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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복받은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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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은 가정은 가족들이 서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형제간에도 서로 사랑하며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가정이 복받은 가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가정은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복으로 알고 그렇게 믿고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그것이 참 신앙인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거나 권력이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도“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9-12)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율법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이 있는데, 남이 가지지 못한 교회의 높은 직분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높이고 우러러 보기도 하는 사람인데,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주실 상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는 잘 살겠는데 하늘나라에서는 잘 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높임을 받는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높임 받을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보아서는 복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없고 확신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직분도 있고 더 나아가서 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뭐라고 씌어 있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율법사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알면서도 행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라고 대답하니 예수님께서는“가서 이와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랑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율법을 많이 알고,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기에 구원 받는 것에 확신이 없고 그래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정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더욱 영생을 확신하고 기뻐하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나누며 사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야기 하는 것 가운데 어떤 얘기가 많습니까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어디로 놀러 갈 것인지 이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가운데 발견되어지는 영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얘기를 하고,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을 얘기하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서 충성, 헌신, 사랑하며 살아갈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갈때에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신혼부부가 아주 예쁘고 아름다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참 행복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부부의 집에 예언자가 찾아왔습니다.
“길을 떠나시오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
그래서 이 세 식구는 행복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얼마를 가다보니 가시밭길이 나왔습니다. 곳곳에 가시나무가 있어 쉽게 지날 수 없었습니다. 조끔만 닿아도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부부는 아기가 다칠까봐 걱정하면서 품에 꽉 안았습니다. 부부는 아기를 안고 몸에 피가 나기는 했지만 꿋꿋이 참고 참아서 그 가시밭 길을 겨우 통과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불평을 했습니다.
“여보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예언자가 말하기를 갈수록 길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이게 뭐예요”
그러자 남편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가시밭길을 지나오느라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고통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희생 때문에 이 아기가 아무런 상처없이 지금도 방글방글 웃고 있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이 길에서 희생을 배웠소”
조금 더 가다보니 광야가 나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돌과 모래 그리고 찬 바람이 부는 광야입니다. 이 찬 바람이 부는 광야에서 그 부부가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보니 어느새 그 아기는 십대의 청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광야의 바람 속에서 이 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꽉 껴안고 지나갔습니다. 이때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예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길을 가면 갈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잖아요”
그러자 남편이 얘기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광야의 찬 바람 속을 지나면서 너무나 힘이 들었어요. 당신도 나도 그리고 우리의 아들도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광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서로 붙잡아 주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는 의지를 배웠소. 보시오 당신도 우리의 아들도 웃고 있지 않소”
다시 이 세 식구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계곡이 나왔 습니다. 울창한 계곡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20대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 계곡이 언제 끝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 가정은 계곡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계곡에서 희망을 배웠소”
또 길을 가다보니 험준한 산이 나왔습니다. 산 밑에서 보니 아들은 어느새 30대의 성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 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산을 오르지 못해 헉헉 거리며 늙어가는 이 부부를 30대의 아들은 양손으로 받치면서 산을 올라갔습니다. 아내가 다시 불평했습니다.
이에 남편은“아니오, 아까 우리 아들이 손잡아 밀어주고 이끌어 주니 당신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이었소. 이제 우리는 진정한 삶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이 산을 넘자 예언자가 말했던 마을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어느새 40대의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지마자 남편이 몸 저 눕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병 간호를 하면서 아내는 또 불평을 합니다.
“그 낯선 예언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결국 이것이 우리 생애의 목표였다는 말이예요”
남편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없어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 석양의 노을이 출렁이던 하늘이 환히 열리면서 천사들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천사들이 남편을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은 방끗이 웃으면서 아내에서 대답했습니다.
“여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 그리고는 환희에 찬 얼굴로 하늘을 향해 손짓하면서,“여보 하늘에서 만납시다” 라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제서야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그 예언자의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길은 갈수록 좋아지고 마지막은 처음보다 아름답군요”
이것이 가정입니다. 희생이 있고 신뢰가 있고, 희망과 도움이 있고 하늘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이 가정인 것입니다. 얼마나 벌었는가, 얼마나 높아졌는가, 얼마나 대접받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희생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요 신뢰없이 사춘기의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느냐 말입니다. 신뢰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반항을 하고 가출하고 부모를 떠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고 결혼하는 우리의 20대의 자녀들을 보지 않습니까 결혼을 하니 부모의 마음을 알고 부모를 도울 줄 알고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덧 자녀들의 나이가 40대를 넘어서게 되면 부모도 인생의 마지막을 고할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의 사랑을 알고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우리에게는 참된 기쁨이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의 대답처럼 참 성공은, 참 행복은 얼마나 가졌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아주 못된 여자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방에서 철학을 논하고 있는데 아내가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방문을 열고 소크라테스에게 부었습니다. 얼마나 당황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어나 물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는구나”옆에서 이것을 보고있던 제자들은“선생님 우리도 결혼해야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암 결혼해야지 당연히 결혼해야하네. 만일 어진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요, 내 아내와 같은 사람을 얻는다면 적어도 철학자는 될걸세”
여러분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말에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잘 되면 만사가 잘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사가 잘 되지 못하는 이유는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사회질서의 제도중 가장 첫 번째가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사회가 생기고 국가가 생겼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삶에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기초가 잘 되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마지막 절에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하십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의 비유입니다.
