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에서의 나의 위치
본문
어떤 목사님께서 결혼주례를 3시간 30분을 했다고 아주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시길래 저 양반이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결혼예식을 하는데 설교가 귀에 들어오던가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3시간 30분을 한다면 그것은 신랑신부를 고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나 물었더니 가정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서랍니다. 이 양반 눈치는 없어도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리기 위한 그 마음은 이해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가정에서의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행복이란 질서위에서 이루어 집니다. 질서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고 그 위치에서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알파벳이나 한글 쓰는 법 같은 것은 누구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니면 가르쳐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선악의 기준입니다. “이건 나쁜 짓이야 이것은 하면 안 돼 이것은 해” 이 기준을 부모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관계라고 하는 것은 나는 말씀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말씀만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습니까 책임지지 않으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어기신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기초단위인 부부관계에 있어서 위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18절에 보시면 남자와 여자의 위치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고 계십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 남자만 먼저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만드실 때 다 쌍쌍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남자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를 혼자 있게 하셨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고 남자만 덜렁 만드셨을까요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너무나도 급했기 때문에 일단 하나라도 만들고 보자 하고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가 독처하게 하심으로써 여자가 얼마나 필요하며 여자가 없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전한지 철저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여자 없이 남자만 만드신 것입니다. 가끔 부인들이 속상하면 이런 불평을 합니다. “내가 없어져 봐야 이 식구들이 내 소중함을 알아” 이것은 상당히 성경적인 불평입니다. 그런데 없어지려고 해도 갈데 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계속 집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없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늦게 등장시키셨습니다.
남자는 여자 없이 동산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물론 불편한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요 그러나 동물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남자는 심각한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까 전부 둘씩입니다. 하나를 불렀는데 둘이 오고 하나를 돌려보냈는데 둘이 갑니다. “왜 너희 둘은 같이 가냐” “우리는 한쌍이거든요”그렇게 다 둘씩인데 아담만 혼자였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다른 짐승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아주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만 혼자였어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빈틈이 있겠습니까마는 무언가 허전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뵈어도 좀 이상합니다. ‘남자가 저렇게 혼자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말씀을 자꾸 하십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도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자는 좀 혼자 있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노총각으로 있다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를 못 구해서 애쓰다가 드디어 결혼한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너무 아내를 사랑해서 하루에 열 번씩 전화합니다. 노총각으로 지내면서 여자의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키가 크네 적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까 요리 솜씨 운운하는 이야기가 어디서 나와요 너무 일찍 결혼하면 부인이 소중한 줄 모릅니다. 아담이 혼자 있을 때 어느 정도로 외로웠느냐 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였습니다. 그 사무친 뼈로 여자를 만든 것입니다.
2.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돕는 배필’은 약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협력자란 뜻입니다. 아마 여자 분들은 이 부분에서 불만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결국 남성위주구나 왜 여자를 겨우 돕는 배필이라 하시지”
여기서 ‘돕는 배필’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이란 뜻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돕고 여자가 남자를 도와서 서로가 완성된 인격체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돕는 배필’이지 여자만 헌신적으로 빨래하고 다리미질하고 밥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한테 “왜 결혼하려고 합니까” 물으면 “빨래하기 싫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세탁기와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불행합니다.
엡5:28-29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남자의 가장 큰 사명은 사업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서 참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사람에게는 회장, 사장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남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 모자라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돕고 보완함으로써 완전한 인격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남자나 “여호와 하나님이 왜 남자를 만드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여자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여기 ‘보완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보완합니까
첫째로 성격적 보완입니다. 완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성격적으로 조금씩 부족합니다. 한쪽이 발달한 사람은 다른 쪽이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꼼꼼한 사람은 대인관계가 부족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을 대충대충 합니다. 이렇게 부부는 서로 성격적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찾을 때 보면 자신과 성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꼼꼼한 사람은 덜렁덜렁한 사람을 원하고 덜렁덜렁한 사람은 꼼꼼한 사람을 원합니다. 물론 같은 성격끼리 만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성격일 때는 사실 자신들의 문제를 잘 모릅니다. 똑같으니까요 그리고 서로 싸우다가 지칩니다. 좋을 때는 굉장히 좋아서 다른 집보다 몇 배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안 좋을 때는 훨씬 못합니다.
