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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돕는 배필과 가정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동물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은 흙에서 왔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흙으로 지었지만, 그곳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흙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육적인 존재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지능이 발달해서 다른 동물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을 다스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즘 가정에 심방가 보면, 애완용 개를 많이 기르는 것을 봅니다. 개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사람 말을 다 알아듣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금방 알아봅니다. 주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지금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다 압니다. 그런데 아무리 똑똑하고 지능이 발달했다고 해도 아직 말하는 개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능이 발달한 개는 웬만한 유치원생 지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치원생은 말을 하는데, 그와 같은 지능을 가진 개는 말을 못합니다. 말을 하고 하지 못하는 것이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또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는 기도를 합니다. 한 번은 명절 때, 큰집에 갔는데, 저희 집 큰아이가 큰 집 오빠들하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도 부르고, 기도를 하며 노는 것입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개가 기도했다는 얘기는 한번도 못 들었습니다.
절대자를 찾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 만상 중에 인간만이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세상을 이끌고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가꾸고,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인간이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다고 말씀했습니다. 19절에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아담이 동참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5절)", "여호와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8절), "여호와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0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들어 놓고 끝낸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름을 붙여 부르심으로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짓지 않고 아담에게 지으라 하시고, 어떻게 짓나 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아담이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마지막 마침표를 인간이 찍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 창조성, 관찰력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름을 지을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① 똑같은 이름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호랑이하고 토끼하고 이름을 같게 지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큰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② 이름에는 그 존재의 특성을 잘 반영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빛을 낮이라 칭하셨지요. 만약 빛을 밤이라 칭하셨다면,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존재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서, 이름을 들을 때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일지 상상이 되어야 합니다.
③ 이름은 기억하기 좋아야 합니다. 만약 이름을 짓고 나서 잊어버렸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아담이 이름을 짓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지나갑니다. 한 두 종류가 아닙니다. 수십 가지, 수백 종류의 짐승들입니다. 하나 하나 이름을 짓는데, 모두 다르게 지어야 합니다. 이름 속에서 그 동물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인 지혜가 없으면, 그 이름을 다 다르게 지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찰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동물들의 특성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이렇게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창조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그 창조를 완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지혜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신 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원을 물으실 때,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제일 지혜 있는 왕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잠언에서 "모든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했습니다.
둘째, 이것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부여하신 이유는 것들을 다스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이 없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들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일입니다. 이름을 지어야 그 아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것을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셋째, 이름을 지을 때는 그 동물의 본질과 특성을 다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정체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서 다 압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의 정체를 왜곡합니다.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것이 있는 듯이 이야기를 꾸며냅니다. 그래서 그 동물의 정체를 흐리게 만듭니다.
여러분! 뭘 알아야 다스리지 않습니까 옛말에 알아야 면장 짓도 한다고 했습니다. 통치자는 다스리는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는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한다면 아마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감추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 하라고 명령하실 때,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겠습니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말해달라.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를 밝히라는 말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이 말이 히브리어로 "여호와", "야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는 나다"는 뜻입니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나는 나다"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름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이름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사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이 없을 것이다 는 생각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름도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이름에 구속될 분이 아닙니다. 어떤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그 이름 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시냐" 그렇게 물으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만물에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이름을 지어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이름이 있어야 관리할 수 있습니다. 정체를 분명히 알아야 관리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관리자가 되기를 원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배워야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자신이 다스려야 할 것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았을 까요 잘 알고 있기에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다스려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알아야 여러분의 다스림 속에 들어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족들의 상태, 바램, 성격, 특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바로 알아야 가족들을 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자를 창조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데,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자를 창조하시고, 혼자 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남자 혼자 사는 것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로워 보이는데도 여자를 즉시 만들지 않고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했습니다.
왜 여자를 나중에 만들었을까요
 첫째 이유는 남자를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동물들은 모두 암수 쌍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두 짝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혼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부족한 것이 없는데, 모두 완벽하게 창조되었는데, 어쩐지 자기만 허전합니다. 무엇인가 부족을 느낍니다.
만약 인간을 동물과 같이 남자 여자를 동시에 만들었다면, 부부관계가 동물적인 관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인간은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육체적인 필요가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와 만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켰습니다.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고 결혼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남자가 여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자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여자를 얼마나 비인격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자를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은 많은 아내를 두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자를 성적인 도구나 물건으로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대부분의 부부 문제는 여자를 소홀히 하는데서 발생합니다. 여자를 업신여깁니다. 무시합니다. 그런 사람은 혼자 살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여자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들고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 짝이 있는데, 자기만 혼자입니다. 그 동물들을 보면서, 너무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드시게 하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데리고 왔을 때, 아담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자기 갈비뼈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자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남성 여러분!
여자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귀한 존재입니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사람구실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자 없이 남자는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이 말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역시 남자 중심이야, 여자는 남자의 보조 품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편에 보면 여러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큼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자이시다 고 했습니다. 돕는 자가 보조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보조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존재는 더 능력이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 이라는 말을 언짢게 생각하는 여성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서로 서로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의지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의지하고, 그러면서 서로 도우며 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아내는 남편에게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돕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원수가 되고, 모두가 다 자신을 헐뜯고, 비방하고, 저주한다 할지라도 남편과 아내만은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의 원리입니다.
