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주님 우리 가정에 들어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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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다시 사신 부활절인데요.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까지 17개 교회가 부활절 연합예배를 처음으로 방콕 은혜학교에서 오늘 오후 4시에(현지시간으로) 드리게 됩니다. 작은 시작이지마는 불교의 나라에서 시작된 부활절 예배! 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주님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미 믿음 주셔서 은혜의 자리, 복된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의 가슴마다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주일 의 아침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 뜨거운 감격과 체험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지십니까 믿고 싶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고,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잠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자기 정신으로는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 하셨다가 무덤에서 깨어나 도망을 했다고도 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도 합니다. 그 당시의 모든 정황으로 이 모든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했습니다. 더욱 무덤 입구를 큰돌로 막아 놓고 아무도 못 건드리도록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도 못 믿어서 로마 군병들이 그 주변을 철통같이 지켰던 거예요. 떨고있던 제자들로서는 시체를 훔친다는 것이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어떤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들이 믿으면 깨달아 지더라는 거예요. 세상에는 알고 보면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진리가 얼마든지 있더라는 것이지요. 지금 지구가 돌고있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돌고있다는 것도 저는 잘 못 느끼겠어요. 그런데도 지구는 돌고있습니다. 분명히 평평한 땅인데 지구는 둥글더라는 거예요. 소가 푸른 풀을 먹는데 왜 하얀 젖이 나옵니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극히 한 부분만을 아는 거예요. 과학을 깊이 알아 갈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손길에 탄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예요. 다 이해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서 상식을 넘어서서 믿는 자는 복있는 자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신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사람도 태어날 때가 있는가 하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건강과도 상관이 없고, 재산과도 상관이 없어요. 지위나 지식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오래 사는 것 아니고, 돈이 많다고 장수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아는 것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죽음의 때를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해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때를 알고 산다는 것,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면 그렇게 미워할 일도, 작은 일로 다투고 목소리를 높여 싸울 필요도 없을 거예요. 내일 일은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이 모두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큰 병에 걸렸다고 죽는 것 아닙니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지 살아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불러가려고 하시면 백 약이 쓸모가 없어요.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그 길을 열어주시면 잘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 붙들고 있다가 영원히 후회하는 어리석은 사람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지난날을 도와 주신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우리의 사업을, 직장을, 자녀를, 가정을, 우리 건강을 꼭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살다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 인생인데, 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진정 잘사는 것입니까 흔히 세상사람들은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잘산다 못 산다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말 잘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워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길 걸어가는 것이 가장 잘사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자녀 기르는 것이 가장 잘 기르는 거예요. 로마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는 네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남편을 죽이고 아들에게 로마의 황제를 물려주고, 좋은 색시를 가져다 줍니다. 그렇게 하면 행복이 오고 좋을 줄 알았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나중에 네로가 어머니를 죽이게 됩니다. 자기도 자살해 죽었습니다.
믿음 떠나면 자신도 망하고, 쉽게 자녀를 망칩니다. 믿음없이는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링컨의 어머니, 록펠러의 어머니, 성경에도 위대한 인물들은 다 어머니 잘 만나서 어머니가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이고, 자나깨나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없다는 것, 너의 길은 너의 앞날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달려있다는 것 이것 가르친 거예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수록 감각이 둔해지고, 가슴이 뻔뻔해지고 양심이 마비가 되는 거예요. 병중에 가장 큰 병이 암인데, 참 안타깝게도, 대체로 젊은 분들이 많아요. 거의 모든 암들이 처음에는 안 아픈거예요. 괜찮다가 아무 문제 없다가 어제까지 열심히 일하다가, 병원에 가보니까 암이라는 거예요. 벌써 2기, 3기라는 거예요. 벌써 몇 년을 진행했는데도, 암들이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이 된 거예요. 감각이 없다는 거, 안 아프다는 거, 이것이 문제입니다. 몸살나고, 열 나고, 피나는 거 괜찮습니다. 손목 부러지고 발목 부러진 거는 병으로 취급 안 해도 됩니다. 안 아픈 게 문제예요. 영적으로도 그래요. 죄 짓고도 눈물이 안나요. 괜찮아요. 얼마든지 태연하게 교회에 일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감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은혜를 못 받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가 뭐냐 조그만 거에도 눈물이 나는 거예요.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주일에 결석만 한 번해도 너무너무 크게 죄지은 것 같다면 이건 큰 은혜받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몇 개월씩 안 나와도 아무 감각이 없어요. 