남편의 훈련은 아내가 시킵니다. 어머니가 못 바꾼 것을 아내는 매일 잔소리를 해서 바꿉니다. 또 아내의 훈련은 남편이 시킵니다. 그래서 부부는 상대방의 충고를 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 나는 부족해, 반쪽이야 그러니까 한 10년은 잔소리를 듣자”하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둘째는 성적인 보완입니다. 양성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을 하나씩만 주셔서 서로가 결합해야 성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부가 성적으로 결합해야 자녀가 생기고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부부는 자기 몸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상대방의 것입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이고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몸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성적으로 요구할 수 있고 실제로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에게 이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매일 피곤하게 돌아오는 남편에게 “오늘은 좀 싱싱하게 돌아와 봐요”하는 것은 주님의 권위로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날은 무조건 싱싱하게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명령입니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마구 상하게 하면 결국 다른 한쪽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편이 병들면 누가 책임집니까 아내가 책임지고 다 감당해야 합니다. 아내가 병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병들면 안 되는 거예요 부부의 몸은 각각 자기 몸이 아닙니다. 한쪽 배우자가 죽었을 때 다른 한쪽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큰 충격입니다.
신입사원들은 자기 몸을 사장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인의 말을 안 듣고 사장이 시키는 대로 좇아 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사장과 결혼시켜 버려야 합니다. 집에 못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칫솔 치약 다 싸들고 회사 가서 살라고 하세요 이 몸이 누구 몸인데 그렇게 합니까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중에 부장이 되고 나서 건강을 다쳐보면 ‘아 내가 속았구나’하고 아내 말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아내는 악처여야 좋습니다. 악처가 되어야 남편의 건강과 도덕성이 보존됩니다. 그래서 남편들에게 이상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살롱의 성냥갑이 나왔다 하면 그냥 결단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오래 갑니다. 남편이 건강관리를 안 하면 사생결단을 내버려야 해요 그래야 백년해로하지요 오늘부터 악처가 되세요 늦게 들어오고 립스틱을 묻혀오고 밥도 안 먹고 밤샘하면서 돌아다닐 때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악처가 남편을 지킵니다. 어영부영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커피나 마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면 안됩니다.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들도록 건강이나 도덕성에서 정말 성공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유명한 악처 사모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악처가 먼저 죽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또 건강으로 구십이 넘도록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내 덕이었다”
셋째로, 사회적으로 서로를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완한다는 것은 부부가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과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특이 어른들의 조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부부가 내려야 하고 특히 남자가 내려야 합니다. 거기에 시부모의 의견이 개입되거나 친정의 의견이 개입되면 이미 그 가정은 사회적인 단위로서 역할을 잃은 것입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은 자기와 아내가 의사결정을 할 때 자신의 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박고 가정의 의사결정을 자신의 아버지나 장인이 내릴 때 그 남자는 ‘병신’소리를 듣습니다. 이 가운데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시면 “이제부터는 자녀들에게 문제를 맡기십시오” 자녀들이 좀 굶고 헤매더라도 내버려두세요 끼여들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내와 남편 사이에 끼여들면 안됩니다. 결정은 부부가 내리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면 어떤 어려움도 이깁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고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는 가정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이깁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뱀이 파고들면서 가정이 엉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질서를 깨뜨리면 안됩니다.
넷째로, 부부는 영적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신앙이 다 좋으면 정말 좋지요 그러나 그런 가정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유아세례를 부모중 한 쪽이 세례를 받았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양쪽이 다 세례를 받아야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축복 중에서 축복이었습니다. 왜 양쪽 다 세례를 받은 가정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습니까 한쪽이 시험 들면 다른 쪽이 돕고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이 기도로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보완해서 사탄의 역사를 이기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의 지위나 재산은 놀이터에 있는 그네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타고 놀다가 때가 되면 가야 합니다. 직책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남의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기에 한번 앉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확실히 아내의 것이고 아내는 남편의 것입니다. 자식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크면 다 떠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만큼은 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확실하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남편한테는 ‘병신 같은 게... ’ 하면서 무시하고 자식한테는 먹을 것을 챙겨주고 과외 시키다가 나중에 자식이 떠나면 결국 그 병신하고 둘이 남는 거예요 너무 심한 말 같습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직책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면 이미 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기게 되어 있어요 어려움이 겹쳐올 때 아내가 말합니다.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남편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책임지겠소”그러면 이깁니다. 분명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는 나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같이 서게 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 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업적을 남겼는가를 묻지 않으십니다. 남편에 묻기를 “너는 아내를 얼마만큼 채워주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아내에게는 “너는 남편을 얼마나 채워주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서로를 얼마나 완성시켜 주었느냐,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자란 이웃을 많이 채워주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큰상을 주십니다. 신앙이 좀 떨어지는 남편을 많이 보완해서 신앙이 성숙하게 했을 때 더 큰상을 주십니다.
