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의 구심점
본문
5월은 가정의 달로써 여러 가지 기념일이 5월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모님 주일, 가정주간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는 것은 가정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서구의 개인주의가 아무리 발달하여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한 마디로 가정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노동하고 늙고 죽는 모든 것이 가정에 깊이 관계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모태이고 인격형성의 공장이며 삶과 죽음의 안식처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생명의 근거인 가정이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오랜 역사를 통해 내려오던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가 이제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산업사회가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핵가족으로 바뀌게 되고, 또 21세기 전후로 가정해체주의의 바람이 불어, 실험결혼이다 또는 독신주의, 가정파괴 등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가정파괴와 함께 우리 가정을 위협하고 뒤흔드는 무서운 힘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심점의 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물질주의가 가정을 지배하고 ,부부의 관계보다는 자녀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극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놓고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창세기 2장의 본문 말씀은 인간의 가정의 시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다음 사람을 창조하시고 함께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창조자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혜를 잊는다면 가정의 구심점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 가정은 곧,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함께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무시하며 결코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관심과 중요성을 더 많이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만질 수 없는 것에는 소흘 해 지는 것이 우리의 생활 관습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를 신앙의 세계에서 멀리 떠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나 그의 뜻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도는 덜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이 인간 생명이나 사랑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가정에는 삶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없어지게 되고 그 대신 미움과 갈등과 분열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 없이 세상적인 것 특히 물질주의 위주로 나갈 때 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지 쉽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다음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자연을 관리하고 이름을 붙어 주고 동산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물질은 그가 손수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 분명해 집니다. 우리 가정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피조물인 물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가정의 신주로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여호와 하나님과 물질의 자리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치 전도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니까 모든 물질을 다 주셨습니다. 물질 없이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곧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창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물주의적 공산주의가 70년의 짧은 역사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도 바로 이 가치전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청와대의 김 대중 대통령도 물질 중심주의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물질주의가 들어 갈 때 가정의 파괴와 위기가 닥쳐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로써 개혁교회 곧, 장로교회의 창시자가 된 존 칼빈은 말하기를 가정은“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작은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사교장에 불과한 것처럼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지 않을 때, 그곳은 사막처럼 불모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이며 세계적 신학자이었던 W. 템풀은 가정생활을 성예전에 비교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을 때 이것은 마치 성만찬을 베푸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감사함으로 나누는 식사야 말로 성예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식탁이 비록 보기에는 초라하다 할지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넘칠 때 그 곳에는 만족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도 감사와 사랑이 빠져 버리면 그 음식은 독약으로 변하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아는 신앙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의 두 번째 구심점은 부부의 관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해 같은 구심점이라면 부부는 달 같은 구심점이라 표현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반사하는 작용이 곧 부부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9:4-6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짝을 묶었기에 나눌 수 없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줄로 묶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P. 틸리히교수는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하나 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1-25말씀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말이 오늘 현대 여성들에게는 거슬리게 들리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 말을 믿음 안에서 존경한다는 말로 바꾸어 해석한다면 더 듣기 좋을 것입니다. 要는 부부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로 있으면서 가정을 유지하려면 사랑과 존경은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여야하고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사회가 농경문화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부부의 관계를 갈라놓는 이와 같은 사회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밭에서 함께 일하며 대화하고 먹고 쉬는 것에서 서로 하루 종일 헤어져서 따로 따로 일하고 먹고 쉬는 생활로 변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서 대화하고 삶을 나누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부부의 구심점을 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문제입니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에 대하여 애정과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가정은 특히 자녀에 대하여 지나친 보호와 투자로 가정경제는 물론이고, 부부관계가 이차적으로 떨어지고 마는 위기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과도한 사교육비라든지 유학을 위한 부부의 생이별은 남편의 무리한 노동과 피로, 부정부패로의 유혹과 범죄, 장기 이별로 인한 가정파탄 등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너무나 위험한 요소가 우리 주변에 많이 있고 우리는 그 길을 또 쉽게 선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이 한 처음에 만드신 부부의 사랑관계라는 기본원리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의 기초를 너무나 쉽게 저버리는 데에 익숙해져 왔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초와 과정은 깡그리 부시하고 최고의 목적만을 쳐다보고 달리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 결과는 가정파괴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한 교수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과 딸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또한 그의 부인도 박사 공부하러 미국에 갔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는 가족 셋을 공부시키기 위해 불철주야로 연구를 하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교수나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제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의 월급모두, 부수입 모두를 미국가족에게 보내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근검절약하며 살아갔습니다. 드디어 그는 병에 걸리고, 병명을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이었고 나는 그의 장례식을 집례해 주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 헨리 밴다익의 시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반드시 돌담만이 감옥을 만들고 철창만이 감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또한 대리석 방바닥과 금을 박은 담벽이 가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집이든지 사랑이 깃들고 우정을 존중하는 그런 집은 행복한 가정이다”
