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우리의 가정을 다시 살리자
본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모임’ 이라는 것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좋은 아빠를 만드는지는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tv에서 주말에 다큐멘터리식으로 이 모임을 소개한 일이 있어서 말로만 듣던
그 모임을 간접적으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의 자발적이기보다는 반강제적으로 식구들의 손에 이끌려서 그 모임에 참석한
우리 시대의 보통 남자들은 첫날 모임에서는 예외없이 서먹서먹하고 표정들이 굳어 있었습니다.
’나처럼 괜찮은 아빠가 왜 여길 와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로그램에 의하여 교육이 시작되고 과제가 주어지고 토론이 계속되고
때로는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같은 편지도 써보고 하면서
권위주의적이고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시대아빠들이 한사람 한사람 표정이 달라지고
자신의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아내들을 모두 다 초대해서 줄지어 의자에 앉히고
수료생인 아빠들이 대야에 물을 담고 팔에는 수건을 걸치고 들어와
자기 아내 앞에 꿇어앉아 발을 씻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참 쑥스럽고 민망하고 낯간지운 일이겠는데 화면을 보니 당사자들은
너무나 진지해서 발을 내밀고 앉아있는 아내들도 울고 발을 씻기는 남편들도 울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찬양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부부들이 부둥켜안고 우는데
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던 나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대사회를 가정위기의 시대 혹은 가정붕괴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한국교회의 최근 가장 주요한 이슈도 역시 ’가정 사역’이라 할만큼
’가정’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때보다 높다.
이것은 곧 우리 시대가 그 어느때보다 가정에 문제가 많은 시대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들은 ’우리 집만큼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착각내지는 자기 최면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 시대 가정의 특징을 ’가면 무도회’와 같다고 표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고층 아파트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그만 집안의 가스 밸브를 열고 불을 붙인 것입니다.
집안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붙었습니다.
옆방에서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을 조바심으로 듣고 있던 아들은 집안에 불이 붙자
방에서 뛰어나와 말릴새도 없이 창문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뛰어내리자 그 아들 이름부르며 뒤따라 뛰어내렸습니다.
남편은 가지가 홧김에 저지른 일이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소화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만큼 번졌고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 역시 불길을 피해 창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한순간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 가정 세식구는 다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제비족’이었고 엄마는 ’날나리’여서 살았고 아들도 ’비행청소년’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저 웃자고 나온 얘기이겠지만 현대 가정의 파괴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만족해 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초에 최초로 ’보시기에 좋지 못하였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독처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 중 첫 번째 실수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된 미완성’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고의적으로 미완성의 상태를 만들어 놓으시고
여기에 오로지 인간에게만 계획된 ’가정’제도를 펼쳐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부터 한번에 완성하셨는데 사람만은 그렇게 하질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피조물들을 이끌어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름을 지으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동물들을 보니 모두 암수 한 쌍씩인데 ’왜 나만 짝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도록 그렇게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창2:20보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실을 일찍이 잘 알고 계셨지만 아담 스스로 ’왜 나만 혼자야’할 그 무렵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아 너 어떤 스타일이면 좋겠니 황신혜 전지현 채시라스타일이냐’하고 물으신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담의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만일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와를 보여주셨을 때 아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 질 뻔하였습니다.
’싫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성깔이 있어 보이네요 머리가 좀 나쁠 것 같은데요.
저는 아주 날씬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니까요!’했다면 어쩔 뻔하였겠습니까
그렇게도 자상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아담에게 의논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정설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질 그릇이 토기장이를 향하여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조물주이신 그분의 고유영역을 감히 침범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이렇게 외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짝이니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틀림없이 나에게 딱 맞은 배필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가정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옳습니다.
가정은 총각 아무개씨가 처녀 아무개 양을 보고 첫눈에 만해 열열히 쫒아다니다가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평범한 진리대로 결국 결혼승락을 받고 날 잡아서 결혼식하고
그냥 부부로 살기 시작했다고 가정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정출발의 첫번째 대원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신앙)’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내 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 알아서 보내주셨으니
이 사람이야 말로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내 배우자라’
이 원리를 놓친 부부들이 서로에게 불만족이 쌓이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애들 때문에 그냥 참고 산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제와서 어쩌겠느냐고 그냥 체념하고 산다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내가 참고 참아주었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조용한 것이다’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생각 말끔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자체가 가정을 설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도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배우자에 대하여 불평이 쌓여가고 원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순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권한 (즉 내게 합당한 배필을 만나게 하시는)에 도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엡 5:19~21은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피차 복종하라”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배우고 듣고 묵상할 때
매우 이기적인 접근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때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물론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은혜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남편들입니다.