잘 모른다니까요.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잘한 것 없이 온갖 죄악에 뒹굴면서도 모르는 것, 이것이 나중에 한 순간에 망하는 지름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의 심령이 늘 살아있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 만나 믿음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참 의미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참 만족과 행복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어요. 인생 살아가다 보면 뚜렷한 이유 없이 슬퍼지고 허전해 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때로 왜 사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모른 채 죽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싫어지고 작은 일에도 쉽게 낙심이 되며 때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어요.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도 후회가 되고, 과거의 상처나 실패에 매달려 벗어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더더욱 알지 못하는 앞으로의 일들로 인하여 불안합니다. 때로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갑자기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는 몸의 불편이 오기도 합니다. 좋은 직장이 있는데도 실직될 것이 염려가 되고 지금 건강한데도 앞으로 큰 병이 걸리거나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까 염려가 됩니다.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한다고 신경이 안 써집니까 안 되는 거예요. 답답하고 컬컬한 인생살이, 때로 말못할 문제와 염려와 고민 속에서 불안해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길 때 평안이 있고, 은혜가 넘쳐나고 참 기쁨이 있고, 축복의 샘이 열리게 됩니다. 영육 간의 생활이 더욱 풍성하게 열리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 품에 안겨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메카에 있는 마호메트의 무덤은 회교도들의 성지가 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유골을 묻어 둔 사리탑을 자랑합니다. 애굽인들은 피라미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듣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10;9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의인은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집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다! 이런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자유자가 됩니다. 죄에서부터 자유하고, 사망에서 자유하고,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하고, 나를 얽매이는 모든 환경에서 자유합니다. 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서 사람을 묶어버립니다. 죄의 종되게 하고, 노예 되어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를 얽매이고 있는 죄와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 걱정이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내 속에 예수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복된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 보세요. 알 수 없는 앞날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열명이 넘는 장정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을 만큼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따라 다닐 때 겁날 것이 없었지요. 예수님의 능력있는 말씀, 예수님의 기적, “아! 이런 사람이 우리 왕이 되어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이다” 많은 군중들이 환호할 때 제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날, 자기들에게 좋은 자리 하나쯤은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부풀어 있었습니다. 주님에게 장래의 기대와 꿈과 소망을 걸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없이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왕이 될 것을 기대했던 스승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거예요. 기대도, 소망도, 부풀었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더더욱 예수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때에 그들은 맥이 빠져 버린 거예요. 절망과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스승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인들 가만히 놓아두겠느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사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 그래도 제자들이 의심을 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가지고 와 보라”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러면서 영적 무장을 시키는데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들은 제자들이 담대해집니다.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이 새 힘을 얻게됩니다. 모든 두려움과 절망과 의심과 공포가 물러가 버립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 보게 되고, 이전에 생각하지 못하던 것 생각하게 되고, 이전에 갖지 못하던 것 갖게되니 담대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살이인데도 염려할 일 많고, 걱정할 거리 많습니다. 답답하고 컬컬한 시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예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 할만 하면 남편걱정, 자녀 걱정, 좀 살만하면 뜻하지 않게 건강에 이상이 오기도 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육간의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발을 뻗고 울고만 싶은 일들, 가슴 터질 답답한 일들, 감당할 수 없는 우환과 질고로 너무 막막하여 딱 죽고만 싶을 때도 있을지 몰라요. 해답이 보이지 않는 앞날 때문에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무거운 짐 때문에... “오직 이 길 뿐이다” 죽고만 싶을 때가 있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못할 괴로움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사람의 끝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이미 모든 것 끝나 버렸다고 포기할 때,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손 쓸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린 그때에 필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 듣는 곳에 살길이 있어요. 