가정이 왜 있어야 합니까
가정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우선 자녀를 낳고 키우고 교육하고 출세시키는 그런 공장은 결코 아닙니다. 행복을 서로 찾고 행복을 서로 누리고 나누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 행복은 부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 생기는 일종의 기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 50년을 살아온 노파가 그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남편은 자기의 사랑과 이해를 죽을 때까지 보답해도 못다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는 남편의 끊임없는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노부부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날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마음의 친절을 표현하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고, 친절하고, 돌보아주고, 희생할 때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묶으신 사랑의 끈을 붙잡는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부부의 사랑을 절정으로 나타낸 하나의 일화가 있었습니다. 스트라우스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배가 빙산에 부딪치고 파손되어 모든 부인과 어린이들과 함께 보트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보트로 안내하였습니다. 부인은 한 발을 디뎠다가 다시 갑판으로 올라섰습니다. 남편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아니 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혼자 살아나가는 것 보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영원한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가라앉는 타이타닉호 위에서 서로 힘껏 손을 붙잡고 조용히 물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부부의 참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내외가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심점을 우리가 확립해 나아갈 때 자녀교육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초는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교육의 원초적 모델인 것입니다. 아마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1-5절 말씀에서 자녀들에게 권면하기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녀로써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공경을 받으려면 부모는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교육과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돈독한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 사랑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복사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게 되는 있는 것이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사람은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자녀를 가르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대학에 다니는 어떤 여학생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가족들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것을 다 나에게 주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데 돈, 교육 친구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젊은이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가정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구심점 즉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할지라도 인간의 창조주가 여호와 하나님인 것과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라는 진리를 몸소 가르치지 못할 때 우리의 수고는 모두 허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느 소년에게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소년의 대답은 교회의 사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 종치고 교회당을 돌보는 경건하고 성실한 모습에 깊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수정할 점이 없는 지 깊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모님 주일, 가정주간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는 것은 가정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서구의 개인주의가 아무리 발달하여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한 마디로 가정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노동하고 늙고 죽는 모든 것이 가정에 깊이 관계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모태이고 인격형성의 공장이며 삶과 죽음의 안식처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생명의 근거인 가정이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오랜 역사를 통해 내려오던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가 이제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산업사회가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핵가족으로 바뀌게 되고, 또 21세기 전후로 가정해체주의의 바람이 불어, 실험결혼이다 또는 독신주의, 가정파괴 등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가정파괴와 함께 우리 가정을 위협하고 뒤흔드는 무서운 힘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구심점의 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물질주의가 가정을 지배하고 ,부부의 관계보다는 자녀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극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놓고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창세기 2장의 본문 말씀은 인간의 가정의 시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다음 사람을 창조하시고 함께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창조자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혜를 잊는다면 가정의 구심점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 가정은 곧,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함께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무시하며 결코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관심과 중요성을 더 많이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만질 수 없는 것에는 소흘 해 지는 것이 우리의 생활 관습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를 신앙의 세계에서 멀리 떠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나 그의 뜻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도는 덜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이 인간 생명이나 사랑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때, 그 가정에는 삶의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없어지게 되고 그 대신 미움과 갈등과 분열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 없이 세상적인 것 특히 물질주의 위주로 나갈 때 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지 쉽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다음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자연을 관리하고 이름을 붙어 주고 동산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먹으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물질은 그가 손수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 분명해 집니다. 우리 가정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피조물인 물질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가정의 신주로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여호와 하나님과 물질의 자리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치 전도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니까 모든 물질을 다 주셨습니다. 물질 없이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곧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창조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물주의적 공산주의가 70년의 짧은 역사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도 바로 이 가치전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청와대의 김 대중 대통령도 물질 중심주의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물질주의가 들어 갈 때 가정의 파괴와 위기가 닥쳐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로써 개혁교회 곧, 장로교회의 창시자가 된 존 칼빈은 말하기를 가정은“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작은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사교장에 불과한 것처럼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지 않을 때, 그곳은 사막처럼 불모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이며 세계적 신학자이었던 W. 