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아담과 하와의 가정
본문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여호와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여호와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여호와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