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
본문
아담과 하와의 배에는 배꼽이 있었을까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며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배꼽이란 뱃속의 아기가 엄마랑 연결되어 있는 탯줄을 자른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꼽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는 말이며 동시에 나를 낳아 주신 육신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첫 사람이며 성경 그대로 받으면 배꼽이 없어야 되겠고 그렇다고 인간의 배에 배꼽이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전하고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이 뭐냐하면 배꼽을 가리자 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그림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하나같이 배꼽이 슬쩍 가려져 있습니다. 팔로 가렸던, 꽃으로 가렸던, 나무로 가렸던 아무튼 배꼽을 가린 모습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배꼽은 인간 창조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문제로 크게 고민을 했음을 많은 문서 속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철학이 발달했던 헬라의 신화에 의하면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하나된 이 육체가 너무도 완전해서 신은 그것에 질투를 느겼고 그래서 그들을 서로 떼어놓게 됐는데 그들이 떨어진 자리가 바로 배꼽이요, 그 후로부터 서로는 잃어 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갈망으로 가득찼다. 이것이 신화의 내용입니다. 이 신화를 통하여 보여 주려고 하는 내용이 무엇인고하니 남자와 여자의 기원은 무엇이며, 사랑의 원인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여러분 이 신화를 통해서 왜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져 있고 왜 그들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지에 대한 답변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이 진정한 궁금함에 대한 답변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하게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뭐를 주셨다고 했나요 "선악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내 위에는 나에게 명령하는 창조주가 계시고 나는 그 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그 범위 내에서 나는 자유롭고 나는 풍성하며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어 질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은 두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부어 넣으시니 그들이 생령이 된지라 그랬어요. 그러니깐 인간은 흙의 부분 육체의 부분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인 부분이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부분 즉,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부분은 선악과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여기서 근본적인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흙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또 다른 환경이 필요하다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부부사이가 무척이나 좋으셨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 속에서 한 이삼년 굉장히 방황하던 부인께서 중대한 결심을 하기 전에 저한테 찾아 왔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내게 위로를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도 목사님 내 남편은 옆에 없어요. 그래서 너무도 외롭습니다. 그래요. 그 말을 듣고 너무도 마음이 아팠던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 이 속에서 인간은 영혼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므로 그래도 외롭고 고독함이 남아 있는 것이올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는가 하면은 동료 인간들과 서로 사귀며 어울려 살도록 환경을 허락해 주십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행복과 기쁨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관계의 기초가 뭐냐하면 남자와 여자지요. 그래서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이 가정을 통하여 부부가 생겨나고 부모 생겨나고 자식이 생겨나고 형제가 생겨나면서 그리고 친척이 파생되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가 가정이요 그 핵심은 바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지는 부부라는 것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들이 서로 사귀며 사랑하게 하고 그리고 서로의 성숙을 향하여 나가게 하고 그 결과로써 파생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육체된 인간의 행복을 완성시켜 주셨다. 그것이 바로 가정의 목적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이올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결혼하는 목적이 뭐냐 최근에 내린 결론에 의하면 세가집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둘째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셋째는 방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결혼을 한다. 그랬습니다. 가정이 없는 홀로 사는 고독에서부터 벗어나서 또한 내 뒤를 이을 자가 없는 그러한 허무 속에서 해방되고 불건전한 애정의 유혹으로부터 그 방종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하는 것 이것이 결혼의 목적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답변일 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결혼이란 가장 깊은 사귐을 통하여 행복을 만족케하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 선물입니다. 이걸 철학용어로 바꿔볼까요. 결혼을 통하여 인간은 그의 사회성이 근원적으로 만족되는 것이올시다. 진정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만족이 어디에 있느냐 결혼 속에서 그리고 결혼을 통해 파생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이올시다. 흔히 결혼하면 성적인 요소를 생각하는데 사실 성적인 요소란 하나됨을 돕는 도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분명하게 설정해야겠습니다. 결혼이란 기쁜것이요, 감사한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피크요, 축복의 도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말자. 그러한 독신주의 혹은 혼인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관점들 혹은 결혼을 인간의 굴레라고 받아들이고 속박으로 여기는 생각들 혹은 금욕적인 삶이 훨씬 더 거룩하고 고상하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철저한 거짓말이며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디모데전서 4장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관계 속에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모습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깨끗하게 버려야할 것이올시다. 흔히 부모들의 실수 중에 하나는 무엇인고하니 자기 결혼에 대한 불평을 자식에게 쏟아 놓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주입시키는 것이 큰 실수 중에 하납니다. 얘야, 너희 아버지는 아이구… 말도 말아 내가 겪은 것을 책으로 쓰면 열권도 넘을거다. 남자들이 하긴 다 그렇지 뭐... 자 이렇게 얘기해 놓고 딸보고 너 빨리 시집가라 그럼 뭐라고 하겠어요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난 안가 미쳤어요. 엄마같이 살기 싫어 그럴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집안에 노총각 노처녀 있는 경우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랍니다. 나도 모르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아이들의 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논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고 반성할 필요는 있는 것이어요. 내가 결혼 안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결혼 안하는게 옳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런 얘깁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빚진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쩌다 불행할 수는 있는 거여요.