모래 위에도 집을 짓고 반석 위에도 집을 지었습니다. 어느 집이 잘 지어졌는지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비가오고 홍수가 나고 물이 밀어 닥칠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고 반석위에 지은 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초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아무리 아름답게 집을 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사회에 나가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억 만금을 벌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초는 가정이란 말입니다. 가정이 잘 되야 모든 일이 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정을 보통 세 종류의 가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가정, 둘째는 현대적인 가정 그리고 셋째는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이루어야 할까요
1. 전통적인 가정
전통적인 가정은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에는 가장인 남자가 대장입니다. 그래서 가장이 하라면 그저 하는 것입니다. 안하면 잘못된 것이고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맏이는 맏이노릇을 해야하고 막내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가정입니다.
‘결혼했으면 그냥 살아야지 별수 있는가’하면서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 시집을 잘 못 가서 한달에 몇 번씩 돌아오는 제사 때문에 평생 제사만 지내다가, 애만 키우다가 볼일 다 봤다는 분도 있습니다.
2. 현대적인 가정
현대적인 가정은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필요없으면 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치과에 갔었습니다. 차례를 기다리다가 잡지를 보았습니다. 블란서의 한 디자이너 가정을 몇 장에 걸쳐서 칭찬하고 높여주는 기사였습니다.
뭐가 그렇게 칭찬받을만한 가정인가 궁금하여 그 내용을 읽어보니 결론은 딱 한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디자이너로서 능력도 있고, 가진 것도 있는데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둘 낳고 잘 산다는 것이 높임 받고 존경받는 일이라고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블란서에서는 능력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과 결혼해서 살지 않고 애를 낳아도 동거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 디자이너만 유독 결혼식을 올리고 두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 귀하기에 그렇게 높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그렇게 높임 받아야 할 일인가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 일을 그렇게 높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실용적인 삶을 살아 갑니다. 필요하면 살고 필요하지 않으면 헤어져도 괜찮고 결혼 안해도 좋다는 세상속에서 결혼했다고 하는 그 자체는 그렇게 높임 받는 것입니다.
3. 성경적인 가정
성경적인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성경적인 가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가정의 구성원을 어떤 모습으로 대하는가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자식은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고 가장은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모습으로 대합니다. 또한 현대적인 가정에서는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가정에서는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짐승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의 생명은, 인생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명이든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내가 병들고 가난하게 되면 버리고 외면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찾아주시고 하다못해 군대귀신에 들려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돼지 이천 마리와 바꾸실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온전케 하시고 살리셨던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정의 구성원들을 바라볼 때 마다 그가 어떠한 위치와 형편이 있든지 간에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여겨 나갈 때에 성경적인 가정, 사랑하는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가정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 남편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셨고, 이 아내도 내게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 자녀도 나에게 주셨고 이 부모도 나에게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교회에 부임하여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빚진자의 심정입니다.
제가 이 교회의 목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저보다 20여년전에 먼저 부임하셔서 개척하셔서 이만큼 까지 만들어주신 고두선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이 교회오기 전에는 그분을 뵌 적도, 그분을 만나 얘기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자리에 섰을 때 가정 먼저 생각나는 분은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고생하고 헌신하셔서 내가 후임자로 오게된 그 빚진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 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두 빚진자입니다. 죄로 인해서 죽을 인생을 천국가게 했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빚진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마땅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심정으로 주님을 향해 복음 전하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충성하는 일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기에 부모에게 잘 해야 합니다. 제가 어제 결혼식을 주례하면서도 말했습니다.
이제 얻은 남편, 30년 동안 해산의 고통으로 태어나게 하고 키워주고 희생하고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중에 키워서 남편으로 만들어준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반대로 이제 얻은 아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어디서 주워왔습니까
30년 동안 이 아내를 낳고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신 장인, 장모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부모님께 공경하는 것은 마땅히 빚진자의 심정을 가지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삶을 살아야 참 신앙인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시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30년 동안 기른 화초가 있다면 그 값은 물론이고 마음놓고 그 화초를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화초보다 더 귀한 딸 자식을 고이고이 길러다가 그 가정에 보냈는데 그 사돈에게 빚진자의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감사하고 마땅히 사돈들을 높이고 살아야 참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며느리로서 시부모에게, 시부모로서 며느리에게 잘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경쟁상대로 보면서 적대감이나 질투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비교하면서‘나처럼 왜 그렇지 않느냐’라고 얘기해서도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에 귀한 사람을 보내셨다고 하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다시 말하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을 잘 못한다고 해서 자녀들이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이 돕는 것은 한계가 있기에 적어도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도움은 자녀들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고, 나의 산성이 되고, 나의 반석되고, 나의 노후 대책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시고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보다 더 확실하고 더 영광 스러운 대책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자녀들을 키워 주었다는 이유로 당연히 부모의 말을 다 들어야 한다고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선물하고 순수하게 지원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가정의 안전감을 주기 위해 더욱 손자손녀들을 위해 축복해 주고, 자녀들을 축복해 주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성도의 모습인줄로 믿습니다.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잘 도와드려야 합니다. 시부모를 그저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면서 내 부모로 알고, 내 사랑하는 남편을 키워주신 부모님으로 생각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목욕탕에 가면 등도 밀어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맛있는 것도 사 드리는, 딸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 은혜가 있고, 그런 가정에 기쁨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적인 가정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형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정이 복받은 가정이고 은혜 받은 가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정을 다시 돌아보면서 이 사랑 속에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물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천국은 어떻게 생겼나요”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천국은 우리 가정과 꼭 같단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살아가는 그 곳이 천국이란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우리의 가정이 지옥 같다는 얘기는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복된 가정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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