3.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다는 의미를 알아합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로 하여금 여자가 없는 외로움과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후에 가장 아플 때에 그를 수술하셔서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을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뼈 하나를 꺼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수술하신 것입니다. 수술할 때는 꼭 깊이 잠들게 하고 어디 하나를 잘라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여자를 만들려면 남자는 것의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자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 수술을 하셨습니까 앞으로 올 세대의 모든 남자들에게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자를 제대로 만들려면 네가 한 번 크게 죽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수술하셔서 가장 아픈 뼈를 빼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가 아무 희생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당신은 왜 훌륭한 아내가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중요한 부분에 칼을 대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야망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취미를 포기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바꾸고 인생관을 뜯어고쳐야 아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빗대가 어떤 뼈인가 생각해보십시오 갈빗대는 속에 있는 중요한 기관을 다 싸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심장도 있고 허파도 있고 콩팥도 있고 다 있습니다. 갈빗대가 부러져 버리면 안에 있는 것이 다 터집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아내는 남자의 심장과 같고 간과 같고 콩팥과 같고 그 모든 내장과 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상처를 입으면 안돼요 자랄 때에는 상처 입지 않도록 돌보아주는 것이 아버지가 해야할 일입니다. 자라서 가정을 이루면 남편이 상처입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여자가 상처를 받으면 남자의 내장이 썩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에서 남자에게 우선권을 주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자가 자기 발로 “내 짝이 어디 있느뇨”하면서 남자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자기 발로 못 찾아갑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격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에서 남자가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여자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여자는 없습니다. 성낼 때말고는 다 아름다워요 그리고 여자는 감정이 풍부합니다. 행복은 감정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행복을 체험합니다. 여자가 행복해 하는데 남자가 행복해 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는 힘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여자에게는 아름다움과 풍부한 감정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따뜻합니다. 차가운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원래 따뜻합니다. 또한 여자는 섬세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오래 참습니다. 여자만큼 오래 참는 남자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여자가 간호사를 하는 것이 참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한테 간호사를 시키면 주사도 아무데나 놓고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지르면 발로 차면서 “좀 참아라 이놈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얼마나 오래 참는지 몰라요 섬세해요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감정이 풍부합니다.
이렇게 여자는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남자를 머리로 삼아서 눌러놓지 않으면 잘못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엉뚱한데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를 머리로 눌러서 여자가 감정과 따뜻함과 상상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았을 때 이 여자가 자기의 짝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하니라(2:23)
이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바치는 인류 최초의 사랑고백입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보면 심장에서 나온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나의 가장 소중한 당신’이란 뜻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혼의 대원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중요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감정의 문제나 애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입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으로서 인위적으로 나누지 못합니다.
사람의 성관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한번 성으로 결합하면 인격적으로 결합한 것이며 뗄 수 없는 책임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은 간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이혼이 많이 생기는 것은 결혼 자체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탓입니다. 남녀가 결합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한번 결혼한 것은 성격적인 이유이든 다른 이유이든 뗄 수가 없습니다. 떼면 안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부모를 떠나기 전까지 남녀는 엄격한 부모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성 개방이라고 해서 개방해주면 안됩니다. 절대로 개방해 주면 안됩니다. 물론 본인들은 싫지요 좀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고 좀더 늦게 들어오고 싶지요 그러나 성은 폭탄과 같습니다. 이것이 한번 터지면 가정이 다 날아가 버려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눈물이 맺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나이가 되어서 떠나기까지 부모는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다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라고 해서 풀어주면 안돼요. 남자라고 풀어주면 남의 딸에게 그런 아픔을 줍니다. 부모는 아들이 남에게 절대로 그런 아픔을 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그때부터는 간섭하지 말고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남자가 정신적으로 부모를 떠나야 결혼이 성립됩니다. 어떤 남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모든 것을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서른이 되었든 마흔이 되었든 그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청소년 때부터 “네가 알아서 해라”하면서 분리시키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라고 매일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 재고 감곧해 버릇하면 한평생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얼마나 큰 고통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식의 아내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이 되면 “중요한 문제는 네가 결정해라 공부도 네가 알아서 해 대학 떨어지면 재수를 하든지 삼수를 하든지 네가 알아서 해 성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 네가 결정해라” 하면서 자꾸자꾸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3시간 30분을 한다면 그것은 신랑신부를 고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나 물었더니 가정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서랍니다. 