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본문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본 받는 삶을 말씀 드리는 중에 가장 지혜로운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놓고 그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생활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엡5:18절입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술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방탕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술을 마십니다. 술 취하므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근심과 고통을 잊으려고 합니다. 물론 잠시 동안은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요, 완전한 해결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이 세상 적인 쾌락과 방탕함으로 채워지기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지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잠23:29-35을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잇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 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 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은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사람이나를 때려도 아프 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 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결국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못쓰게 만들고 인생으로서 그 모습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술을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이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 사는 생활”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아내들이여…!”라고 하시고, 다음에 ”남편들아... !”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는 그곳을 우리는 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가정과 성령 충만은 무슨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을 여기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
이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 가정들이 행복하기를 가장 원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시대의 가정이 행복합니까! 아니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어떤 잡지 회사의 통계에 의하면 하루 평균 열 쌍이 결혼을 한다고 볼 때에 세 쌍은 이혼을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결혼하는 열 쌍 중에 세 쌍이 파탄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하는 사람들 중에 결혼 후 5년 이내에 이혼하는 비율이 전체의 7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은 결혼식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한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례 목사가 말씀을 증거 한 뒤에 서약을 하고 신랑과 신부의 손을 성경 책 위에 얹게 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그 부부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좋은 믿음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좋은 자녀도 주시고, 경제적인 여유도 주시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 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그 보스턴에 계신 목사님은 이 모든 축복들 위에 한가지를 더 보탭니다. ”만약에 이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일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한답니다. 지금 세상이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가정 문제로 인해 이 사회 문제와 청소년 문제와 윤리 도덕의 문제들이 급속히 파급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정상적인 가정과 같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들어가 보면 결혼의 위기를 맞이한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인 체 어쩔 수 없이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가정들, 그런가 하면 용기가 없어서 헤어지지 못하고 그저 되는대로 사는 가정! 어떤 부부의 고백처럼 ”다른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하면서 말하는 체념형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부부는 ”남 부끄러워서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체면형입니다. 또 어떤 부부는 ”자식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겠지요!”라고 말하는 소위 책임형의 부부가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책임형이든, 체념형이든, 체면형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사랑의 불이 꺼진 상태라는 것에서 심각한 가정 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도 한 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한 때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영화의 한 장면과 그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기분의 낭만에 빠졌던 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무슨 문제가 닥친다 할지라도 당신과 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만 하면 무서울 게 뭐냐고 자신 만만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랑의 대부분이 에로스 사랑이요, 필레오의 사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랑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잘 알고있습니다. 아가서가 얼마나 달콤한 사랑의 책인가를 아는 분들은 다 알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깊은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사랑에 취하여 있을 때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아4:1이하에 보면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들기 같 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렇게 표현을 하였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신랑이 볼 때는 마치 비둘기 눈처럼 매혹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미장원에 가서 예쁘게 하느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별로인것 같은데 신랑이 볼 때는 마치 저 길르앗산 기슭의 무리 염소 떼처럼 탐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런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이제는 체면 때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어 체념한 상태로, 책임감 때문에, 좀더 용감하면 헤어지고야 마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왜 그런 일이 발생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담과 하와 커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방금 말씀드린 그런 꿈같은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다 보면서 ”당신의 눈은 마치 비둘기 눈같이 매혹적이구려!” ”당신의 머리털은 길르앗 산에 누운 무리 염소 떼와 같이 탐스럽구려!”하면서 사랑에 취하여 마냥 노래를 부르며 즐겁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순간에 행복한 사랑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그후에 어떤 관계로 전락했습니까! 그들이 전락한 관계가 지금 21세기의 문을 열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그 순간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범죄한 그들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나에게 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내가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와도 그랬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여자만 만나게 하시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불행해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뱀만 만들어 놓지 않으셨더라도 내가 이렇게 불행해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 말 아닙니까!