주님 만나는 곳에 예비해 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만나면, 주의 음성 들으면, 지금까지 안보이던 길이, 숨겨진 길이 보이고 열릴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 잃었더라도 부활 신앙만 잃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고, 이기는 삶, 승리의 삶 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염려로 오늘을 좀 먹게 하지 말아야 하고, 지나친 염려로 자신을 스스로 헤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보이는 곳까지 가면 더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강한 팔은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혼자서 너무나 힘들어 할 때 주님 우리에게 새 힘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결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염려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아는 체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을 찾으면 여호와 하나님은 귀를 귀울이시고, 만나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위기의 시대, 불안한 시대,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 속에서도 주안에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함이오, 우리에게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질병의 두려움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불투명한 미래의 염려와 앞날의 일로 불안할 때라도 부활하신 주님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요. 분명히 문제 있습니다. 예수믿는 우리에게도 때로 세상사는 동안 고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은 이긴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혹독한 절망의 때가 여호와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때입니다. 절망할 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에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은혜받으면 세상을 이깁니다.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길 수 있어요. 환경을 이기고, 우리를 얽매이는 모든 장애물들을 넘어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넘어설 만한 새 힘과 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면 의미가 없어요. 우리의 심령 속에서 체험되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 질뿐 아니라 불길이 우리가정과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능력의 역사가, 이런 축복이 오늘 복된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잘 안 믿어지는 분 있을 거예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보았다고 떠들어대자 제자 중에 도마가 그랬어요. 보는 것만으로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만져 보아야 알겠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손을 넣어 확인해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알기를 원하는 사람과 믿기를 원하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의 음성을 들은 도마가 후에 고백하기를 “나의 주시여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때부터 도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인도에서 순교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변하고 확신이 오고,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 깨끗이 해결 받았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시므로 육신의 문제도 해결 받았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 주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러운 기업을 물려주실 것입니다. 이미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내가 더 큰 축복을 향해, 더 큰 은혜의 자리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내 가족, 가까이 있는 내 형제 친족들을 이 복된 자리까지 인도해야만 합니다. 나도 체험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축복을 나누어 주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지십니까 믿고 싶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고,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잠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자기 정신으로는 안 믿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 하셨다가 무덤에서 깨어나 도망을 했다고도 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도 합니다. 그 당시의 모든 정황으로 이 모든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했습니다. 더욱 무덤 입구를 큰돌로 막아 놓고 아무도 못 건드리도록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도 못 믿어서 로마 군병들이 그 주변을 철통같이 지켰던 거예요. 떨고있던 제자들로서는 시체를 훔친다는 것이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어떤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들이 믿으면 깨달아 지더라는 거예요. 세상에는 알고 보면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진리가 얼마든지 있더라는 것이지요. 지금 지구가 돌고있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돌고있다는 것도 저는 잘 못 느끼겠어요. 그런데도 지구는 돌고있습니다. 분명히 평평한 땅인데 지구는 둥글더라는 거예요. 소가 푸른 풀을 먹는데 왜 하얀 젖이 나옵니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극히 한 부분만을 아는 거예요. 과학을 깊이 알아 갈수록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손길에 탄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예요. 다 이해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서 상식을 넘어서서 믿는 자는 복있는 자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신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사람도 태어날 때가 있는가 하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건강과도 상관이 없고, 재산과도 상관이 없어요. 지위나 지식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오래 사는 것 아니고, 돈이 많다고 장수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아는 것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죽음의 때를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해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때를 알고 산다는 것,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면 그렇게 미워할 일도, 작은 일로 다투고 목소리를 높여 싸울 필요도 없을 거예요. 내일 일은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이 모두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큰 병에 걸렸다고 죽는 것 아닙니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지 살아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불러가려고 하시면 백 약이 쓸모가 없어요.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그 길을 열어주시면 잘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 붙들고 있다가 영원히 후회하는 어리석은 사람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요. 