그러나 결혼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할 내용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요 이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과정을 이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올시다. 그 방법은 뭔가 가정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 속에 가정을 통한 행복의 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비결을 찾아내야 할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정속에서 부부의 위치는 뭐냐 18절입니다. 함께 봉독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다. 너희 두 사람의 관계는 돕는 배필이야, 그런 얘기죠. 서로 돕고 보안해 주는 존재란 말입니다. 여기에 반대 개념은 두가집니다. 종속관계나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는 거에요. 결혼 전문가들에 의하면 결혼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 돕는 배필에 대한 개념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오해했냐 서로에게 유익한 돕는 존재가 아닌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소유물로 생각하고 동등하게 대접을 안해줬습니다. 심지어는 옛날 사람은 밥도 같이 안 먹었잖아요. 무시해 가지고... 자 그러다 보니 피해를 누가 봤는가하면 둘이다 본 거지요. 둘이다 봤어요. 일치와 화합과 하나됨의 기쁨을 모르고 살아 왔어요. 하나는 억눌려 살아 왔고 하나는 찍어 누르면서 그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행복을 알지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종속관계라고 하는 사고방식 속에 붙들린 사람은 손해보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이제 정반대가 되가지고 이제는 라이벌 의식으로 바뀌는게 문젭니다. 여자라고 못할게 뭐가 있어 그렇게 하고 다 도전하잖아요. 이것도 문제지요.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른 방향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남자가 하는 일을 모두가 하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올시다. 해서 사람은 돕는 배필, 즉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 자기는 손도 하나 까닥 안하고 나를 시중들게 함으로써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더란 말이죠. 그러므로 이 돕는 배필, 나도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주고 받는 이 사랑 속에 진정한 일치와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흔히 이 돕는 배필 속에서 나오는 두가지 소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데렐라 콤플렉스(Complex)를 버려라 그런 얘깁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며 돕는 것이지 결혼을 통하여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오직 결혼을 통하여 뭔가를 왕창 얻으려고 하는 신데렐라가 되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버리란 말이죠. 나는 희생하지 않고 돕지 않고 다 된 밥 다 된 열매만 똑 따먹는 그러한 결혼은 없는 것이에요. 둘이 함께 도와서 고생하면서 이루어 가는 것이 진정한 가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버릴 것이며 또 하나는 정 반대로 어려운 사람을 동정해서 내가 저 사람 도와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해서 동정 결혼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니에요. 왜 서로 돕고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 좋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건전한 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장점으로 저분은 저분의 장점으로 서로를 도와서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원리다. 이 원리만 바로 알고 있으면 말입니다. 사실은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지를 못하거든요. 돕는 배필이다.
두 번째 그럼 너와 나의 만남은 어떻게 된거냐 말이죠. 21절에 설명을 해주십니다. 함께 봉독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로 여인을 만드셨다. 깊이 잠들게 하시고 이건 말 그대로 깊이 잠 재운 거지요. 깊은 수술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만남의 신비라는 말이 이 잠이라는 말로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어요. 아, 내가 이 사람 만날 줄 알았겠어요. 그 사람이 알았겠어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고 많은 장소에서 어떻게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고 사랑하게 됐는가는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할 길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점지(點指)해 줬다 그러잖아요. 그것이 뭐냐 잠으로 표현되는 거에요. 알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속에 너와 나는 만난 것이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담에게로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손잡고 이끌어 오셔서 만나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우연이 만난게 아니라는 거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데리고 오셨단 말입니다. 이 만남의 과정에 대한 고백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쩌다 우리가 오다 가다 눈이 마주쳐가지고 좋아하게 됐다. 아니지요. 그렇게 생각해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잘못 골랐구만 이거, 바꿔야지 그게 문제 아닙니까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데려오신 바 유일한 사람이다. 이걸 고백할 때에 가정은 견고해 지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이 장면, 오늘 본문의 결혼장면이 나의 결혼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혼의 모델이란 왕자와 공주가 만나서 큰 성당에서 전세계 텔레비젼 중개를 받으면서 하는 것이 결혼의 모델이 아닙니다. 결혼의 모델은 오늘 본문 속에 조용한 가운데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겁니다. 너와 내가 있고 너와 나는 오다 가다 눈이 맞은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중에 만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와서 내게 위탁하셨다는 이 고백 말입니다. 