’그것봐라!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느냐
너는 왜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매번 덤벼대는 것이냐’하고 목에 힘을 줍니다.
하지만 남편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신 그 말씀, 즉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남편들 기를 살려주려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남편들은 그 말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른 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내들이 은혜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남편들은 자기들에게 잘하라고 하신 말씀을 붙들면 안됩니다.
남편들이 은혜받아야 할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V25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말씀 듣고는 아내들이 흥분합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이 말씀 좀 보고 들으세요.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시잖아요. ’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자기 말씀을 기억 못하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남편에게 주신 말씀에
아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아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남편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남편이 행복해지는 비결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어디에도
아내는 종처럼 살면서 복종만하고 남자는 왕처럼 군림하며 명령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복종하라’ 그것이 가정을 설계하시고 가정을 건축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면, 그 남편 앞에 순종하지 않을 아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살면, 그 아내를 무시하거나 구박할 남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앞에 복종하고 살면,
그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크리스찬의 가정이 되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남편들은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때 그들이 동원하는 수단은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목소리나 힘을 이용하게 됩니다.
남편들은 부드러움의 위력을 믿지 못합니다.
단지 ’강한 것이 이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힘’을 키우려고 애쓰고
돈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 배경의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고 아내를 제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힘을 소유하지 못한 남편들은
스스로 주눅이 들어 남편노릇을 일찌감치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남편의 역할을 모르기에 하는 행동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돈과 권세의 힘으로 복종시켜라’는 말씀을 성경에 없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해라’(엡 5:2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남편들아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전 7:3)
여러분 남편의 권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남편의 가정에서의 역할을 ’머리’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v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한 의미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남편의 신분이 아내보다 우월하다거나 우등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라는 단어는 그 의미상 ’지도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남편에게 한 가정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지도자란 그가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먹혀들어가는 사람.
다른 사람이 그의 말에 순종하고 따르는 위치에 선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먼저 그 아내가 남편의 말에 수긍하고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남편의 말발이 가정에서 세워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의 말이 먹혀들어가야 가장의 권위가 설텐데 그것이 과연 잘 되고 있습니까
말이 안 통하니깐
완력으로 큰소리로 공포스런 분위기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남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말이 아내에게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남편은 섬겨야만 합니다.
아내를 사랑으로 자녀들을 사랑으로 섬겨야만 진정한 ’머리’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드신 가정설계도면에는 힘으로 큰소리로 존경받는 원리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장노릇, 남편 노릇할 생각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섬김으로 권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이 머리의 의미는 지도자라는 의미와 더불어 지붕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남편이 섬김의 역할을 못하면 남편 아빠의 말이 식구들에게 안먹혀들어가고
이렇게 되면 가정질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때 식구들은 불안해 지게 마련입니다.
식구들이 갖출건 다 갖추고 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것은
지붕이 든든하게 제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데 그렇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을 막아주어야 할 지붕이 구멍이 휑하니 나 있으니
그 아래 사는 아내와 자녀들이 어찌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남편이 섬김을 통한 머리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가정은
마치 지붕이 새는 집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가정들 중에도 적지 않은 가정의 지붕이 새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큰소리만치고 섬김을 받기만 하겠다는 남편들의 지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고 있습니다.
남편의 리더수비은 아내를 가정을 잘 섬기고 돌보는데서 시작됩니다.
여기 섬긴다는 뜻은 사랑한다 끝까지 참는다 섬세하게 배려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남편 초청주일!
남편들 불러다 놓고 아내한테 잘하라고 하는 걸 보니 역시 목하는 여자들 편이구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아 하고 시작되는 말씀은 남편 잘되라고 주시는 말씀,
아내들아 하고 시작되는 말씀은 아내 잘되라고 주시는 말씀
’남편과 아내들아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정이 잘되라고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들은 계급이 같은 두 사람중 한사람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아래로 들어갈 때
쓰는 헬라어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남편의 뜻에 따르는 결정이 복종입니다.
하지만 여기 복종의 기준이 있습니다.
주께 하듯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결정이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셨으리라고 생각되는 결정이라면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아내역할 남편의 남편역학의 기준 역시 주께하듯입니다.
무너진 가정 무너지고 있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책임이 남편과 아내에게 있습니다.
그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며 피차 복종하고 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건강하고 견고하게 붙드신 줄 믿습니다.
