짜 남성은 터프가이도, 돈 많이 버는 남자도, 사회적으로 유능한 남자도, 가족들이 그의 한 마디에 절절매게 하는 사람도 아닌 바로 예수님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지만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셨지만,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쉬지 않으셨습니다(눅2:12). 예수님은 끊임없이 시험과 유혹을 당하셨지만, 결코 죄에 빠지지 않으시고 성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눈물을 흘리셨지만, 결코 좌절하시거나 감상적이시지 않고 진리 위에 굳건히 섰습니다(요11:35). 예수님은 불의에는 분노하셨지만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과 섬김을 보이셨습니다(요13:5).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야말로 어진 왕, 부드러운 전사, 삶의 지혜로운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을 담지 않고 진정한 남성, 진정한 아버지란 없습니다. 남성들이, 아버지들이 예수님 속에 있는 남성상을 가정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의 자녀들과 아내들은 아버지로서 또 남편으로서의 여러분에게서 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나 남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여러분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우리 아버지와 남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즉 사랑과 공의를 체험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성들을 아버지로 남편으로 가정에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인생도 스포츠처럼,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습니다. 전반전에 아무리 잘하여도 후반전에 잘못하면 모든 점수를 잃을 수 있습니다. 역전승하는 남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5월 한 달 동안 이런 메시지를 들은 이 때가 바로 전반전과 후반전은 가름하는 하프타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터닝 포인트, 5월에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아 돌아서는 남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성 여러분! 지금이 결단할 때입니다.
 첫째, 자신과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나라에 대한 책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성적 성결, 삶의 성결, 영적 성결을 회복하십시오.
 셋째, 지도력을 발휘하십시오.
넷째, 사랑을 베푸십시오.
가정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정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사회입니다. 지난날의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은 삶이 중요합니다.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EX) 안문숙의 남성상 이야기, 그녀도 바꾸는데 왜 여러분이 못 바꾸시겠습니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모든 일에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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