템풀은 가정생활을 성예전에 비교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을 때 이것은 마치 성만찬을 베푸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감사함으로 나누는 식사야 말로 성예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식탁이 비록 보기에는 초라하다 할지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넘칠 때 그 곳에는 만족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도 감사와 사랑이 빠져 버리면 그 음식은 독약으로 변하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할 줄 아는 신앙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의 두 번째 구심점은 부부의 관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해 같은 구심점이라면 부부는 달 같은 구심점이라 표현하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반사하는 작용이 곧 부부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19:4-6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짝을 묶었기에 나눌 수 없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줄로 묶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P. 틸리히교수는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하나 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1-25말씀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말이 오늘 현대 여성들에게는 거슬리게 들리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 말을 믿음 안에서 존경한다는 말로 바꾸어 해석한다면 더 듣기 좋을 것입니다. 要는 부부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로 있으면서 가정을 유지하려면 사랑과 존경은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여야하고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사회가 농경문화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부부의 관계를 갈라놓는 이와 같은 사회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밭에서 함께 일하며 대화하고 먹고 쉬는 것에서 서로 하루 종일 헤어져서 따로 따로 일하고 먹고 쉬는 생활로 변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서 대화하고 삶을 나누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부부의 구심점을 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문제입니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에 대하여 애정과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가정은 특히 자녀에 대하여 지나친 보호와 투자로 가정경제는 물론이고, 부부관계가 이차적으로 떨어지고 마는 위기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과도한 사교육비라든지 유학을 위한 부부의 생이별은 남편의 무리한 노동과 피로, 부정부패로의 유혹과 범죄, 장기 이별로 인한 가정파탄 등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너무나 위험한 요소가 우리 주변에 많이 있고 우리는 그 길을 또 쉽게 선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이 한 처음에 만드신 부부의 사랑관계라는 기본원리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의 기초를 너무나 쉽게 저버리는 데에 익숙해져 왔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초와 과정은 깡그리 부시하고 최고의 목적만을 쳐다보고 달리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 결과는 가정파괴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한 교수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과 딸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또한 그의 부인도 박사 공부하러 미국에 갔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는 가족 셋을 공부시키기 위해 불철주야로 연구를 하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교수나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제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의 월급모두, 부수입 모두를 미국가족에게 보내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근검절약하며 살아갔습니다. 드디어 그는 병에 걸리고, 병명을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이었고 나는 그의 장례식을 집례해 주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 헨리 밴다익의 시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반드시 돌담만이 감옥을 만들고 철창만이 감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또한 대리석 방바닥과 금을 박은 담벽이 가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집이든지 사랑이 깃들고 우정을 존중하는 그런 집은 행복한 가정이다”
가정이 왜 있어야 합니까
가정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우선 자녀를 낳고 키우고 교육하고 출세시키는 그런 공장은 결코 아닙니다. 행복을 서로 찾고 행복을 서로 누리고 나누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 행복은 부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 생기는 일종의 기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 50년을 살아온 노파가 그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남편은 자기의 사랑과 이해를 죽을 때까지 보답해도 못다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는 남편의 끊임없는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노부부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날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마음의 친절을 표현하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고, 친절하고, 돌보아주고, 희생할 때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묶으신 사랑의 끈을 붙잡는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부부의 사랑을 절정으로 나타낸 하나의 일화가 있었습니다. 스트라우스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배가 빙산에 부딪치고 파손되어 모든 부인과 어린이들과 함께 보트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보트로 안내하였습니다. 부인은 한 발을 디뎠다가 다시 갑판으로 올라섰습니다. 남편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아니 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혼자 살아나가는 것 보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영원한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가라앉는 타이타닉호 위에서 서로 힘껏 손을 붙잡고 조용히 물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부부의 참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내외가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구심점을 우리가 확립해 나아갈 때 자녀교육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초는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교육의 원초적 모델인 것입니다. 아마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1-5절 말씀에서 자녀들에게 권면하기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녀로써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공경을 받으려면 부모는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교육과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돈독한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 사랑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복사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게 되는 있는 것이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사람은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자녀를 가르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대학에 다니는 어떤 여학생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가족들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것을 다 나에게 주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데 돈, 교육 친구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젊은이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가정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구심점 즉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할지라도 인간의 창조주가 여호와 하나님인 것과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라는 진리를 몸소 가르치지 못할 때 우리의 수고는 모두 허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느 소년에게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소년의 대답은 교회의 사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 종치고 교회당을 돌보는 경건하고 성실한 모습에 깊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수정할 점이 없는 지 깊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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