이 양반 눈치는 없어도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리기 위한 그 마음은 이해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가정에서의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행복이란 질서위에서 이루어 집니다. 질서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고 그 위치에서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알파벳이나 한글 쓰는 법 같은 것은 누구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니면 가르쳐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선악의 기준입니다. “이건 나쁜 짓이야 이것은 하면 안 돼 이것은 해” 이 기준을 부모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관계라고 하는 것은 나는 말씀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말씀만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습니까 책임지지 않으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어기신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기초단위인 부부관계에 있어서 위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18절에 보시면 남자와 여자의 위치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고 계십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 남자만 먼저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만드실 때 다 쌍쌍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남자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를 혼자 있게 하셨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고 남자만 덜렁 만드셨을까요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너무나도 급했기 때문에 일단 하나라도 만들고 보자 하고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가 독처하게 하심으로써 여자가 얼마나 필요하며 여자가 없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전한지 철저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여자 없이 남자만 만드신 것입니다. 가끔 부인들이 속상하면 이런 불평을 합니다. “내가 없어져 봐야 이 식구들이 내 소중함을 알아” 이것은 상당히 성경적인 불평입니다. 그런데 없어지려고 해도 갈데 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계속 집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없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늦게 등장시키셨습니다.
남자는 여자 없이 동산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물론 불편한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요 그러나 동물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남자는 심각한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까 전부 둘씩입니다. 하나를 불렀는데 둘이 오고 하나를 돌려보냈는데 둘이 갑니다. “왜 너희 둘은 같이 가냐” “우리는 한쌍이거든요”그렇게 다 둘씩인데 아담만 혼자였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동물들을 보니다른 짐승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아주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만 혼자였어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빈틈이 있겠습니까마는 무언가 허전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뵈어도 좀 이상합니다. ‘남자가 저렇게 혼자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말씀을 자꾸 하십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도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자는 좀 혼자 있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노총각으로 있다가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를 못 구해서 애쓰다가 드디어 결혼한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너무 아내를 사랑해서 하루에 열 번씩 전화합니다. 노총각으로 지내면서 여자의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키가 크네 적네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까 요리 솜씨 운운하는 이야기가 어디서 나와요 너무 일찍 결혼하면 부인이 소중한 줄 모릅니다. 아담이 혼자 있을 때 어느 정도로 외로웠느냐 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였습니다. 그 사무친 뼈로 여자를 만든 것입니다.
2.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돕는 배필’은 약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협력자란 뜻입니다. 아마 여자 분들은 이 부분에서 불만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결국 남성위주구나 왜 여자를 겨우 돕는 배필이라 하시지”
여기서 ‘돕는 배필’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배필이란 뜻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돕고 여자가 남자를 도와서 서로가 완성된 인격체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돕는 배필’이지 여자만 헌신적으로 빨래하고 다리미질하고 밥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한테 “왜 결혼하려고 합니까” 물으면 “빨래하기 싫어서”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세탁기와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런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는 불행합니다.
엡5:28-29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남자의 가장 큰 사명은 사업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서 참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사람에게는 회장, 사장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남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 모자라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돕고 보완함으로써 완전한 인격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남자나 “여호와 하나님이 왜 남자를 만드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여자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여기 ‘보완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보완합니까
첫째로 성격적 보완입니다. 완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성격적으로 조금씩 부족합니다. 한쪽이 발달한 사람은 다른 쪽이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꼼꼼한 사람은 대인관계가 부족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을 대충대충 합니다. 이렇게 부부는 서로 성격적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찾을 때 보면 자신과 성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꼼꼼한 사람은 덜렁덜렁한 사람을 원하고 덜렁덜렁한 사람은 꼼꼼한 사람을 원합니다. 물론 같은 성격끼리 만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성격일 때는 사실 자신들의 문제를 잘 모릅니다. 똑같으니까요 그리고 서로 싸우다가 지칩니다. 좋을 때는 굉장히 좋아서 다른 집보다 몇 배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안 좋을 때는 훨씬 못합니다.