그들 가정에 불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정의 비극은 지금 우리 IMF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독과 중노동! 해산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자녀들 사이에 일어 나는 칼부림! 살인 사건! 그들은 그 이후 한번도 사랑 같은 사랑을 해보지 못한 체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조상으로부터 피를 물려받고 더러운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감미로운 사랑에 빠져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기주의자들이요, 정욕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은 그런 사이였다 가도 어느 틈엔가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그런 관계로 바뀌기 쉬운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기심과 정욕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입니다. 이 죄성 때문에 부부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고, 다투게 만들고, 대화가 단절되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고독감과 단절감과 권태감이 드디어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 가서 가정을 파탄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로스의 사랑이요,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이상하게도 낭만적인 사랑 같은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약한 약점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의 비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부 황금률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전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에로스 사랑도 아니고 필레오의 사랑도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부부의 사랑이 다 식어졌다 하더라도, 아니 이미 사랑의 불이 꺼진 상태로 소망이 끊어진 가정이라도 여러분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힘쓴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더욱 차원 높은 고상한 부부와 가정으로 승화되고 회복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참된 행복의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이 되겠습니다.
첫째는 아가페 사랑으로 살 때 참으로 행복해 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섯번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25절에 두 번, 28절에 세번, 33절)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 성경에는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원문을 가지고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사랑은 에로스나 필레오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아가페”라고 하는 단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에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남편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아가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결혼 생활의 행복은 아가페 사랑으로 살 때에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모르고서는 우리의 가정은 점점 갈수록 가정의 위기는 고저 되고 말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선행적인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실 때에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셨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 무엇이 있었기에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습니까!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만 하였고, 경건하게 살지도 못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참으로 마음 아픈 것은 남편이 실직하였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하여 주었던 사랑은 무슨 사랑이었습니까! 에로스 사랑! 필레오의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그 무엇 때문에 사랑했던 그 사랑은 우리 가정의 행복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우리 부부가 이 아가페 사랑으로 묶여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이 어려운 때에 아가페 사랑으로 묶여서 이 시대의 위기에서 가정을 지켜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섬김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만이 이 시대에 가정을 위기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교훈은 아가페 사랑으로 묶이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서두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부부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령 충만과 부부 사이에는 필연적인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은 아가페 사랑에 묶여야 참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에 묶이는 비결은 우리 부부 한사람 한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복종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엡5:21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경외한다면! 참으로 주님 안에서의 삶을 원한다면 피차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복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부간에 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질서를 우리 가정에, 공동체에 주신 것입니다. 참 질서를 유지하고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말은 서로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의 위치나 역활을 존중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 생활의 위기와 고통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피차에 복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성령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우리도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부부 가운데 어느 한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낙심치 말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들이 성령의 충만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모쪼록 바라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가정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부부 사랑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술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방탕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술을 마십니다. 술 취하므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근심과 고통을 잊으려고 합니다. 물론 잠시 동안은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요, 완전한 해결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이 세상 적인 쾌락과 방탕함으로 채워지기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지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잠23:29-35을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잇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 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 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은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사람이나를 때려도 아프 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 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결국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못쓰게 만들고 인생으로서 그 모습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술을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이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 사는 생활”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아내들이여…!”라고 하시고, 다음에 ”남편들아... !”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는 그곳을 우리는 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가정과 성령 충만은 무슨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을 여기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
이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 가정들이 행복하기를 가장 원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시대의 가정이 행복합니까! 아니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어떤 잡지 회사의 통계에 의하면 하루 평균 열 쌍이 결혼을 한다고 볼 때에 세 쌍은 이혼을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결혼하는 열 쌍 중에 세 쌍이 파탄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하는 사람들 중에 결혼 후 5년 이내에 이혼하는 비율이 전체의 7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은 결혼식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한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례 목사가 말씀을 증거 한 뒤에 서약을 하고 신랑과 신부의 손을 성경 책 위에 얹게 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그 부부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좋은 믿음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좋은 자녀도 주시고, 경제적인 여유도 주시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 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그 보스턴에 계신 목사님은 이 모든 축복들 위에 한가지를 더 보탭니다. ”만약에 이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일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한답니다. 지금 세상이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가정 문제로 인해 이 사회 문제와 청소년 문제와 윤리 도덕의 문제들이 급속히 파급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정상적인 가정과 같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들어가 보면 결혼의 위기를 맞이한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인 체 어쩔 수 없이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가정들, 그런가 하면 용기가 없어서 헤어지지 못하고 그저 되는대로 사는 가정! 