지난날을 도와 주신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우리의 사업을, 직장을, 자녀를, 가정을, 우리 건강을 꼭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살다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 인생인데, 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진정 잘사는 것입니까 흔히 세상사람들은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 잘산다 못 산다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말 잘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워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길 걸어가는 것이 가장 잘사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자녀 기르는 것이 가장 잘 기르는 거예요. 로마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는 네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남편을 죽이고 아들에게 로마의 황제를 물려주고, 좋은 색시를 가져다 줍니다. 그렇게 하면 행복이 오고 좋을 줄 알았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나중에 네로가 어머니를 죽이게 됩니다. 자기도 자살해 죽었습니다.
믿음 떠나면 자신도 망하고, 쉽게 자녀를 망칩니다. 믿음없이는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링컨의 어머니, 록펠러의 어머니, 성경에도 위대한 인물들은 다 어머니 잘 만나서 어머니가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이고, 자나깨나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없다는 것, 너의 길은 너의 앞날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달려있다는 것 이것 가르친 거예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수록 감각이 둔해지고, 가슴이 뻔뻔해지고 양심이 마비가 되는 거예요. 병중에 가장 큰 병이 암인데, 참 안타깝게도, 대체로 젊은 분들이 많아요. 거의 모든 암들이 처음에는 안 아픈거예요. 괜찮다가 아무 문제 없다가 어제까지 열심히 일하다가, 병원에 가보니까 암이라는 거예요. 벌써 2기, 3기라는 거예요. 벌써 몇 년을 진행했는데도, 암들이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이 된 거예요. 감각이 없다는 거, 안 아프다는 거, 이것이 문제입니다. 몸살나고, 열 나고, 피나는 거 괜찮습니다. 손목 부러지고 발목 부러진 거는 병으로 취급 안 해도 됩니다. 안 아픈 게 문제예요. 영적으로도 그래요. 죄 짓고도 눈물이 안나요. 괜찮아요. 얼마든지 태연하게 교회에 일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감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은혜를 못 받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가 뭐냐 조그만 거에도 눈물이 나는 거예요.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주일에 결석만 한 번해도 너무너무 크게 죄지은 것 같다면 이건 큰 은혜받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몇 개월씩 안 나와도 아무 감각이 없어요. 잘 모른다니까요.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잘한 것 없이 온갖 죄악에 뒹굴면서도 모르는 것, 이것이 나중에 한 순간에 망하는 지름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의 심령이 늘 살아있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 만나 믿음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참 의미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참 만족과 행복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어요. 인생 살아가다 보면 뚜렷한 이유 없이 슬퍼지고 허전해 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때로 왜 사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모른 채 죽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싫어지고 작은 일에도 쉽게 낙심이 되며 때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어요.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도 후회가 되고, 과거의 상처나 실패에 매달려 벗어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더더욱 알지 못하는 앞으로의 일들로 인하여 불안합니다. 때로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갑자기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는 몸의 불편이 오기도 합니다. 좋은 직장이 있는데도 실직될 것이 염려가 되고 지금 건강한데도 앞으로 큰 병이 걸리거나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까 염려가 됩니다.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한다고 신경이 안 써집니까 안 되는 거예요. 답답하고 컬컬한 인생살이, 때로 말못할 문제와 염려와 고민 속에서 불안해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길 때 평안이 있고, 은혜가 넘쳐나고 참 기쁨이 있고, 축복의 샘이 열리게 됩니다. 영육 간의 생활이 더욱 풍성하게 열리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 품에 안겨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메카에 있는 마호메트의 무덤은 회교도들의 성지가 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유골을 묻어 둔 사리탑을 자랑합니다. 애굽인들은 피라미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듣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10;9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의인은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집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다! 이런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자유자가 됩니다. 죄에서부터 자유하고, 사망에서 자유하고,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하고, 나를 얽매이는 모든 환경에서 자유합니다. 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서 사람을 묶어버립니다. 죄의 종되게 하고, 노예 되어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를 얽매이고 있는 죄와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 걱정이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내 속에 예수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복된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 보세요. 알 수 없는 앞날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열명이 넘는 장정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을 만큼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따라 다닐 때 겁날 것이 없었지요. 예수님의 능력있는 말씀, 예수님의 기적, “아! 이런 사람이 우리 왕이 되어 로마를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이다” 많은 군중들이 환호할 때 제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날, 자기들에게 좋은 자리 하나쯤은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부풀어 있었습니다. 