남편의 훈련은 아내가 시킵니다. 어머니가 못 바꾼 것을 아내는 매일 잔소리를 해서 바꿉니다. 또 아내의 훈련은 남편이 시킵니다. 그래서 부부는 상대방의 충고를 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 나는 부족해, 반쪽이야 그러니까 한 10년은 잔소리를 듣자”하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둘째는 성적인 보완입니다. 양성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을 하나씩만 주셔서 서로가 결합해야 성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부가 성적으로 결합해야 자녀가 생기고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부부는 자기 몸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상대방의 것입니다.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이고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몸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성적으로 요구할 수 있고 실제로 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에게 이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매일 피곤하게 돌아오는 남편에게 “오늘은 좀 싱싱하게 돌아와 봐요”하는 것은 주님의 권위로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날은 무조건 싱싱하게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명령입니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마구 상하게 하면 결국 다른 한쪽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편이 병들면 누가 책임집니까 아내가 책임지고 다 감당해야 합니다. 아내가 병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병들면 안 되는 거예요 부부의 몸은 각각 자기 몸이 아닙니다. 한쪽 배우자가 죽었을 때 다른 한쪽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큰 충격입니다.
신입사원들은 자기 몸을 사장의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인의 말을 안 듣고 사장이 시키는 대로 좇아 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사장과 결혼시켜 버려야 합니다. 집에 못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칫솔 치약 다 싸들고 회사 가서 살라고 하세요 이 몸이 누구 몸인데 그렇게 합니까 정말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중에 부장이 되고 나서 건강을 다쳐보면 ‘아 내가 속았구나’하고 아내 말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아내는 악처여야 좋습니다. 악처가 되어야 남편의 건강과 도덕성이 보존됩니다. 그래서 남편들에게 이상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살롱의 성냥갑이 나왔다 하면 그냥 결단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오래 갑니다. 남편이 건강관리를 안 하면 사생결단을 내버려야 해요 그래야 백년해로하지요 오늘부터 악처가 되세요 늦게 들어오고 립스틱을 묻혀오고 밥도 안 먹고 밤샘하면서 돌아다닐 때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악처가 남편을 지킵니다. 어영부영하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커피나 마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면 안됩니다.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들도록 건강이나 도덕성에서 정말 성공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유명한 악처 사모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악처가 먼저 죽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또 건강으로 구십이 넘도록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내 덕이었다”
셋째로, 사회적으로 서로를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완한다는 것은 부부가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과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특이 어른들의 조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부부가 내려야 하고 특히 남자가 내려야 합니다. 거기에 시부모의 의견이 개입되거나 친정의 의견이 개입되면 이미 그 가정은 사회적인 단위로서 역할을 잃은 것입니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은 자기와 아내가 의사결정을 할 때 자신의 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박고 가정의 의사결정을 자신의 아버지나 장인이 내릴 때 그 남자는 ‘병신’소리를 듣습니다. 이 가운데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시면 “이제부터는 자녀들에게 문제를 맡기십시오” 자녀들이 좀 굶고 헤매더라도 내버려두세요 끼여들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내와 남편 사이에 끼여들면 안됩니다. 결정은 부부가 내리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면 어떤 어려움도 이깁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고 남편이 아내를 책임지는 가정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이깁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뱀이 파고들면서 가정이 엉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질서를 깨뜨리면 안됩니다.
넷째로, 부부는 영적으로 보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신앙이 다 좋으면 정말 좋지요 그러나 그런 가정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유아세례를 부모중 한 쪽이 세례를 받았으면 되지만 옛날에는 양쪽이 다 세례를 받아야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축복 중에서 축복이었습니다. 왜 양쪽 다 세례를 받은 가정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습니까 한쪽이 시험 들면 다른 쪽이 돕고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이 기도로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보완해서 사탄의 역사를 이기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의 지위나 재산은 놀이터에 있는 그네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타고 놀다가 때가 되면 가야 합니다. 직책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남의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기에 한번 앉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확실히 아내의 것이고 아내는 남편의 것입니다. 자식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크면 다 떠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만큼은 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확실하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남편한테는 ‘병신 같은 게... ’ 하면서 무시하고 자식한테는 먹을 것을 챙겨주고 과외 시키다가 나중에 자식이 떠나면 결국 그 병신하고 둘이 남는 거예요 너무 심한 말 같습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직책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면 이미 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기게 되어 있어요 어려움이 겹쳐올 때 아내가 말합니다. “난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남편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책임지겠소”그러면 이깁니다. 분명히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는 나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같이 서게 됩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 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업적을 남겼는가를 묻지 않으십니다. 남편에 묻기를 “너는 아내를 얼마만큼 채워주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아내에게는 “너는 남편을 얼마나 채워주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서로를 얼마나 완성시켜 주었느냐,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자란 이웃을 많이 채워주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큰상을 주십니다. 신앙이 좀 떨어지는 남편을 많이 보완해서 신앙이 성숙하게 했을 때 더 큰상을 주십니다.