얼마전 tv에서 주말에 다큐멘터리식으로 이 모임을 소개한 일이 있어서 말로만 듣던
그 모임을 간접적으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의 자발적이기보다는 반강제적으로 식구들의 손에 이끌려서 그 모임에 참석한
우리 시대의 보통 남자들은 첫날 모임에서는 예외없이 서먹서먹하고 표정들이 굳어 있었습니다.
’나처럼 괜찮은 아빠가 왜 여길 와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로그램에 의하여 교육이 시작되고 과제가 주어지고 토론이 계속되고
때로는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같은 편지도 써보고 하면서
권위주의적이고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시대아빠들이 한사람 한사람 표정이 달라지고
자신의 가정생활과 부부생활,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아내들을 모두 다 초대해서 줄지어 의자에 앉히고
수료생인 아빠들이 대야에 물을 담고 팔에는 수건을 걸치고 들어와
자기 아내 앞에 꿇어앉아 발을 씻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참 쑥스럽고 민망하고 낯간지운 일이겠는데 화면을 보니 당사자들은
너무나 진지해서 발을 내밀고 앉아있는 아내들도 울고 발을 씻기는 남편들도 울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찬양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부부들이 부둥켜안고 우는데
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던 나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대사회를 가정위기의 시대 혹은 가정붕괴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한국교회의 최근 가장 주요한 이슈도 역시 ’가정 사역’이라 할만큼
’가정’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때보다 높다.
이것은 곧 우리 시대가 그 어느때보다 가정에 문제가 많은 시대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들은 ’우리 집만큼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착각내지는 자기 최면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 시대 가정의 특징을 ’가면 무도회’와 같다고 표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고층 아파트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그만 집안의 가스 밸브를 열고 불을 붙인 것입니다.
집안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붙었습니다.
옆방에서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을 조바심으로 듣고 있던 아들은 집안에 불이 붙자
방에서 뛰어나와 말릴새도 없이 창문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뛰어내리자 그 아들 이름부르며 뒤따라 뛰어내렸습니다.
남편은 가지가 홧김에 저지른 일이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소화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만큼 번졌고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 역시 불길을 피해 창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한순간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 가정 세식구는 다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제비족’이었고 엄마는 ’날나리’여서 살았고 아들도 ’비행청소년’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저 웃자고 나온 얘기이겠지만 현대 가정의 파괴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만족해 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태초에 최초로 ’보시기에 좋지 못하였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독처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 중 첫 번째 실수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된 미완성’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고의적으로 미완성의 상태를 만들어 놓으시고
여기에 오로지 인간에게만 계획된 ’가정’제도를 펼쳐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부터 한번에 완성하셨는데 사람만은 그렇게 하질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피조물들을 이끌어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름을 지으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동물들을 보니 모두 암수 한 쌍씩인데 ’왜 나만 짝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도록 그렇게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창2:20보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실을 일찍이 잘 알고 계셨지만 아담 스스로 ’왜 나만 혼자야’할 그 무렵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아 너 어떤 스타일이면 좋겠니 황신혜 전지현 채시라스타일이냐’하고 물으신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담의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만일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와를 보여주셨을 때 아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 질 뻔하였습니다.
’싫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성깔이 있어 보이네요 머리가 좀 나쁠 것 같은데요.
저는 아주 날씬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니까요!’했다면 어쩔 뻔하였겠습니까
그렇게도 자상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아담에게 의논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정설계는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질 그릇이 토기장이를 향하여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조물주이신 그분의 고유영역을 감히 침범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이렇게 외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짝이니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틀림없이 나에게 딱 맞은 배필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가정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옳습니다.
가정은 총각 아무개씨가 처녀 아무개 양을 보고 첫눈에 만해 열열히 쫒아다니다가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평범한 진리대로 결국 결혼승락을 받고 날 잡아서 결혼식하고
그냥 부부로 살기 시작했다고 가정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정출발의 첫번째 대원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신앙)’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내 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 알아서 보내주셨으니
이 사람이야 말로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내 배우자라’
이 원리를 놓친 부부들이 서로에게 불만족이 쌓이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애들 때문에 그냥 참고 산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제와서 어쩌겠느냐고 그냥 체념하고 산다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내가 참고 참아주었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조용한 것이다’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생각 말끔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자체가 가정을 설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도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배우자에 대하여 불평이 쌓여가고 원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순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권한 (즉 내게 합당한 배필을 만나게 하시는)에 도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엡 5:19~21은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피차 복종하라”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배우고 듣고 묵상할 때
매우 이기적인 접근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때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물론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은혜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남편들입니다.