어떤 부부의 고백처럼 ”다른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하면서 말하는 체념형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부부는 ”남 부끄러워서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체면형입니다. 또 어떤 부부는 ”자식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겠지요!”라고 말하는 소위 책임형의 부부가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책임형이든, 체념형이든, 체면형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사랑의 불이 꺼진 상태라는 것에서 심각한 가정 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도 한 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한 때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영화의 한 장면과 그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기분의 낭만에 빠졌던 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무슨 문제가 닥친다 할지라도 당신과 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만 하면 무서울 게 뭐냐고 자신 만만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랑의 대부분이 에로스 사랑이요, 필레오의 사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랑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잘 알고있습니다. 아가서가 얼마나 달콤한 사랑의 책인가를 아는 분들은 다 알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깊은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사랑에 취하여 있을 때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아4:1이하에 보면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들기 같 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렇게 표현을 하였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신랑이 볼 때는 마치 비둘기 눈처럼 매혹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미장원에 가서 예쁘게 하느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별로인것 같은데 신랑이 볼 때는 마치 저 길르앗산 기슭의 무리 염소 떼처럼 탐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런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이제는 체면 때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어 체념한 상태로, 책임감 때문에, 좀더 용감하면 헤어지고야 마는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왜 그런 일이 발생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아담과 하와 커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방금 말씀드린 그런 꿈같은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다 보면서 ”당신의 눈은 마치 비둘기 눈같이 매혹적이구려!” ”당신의 머리털은 길르앗 산에 누운 무리 염소 떼와 같이 탐스럽구려!”하면서 사랑에 취하여 마냥 노래를 부르며 즐겁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순간에 행복한 사랑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그후에 어떤 관계로 전락했습니까! 그들이 전락한 관계가 지금 21세기의 문을 열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그 순간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범죄한 그들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나에게 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내가 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와도 그랬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여자만 만나게 하시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불행해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뱀만 만들어 놓지 않으셨더라도 내가 이렇게 불행해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런 말 아닙니까!
그들 가정에 불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정의 비극은 지금 우리 IMF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독과 중노동! 해산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자녀들 사이에 일어 나는 칼부림! 살인 사건! 그들은 그 이후 한번도 사랑 같은 사랑을 해보지 못한 체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조상으로부터 피를 물려받고 더러운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감미로운 사랑에 빠져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기주의자들이요, 정욕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은 그런 사이였다 가도 어느 틈엔가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그런 관계로 바뀌기 쉬운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기심과 정욕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입니다. 이 죄성 때문에 부부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고, 다투게 만들고, 대화가 단절되게 만들고, 상대적으로 고독감과 단절감과 권태감이 드디어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 가서 가정을 파탄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로스의 사랑이요,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이상하게도 낭만적인 사랑 같은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약한 약점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의 비결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부 황금률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전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에로스 사랑도 아니고 필레오의 사랑도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부부의 사랑이 다 식어졌다 하더라도, 아니 이미 사랑의 불이 꺼진 상태로 소망이 끊어진 가정이라도 여러분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힘쓴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더욱 차원 높은 고상한 부부와 가정으로 승화되고 회복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참된 행복의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이 되겠습니다.
첫째는 아가페 사랑으로 살 때 참으로 행복해 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섯번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25절에 두 번, 28절에 세번, 33절)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 성경에는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원문을 가지고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사랑은 에로스나 필레오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아가페”라고 하는 단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에만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남편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아가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결혼 생활의 행복은 아가페 사랑으로 살 때에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모르고서는 우리의 가정은 점점 갈수록 가정의 위기는 고저 되고 말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선행적인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실 때에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셨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 무엇이 있었기에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습니까!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일만 하였고, 경건하게 살지도 못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참으로 마음 아픈 것은 남편이 실직하였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하여 주었던 사랑은 무슨 사랑이었습니까! 에로스 사랑! 필레오의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그 무엇 때문에 사랑했던 그 사랑은 우리 가정의 행복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우리 부부가 이 아가페 사랑으로 묶여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이 어려운 때에 아가페 사랑으로 묶여서 이 시대의 위기에서 가정을 지켜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섬김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만이 이 시대에 가정을 위기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교훈은 아가페 사랑으로 묶이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서두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부부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령 충만과 부부 사이에는 필연적인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은 아가페 사랑에 묶여야 참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에 묶이는 비결은 우리 부부 한사람 한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복종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엡5:21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경외한다면! 참으로 주님 안에서의 삶을 원한다면 피차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복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부간에 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질서를 우리 가정에, 공동체에 주신 것입니다. 참 질서를 유지하고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말은 서로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의 위치나 역활을 존중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 생활의 위기와 고통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피차에 복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성령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우리도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부부 가운데 어느 한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낙심치 말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들이 성령의 충만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모쪼록 바라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가정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부부 사랑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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