3.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다는 의미를 알아합니다. (21-22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로 하여금 여자가 없는 외로움과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 후에 가장 아플 때에 그를 수술하셔서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을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뼈 하나를 꺼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수술하신 것입니다. 수술할 때는 꼭 깊이 잠들게 하고 어디 하나를 잘라내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여자를 만들려면 남자는 것의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자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 수술을 하셨습니까 앞으로 올 세대의 모든 남자들에게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자를 제대로 만들려면 네가 한 번 크게 죽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수술하셔서 가장 아픈 뼈를 빼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가 아무 희생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당신은 왜 훌륭한 아내가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중요한 부분에 칼을 대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야망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취미를 포기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바꾸고 인생관을 뜯어고쳐야 아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빗대가 어떤 뼈인가 생각해보십시오 갈빗대는 속에 있는 중요한 기관을 다 싸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심장도 있고 허파도 있고 콩팥도 있고 다 있습니다. 갈빗대가 부러져 버리면 안에 있는 것이 다 터집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아내는 남자의 심장과 같고 간과 같고 콩팥과 같고 그 모든 내장과 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상처를 입으면 안돼요 자랄 때에는 상처 입지 않도록 돌보아주는 것이 아버지가 해야할 일입니다. 자라서 가정을 이루면 남편이 상처입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여자가 상처를 받으면 남자의 내장이 썩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에서 남자에게 우선권을 주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여자가 자기 발로 “내 짝이 어디 있느뇨”하면서 남자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자기 발로 못 찾아갑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격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에서 남자가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여자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여자는 없습니다. 성낼 때말고는 다 아름다워요 그리고 여자는 감정이 풍부합니다. 행복은 감정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행복을 체험합니다. 여자가 행복해 하는데 남자가 행복해 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는 힘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여자에게는 아름다움과 풍부한 감정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따뜻합니다. 차가운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원래 따뜻합니다. 또한 여자는 섬세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오래 참습니다. 여자만큼 오래 참는 남자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여자가 간호사를 하는 것이 참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한테 간호사를 시키면 주사도 아무데나 놓고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지르면 발로 차면서 “좀 참아라 이놈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얼마나 오래 참는지 몰라요 섬세해요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감정이 풍부합니다.
이렇게 여자는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남자를 머리로 삼아서 눌러놓지 않으면 잘못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엉뚱한데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를 머리로 눌러서 여자가 감정과 따뜻함과 상상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았을 때 이 여자가 자기의 짝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하니라(2:23)
이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바치는 인류 최초의 사랑고백입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보면 심장에서 나온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나의 가장 소중한 당신’이란 뜻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혼의 대원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중요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은 감정의 문제나 애정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입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결혼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으로서 인위적으로 나누지 못합니다.
사람의 성관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한번 성으로 결합하면 인격적으로 결합한 것이며 뗄 수 없는 책임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은 간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이혼이 많이 생기는 것은 결혼 자체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탓입니다. 남녀가 결합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한번 결혼한 것은 성격적인 이유이든 다른 이유이든 뗄 수가 없습니다. 떼면 안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부모를 떠나기 전까지 남녀는 엄격한 부모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성 개방이라고 해서 개방해주면 안됩니다. 절대로 개방해 주면 안됩니다. 물론 본인들은 싫지요 좀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고 좀더 늦게 들어오고 싶지요 그러나 성은 폭탄과 같습니다. 이것이 한번 터지면 가정이 다 날아가 버려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눈물이 맺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나이가 되어서 떠나기까지 부모는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다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라고 해서 풀어주면 안돼요. 남자라고 풀어주면 남의 딸에게 그런 아픔을 줍니다. 부모는 아들이 남에게 절대로 그런 아픔을 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그때부터는 간섭하지 말고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남자가 정신적으로 부모를 떠나야 결혼이 성립됩니다. 어떤 남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모든 것을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서른이 되었든 마흔이 되었든 그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청소년 때부터 “네가 알아서 해라”하면서 분리시키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라고 매일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간 재고 감곧해 버릇하면 한평생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얼마나 큰 고통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식의 아내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이 되면 “중요한 문제는 네가 결정해라 공부도 네가 알아서 해 대학 떨어지면 재수를 하든지 삼수를 하든지 네가 알아서 해 성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 네가 결정해라” 하면서 자꾸자꾸 떠나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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