’그것봐라!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느냐
너는 왜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매번 덤벼대는 것이냐’하고 목에 힘을 줍니다.
하지만 남편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신 그 말씀, 즉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남편들 기를 살려주려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남편들은 그 말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른 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내들이 은혜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남편들은 자기들에게 잘하라고 하신 말씀을 붙들면 안됩니다.
남편들이 은혜받아야 할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V25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말씀 듣고는 아내들이 흥분합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이 말씀 좀 보고 들으세요.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시잖아요. ’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자기 말씀을 기억 못하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남편에게 주신 말씀에
아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아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남편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남편이 행복해지는 비결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어디에도
아내는 종처럼 살면서 복종만하고 남자는 왕처럼 군림하며 명령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복종하라’ 그것이 가정을 설계하시고 가정을 건축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결국 남편이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면, 그 남편 앞에 순종하지 않을 아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살면, 그 아내를 무시하거나 구박할 남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앞에 복종하고 살면,
그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크리스찬의 가정이 되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남편들은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때 그들이 동원하는 수단은 ’복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목소리나 힘을 이용하게 됩니다.
남편들은 부드러움의 위력을 믿지 못합니다.
단지 ’강한 것이 이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힘’을 키우려고 애쓰고
돈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 배경의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고 아내를 제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힘을 소유하지 못한 남편들은
스스로 주눅이 들어 남편노릇을 일찌감치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남편의 역할을 모르기에 하는 행동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돈과 권세의 힘으로 복종시켜라’는 말씀을 성경에 없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해라’(엡 5:2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남편들아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전 7:3)
여러분 남편의 권위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남편의 가정에서의 역할을 ’머리’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v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한 의미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남편의 신분이 아내보다 우월하다거나 우등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라는 단어는 그 의미상 ’지도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남편에게 한 가정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지도자란 그가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먹혀들어가는 사람.
다른 사람이 그의 말에 순종하고 따르는 위치에 선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먼저 그 아내가 남편의 말에 수긍하고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남편의 말발이 가정에서 세워지고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의 말이 먹혀들어가야 가장의 권위가 설텐데 그것이 과연 잘 되고 있습니까
말이 안 통하니깐
완력으로 큰소리로 공포스런 분위기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남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말이 아내에게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남편은 섬겨야만 합니다.
아내를 사랑으로 자녀들을 사랑으로 섬겨야만 진정한 ’머리’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만드신 가정설계도면에는 힘으로 큰소리로 존경받는 원리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장노릇, 남편 노릇할 생각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섬김으로 권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이 머리의 의미는 지도자라는 의미와 더불어 지붕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남편이 섬김의 역할을 못하면 남편 아빠의 말이 식구들에게 안먹혀들어가고
이렇게 되면 가정질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때 식구들은 불안해 지게 마련입니다.
식구들이 갖출건 다 갖추고 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것은
지붕이 든든하게 제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데 그렇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을 막아주어야 할 지붕이 구멍이 휑하니 나 있으니
그 아래 사는 아내와 자녀들이 어찌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남편이 섬김을 통한 머리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가정은
마치 지붕이 새는 집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가정들 중에도 적지 않은 가정의 지붕이 새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큰소리만치고 섬김을 받기만 하겠다는 남편들의 지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고 있습니다.
남편의 리더수비은 아내를 가정을 잘 섬기고 돌보는데서 시작됩니다.
여기 섬긴다는 뜻은 사랑한다 끝까지 참는다 섬세하게 배려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남편 초청주일!
남편들 불러다 놓고 아내한테 잘하라고 하는 걸 보니 역시 목하는 여자들 편이구나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아 하고 시작되는 말씀은 남편 잘되라고 주시는 말씀,
아내들아 하고 시작되는 말씀은 아내 잘되라고 주시는 말씀
’남편과 아내들아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정이 잘되라고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들은 계급이 같은 두 사람중 한사람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다른 사람의 아래로 들어갈 때
쓰는 헬라어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남편의 뜻에 따르는 결정이 복종입니다.
하지만 여기 복종의 기준이 있습니다.
주께 하듯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결정이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셨으리라고 생각되는 결정이라면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아내역할 남편의 남편역학의 기준 역시 주께하듯입니다.
무너진 가정 무너지고 있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책임이 남편과 아내에게 있습니다.
그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며 피차 복종하고 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건강하고 견고하게 붙드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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