때로는 자식까지도 원수같이 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을 살려 준 사람은 사울의 딸 미갈 이었습니다. 물론 미갈은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딸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편을 도와준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는 자가 될 때, 행복해집니다. 성격적으로, 지식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제부터 서로 돕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잠재워 놓고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라고 했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남자가 죽어야 여자가 탄생합니다. 남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저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간혹 여자를 이기려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남자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밟고 올라서서는 승리감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느끼지 못합니다. 남자는 여자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행복하려면 여자를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에 파 묻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나깨나 사업 생각만 하느라고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일을 포기해야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꺾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성 여러분!
여러분을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입니까 취미생활입니까 친구들입니까 이것들로부터 여러분을 죽여야 합니다. 남자가 죽지 않고는 가정이 바로 서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이 중요합니까 일이 중요합니까 취미가 중요합니까 친구들이 중요합니까
가정이 제일입니다.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기관입니다. 남자를 죽여 만든 것이 여성이고, 가정입니다. 이 가정을 지키는 남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남자와는 만든 재질이 다릅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뼈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강도에 있어서나 재질에 있어서 여자를 만든 재질이 월등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피부도 곱고,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질이 좋으니 오래 살지요.
갈비뼈가 어떤 뼈입니까 갈비뼈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호하는 뼈입니다. 그 안에 심장이 있습니다. 허파도 있고, 콩팥, 간,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가 다 들어 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면 이런 장기들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갈비뼈를 잘 보호해야 합니다.
갈비뼈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비뼈는 옆구리에 있습니다. 남자의 옆구리에서 여자가 나왔습니다. 남자의 옆구리는 여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 가장 가까이 갈 때 행복해 합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항상 남자의 머리 위에서 남자를 지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다리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매일 남자에게 짓밟히며 살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옆구리에 있는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인격적으로 상호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자의 보호를 받으라고 팔 밑에 있는 뼈를 택했습니다. 사랑 받으며 살라고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뼈로 만들었습니다.
여자가 갈비뼈에서 나왔기에 남자는 여자가 없으며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있어야 합니다. 집에 들어갔는데도 아내가 없으면, 괜히 허전하고, 신경질이 나는 것이 남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후반부에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드디어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이고, 주례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신랑은 아담이고, 신부는 하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주례도 하시면서, 신부 아버지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매쟁이 역할도 했습니다. 이 최초의 결혼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역할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결혼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진행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담이 보더니 한눈에 반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말은 적어도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만큼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내 뼈요 내 살과 같이 소중한 존재가 아내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자는 본질적으로 자신과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내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자 당신은 또 다른 나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이것은 최초의 남자가 최초의 여자에게 하는 사랑 고백입니다. 최고로 멋진 고백입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확인하고 난 후에 결혼 주례사를 시작했습니다. 결혼은 이런 사랑 고백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이런 사랑고백이 있어야 진정한 가정입니다. 함께 자고, 먹으며 산다고 부부입니까 부부는 사랑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결혼할 때는 정말 아담 같은 고백이 있으니 결혼했지요. 그런데 살다보니 그런 감정은 식어지고, 또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치한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고백을 하기 싫더라고 하십시오. 미워도 사랑한다고 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스러워집니다. 매일 아내를 칭찬하고 격려하십시오.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주례자 여호와 하나님의 주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주례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의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독립의 원리입니다.
오늘날 가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양가의 부모들 때문입니다. 특히 시댁 식구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아들의 가정을 독립된 개체의 가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른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한 부분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합니다.
특히 시어머니들이 그럽니다. 새 며느리가 우리 아들에게 밥은 제대로 해 주는지, "얘 개는 꼭 된장국 끓여서 아침을 먹여야 한다. " 그렇게 주문합니다. 바쁘면 토스트 먹고 출근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생활방식에 맡겨야합니다. 그런데 시시콜콜 간섭하고 관여합니다. 이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가정을 망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례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만 부모를 떠나 시집가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물론 섭섭할 수 있지요.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그러나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것입니다.
 둘째, 가정의 원리는 연합입니다.
연합한다는 말은 아교로 두 물체를 붙인다는 뜻입니다. 아교로 붙여서 틈이 없습니다. 부부 사이는 조금의 틈도 없이 붙어야 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모도, 친구도 끼어 들 수 없습니다. 끼어 들게 해서도 안됩니다.
부부간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쪼르르 친정으로 달려가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생기는 문제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함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숨기고 친정부모나 시부모에게 의논하는 것은 그 부부가 진정으로 연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완전히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했습니다. 아교로 잘 붙어진 것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결코 뗄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한 몸이 된 것입니다. 몸을 쪼개면 죽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부의 관계입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서로 그렇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25절에 결혼 후 아담과 하와의 삶을 이렇게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부끄러움이 없는 사이, 죄가 없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거짓이 없습니다. 투명합니다. 깨끗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가정을 꾸미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서로 돕는 배필로서 아끼고 격려하고,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하는 그런 가정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정을 꿈꾸시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었습니다. 거기서 참 행복을 찾으라고, 거기서 천국을 맛보라고 우리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왜 싸우십니까
왜 이혼한다고 야단입니까
왜 가정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며, 왜 서로의 관심에 무관심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행복을 되찾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에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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