주님에게 장래의 기대와 꿈과 소망을 걸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없이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왕이 될 것을 기대했던 스승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거예요. 기대도, 소망도, 부풀었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더더욱 예수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때에 그들은 맥이 빠져 버린 거예요. 절망과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스승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인들 가만히 놓아두겠느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사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 그래도 제자들이 의심을 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가지고 와 보라”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러면서 영적 무장을 시키는데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들은 제자들이 담대해집니다.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이 새 힘을 얻게됩니다. 모든 두려움과 절망과 의심과 공포가 물러가 버립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 보게 되고, 이전에 생각하지 못하던 것 생각하게 되고, 이전에 갖지 못하던 것 갖게되니 담대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살이인데도 염려할 일 많고, 걱정할 거리 많습니다. 답답하고 컬컬한 시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예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 할만 하면 남편걱정, 자녀 걱정, 좀 살만하면 뜻하지 않게 건강에 이상이 오기도 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육간의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발을 뻗고 울고만 싶은 일들, 가슴 터질 답답한 일들, 감당할 수 없는 우환과 질고로 너무 막막하여 딱 죽고만 싶을 때도 있을지 몰라요. 해답이 보이지 않는 앞날 때문에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무거운 짐 때문에... “오직 이 길 뿐이다” 죽고만 싶을 때가 있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못할 괴로움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사람의 끝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이미 모든 것 끝나 버렸다고 포기할 때,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손 쓸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린 그때에 필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 듣는 곳에 살길이 있어요. 주님 만나는 곳에 예비해 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만나면, 주의 음성 들으면, 지금까지 안보이던 길이, 숨겨진 길이 보이고 열릴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 잃었더라도 부활 신앙만 잃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고, 이기는 삶, 승리의 삶 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염려로 오늘을 좀 먹게 하지 말아야 하고, 지나친 염려로 자신을 스스로 헤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보이는 곳까지 가면 더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강한 팔은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혼자서 너무나 힘들어 할 때 주님 우리에게 새 힘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결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염려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아는 체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을 찾으면 여호와 하나님은 귀를 귀울이시고, 만나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위기의 시대, 불안한 시대,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 속에서도 주안에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함이오, 우리에게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질병의 두려움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불투명한 미래의 염려와 앞날의 일로 불안할 때라도 부활하신 주님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요. 분명히 문제 있습니다. 예수믿는 우리에게도 때로 세상사는 동안 고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은 이긴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혹독한 절망의 때가 여호와 하나님이 손을 대시는 때입니다. 절망할 수 없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에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은혜받으면 세상을 이깁니다.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길 수 있어요. 환경을 이기고, 우리를 얽매이는 모든 장애물들을 넘어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넘어설 만한 새 힘과 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면 의미가 없어요. 우리의 심령 속에서 체험되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 질뿐 아니라 불길이 우리가정과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능력의 역사가, 이런 축복이 오늘 복된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잘 안 믿어지는 분 있을 거예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보았다고 떠들어대자 제자 중에 도마가 그랬어요. 보는 것만으로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만져 보아야 알겠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손을 넣어 확인해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알기를 원하는 사람과 믿기를 원하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의 음성을 들은 도마가 후에 고백하기를 “나의 주시여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때부터 도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인도에서 순교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곳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변하고 확신이 오고,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 깨끗이 해결 받았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시므로 육신의 문제도 해결 받았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 주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러운 기업을 물려주실 것입니다. 이미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내가 더 큰 축복을 향해, 더 큰 은혜의 자리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내 가족, 가까이 있는 내 형제 친족들을 이 복된 자리까지 인도해야만 합니다. 나도 체험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축복을 나누어 주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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