내 아내는 누구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데려와 주신 바 그리고 나에게 위탁하신 바 소중한 생명 그게 아내의 정의입니다. 여러분 남편이란 누구냐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 손을 붙드시고 그 사람 앞에 세워 놓아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한 사람, 그게 남편이요. 이 고백이 바르게 될 때에 가정은 견고해 지는 것이올시다. 이 고백이 견고하다면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결론이 무어냐 하면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어요. 왜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내 앞에 잘 갖다 줬을까 그거요. 그러므로 이제 다른 남편과 내 남편을 다른 아내와 내 아내를 결단코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가 망조거든요. 이게... 내게 가장 좋은 사람 여호와 하나님이 데려 오셔서 나로 만나게 하셨다는 고백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주례한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관계를 주례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게 뭐냐, 목사님 앞에서 주례 받는거요. 이게, 주례를 누구한테 받아야 할 지 잘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아니라도 좋으니 목사님한테 받으세요. 우리는 때로 생각합니다. 믿음의 자매 믿음의 형제가 꼭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의 문맥을 잘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려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속에 만드시고 또한 여기에 더하여 인간과의 교제의 기쁨을 주시려고 남자와 여자를 주시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줄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러므로 서둘지 말 것입니다. 만약에 그럼 안 믿는 사람이 서로 좋아졌으면 어떻하냐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믿게 하세요. 믿게... 나중에 내가 결혼하면 믿게 하지요. 천만에 오해 하는거지, 지금 간이라도 빼줄 만큼 서로 사랑하는데 요때 못 만들면 나중에는 희망이 보장 할 수 없어요. 최소한 어디까지 가야하는고 하니 세례 받게 하는데 까지는 가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결혼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결혼하고 잘 믿어 주는 분도 계세요. 그런 경우는 참 복된 것이지만 내 경우에 그런 일이 있다고 장담 할 수가 있나 한사람 믿게 하려고 이삼십년 허비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지 말고 기간을 단축시키세요. 결혼전에 어느 선까지는 끌고 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빠진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됐습니다. 이제, 그럼 두 사람은 살면서 어떤 고백을 해야 되느냐 23절입니다. 함께 봉독 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시가 뭐냐 사랑의 시입니다. 이거,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가 성경 속에 나오는 시의
첫번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는 비결을 이렇게 잘 가르쳐 주셨어요. 이 고백이 많은 가정은 참 행복할 것이라는거요.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바로 나올시다. 당신과 나는 한 몸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존재의 가치를 모를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이 얘기에요. 오 솔레미오지. 허허허... 이 얘기요. 이 고백이 살아 있는 부부가 행복한 가정의 주인공이 되는거요. 신앙 고백이 있어야 성도이고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부부입니다. 이거 없는 부부는 힘을 잃은 부부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고백은 멋적다 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르쳐 준 거니깐 열심히 하시면 기적이 일어 날거에요. 반찬도 바뀔지 몰라요. 열심히 열심히 이 사랑을 노래하세요. 사랑을 노래 하시라구요. 그래야 내가 행복해 지고 그가 행복해 지는 것이올시다. 그럼 두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뭐냐 24절에 설명하지요. 함께 봉독합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떠나라 그랬어요. 누가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 그랬어요. 따로 살란 말이라고 하겠나 뭐, 그보다는 정신적 독립을 의미하는 말이겠지요. 사실은 따로 사는게 정상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여자만 떨어져 나가는게 아니라 남자도 부모로부터 떠나서 자기들만의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독립적 인격이 되라는 것인데 그렇게 못되는 경우가 너무 많고 특별히 부모들이 빨리 결혼을 시키려고 합니다만은 결혼의 원리를 스스로 어기려고 합니다. 빨리 결혼시켜서 재미 볼려고 하지요. 독립시켜서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보다는 말이죠. 이것이 하나의 큰 문제가 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둘 만의 관계속에 집중하라 그 상징적인 표가 뭐냐하면 신혼여행입니다. 뭐 갈 데가 없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오라는 데가 없어서 가는게 아니어요.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서 가장 소중한 두사람과의 관계속으로 몰입하는 것이 바로 신혼여행입니다. 저는 결혼식을 주례하고 또 이런 것을 보면서 용어가 매우 잘못됐다고 판단합니다. 시집간다는 말,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성경적으로... 틀린 말이에요. 이건 부권(夫權)사회(社會)속에서 나온 말이어요. 장가간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틀린 말이에요. 이건 모권(母權)사회(社會)속에서 나온거에요. 그럼 정확한 말은 뭐냐 결혼한다 입니다. 결혼한다는 말이 정확한 말이요. 또 하나 청첩장을 보면 말이죠 요번에 우리 자식들이 결혼하게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혼주 아무게... 이렇게 해서 나와요. 다시 말하면 부모가 이 아이들을 결혼시킨다는 거요. 주체가 누구냐 부모요. 잘못 된거요. 이거는, 그럼 가장 정확한 초정장은 뭐냐 이번에 저희들이 여호와 하나님 은혜 중에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게 자식, 누구하면 끝나는거요. 전부 다 틀렸어요. 전부 다. 이런 생각과 용어를 바꾸지 않는 한 참 어려울 거에요. 그러므로 결혼의 주체는 누구다. 신랑과 신부지 양가의 부모가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부모님들 잘 알아두세요. 두 아이가 만나서 결단하는 거에요. 그리고 시집가는 것도 아니오. 장가가는 것도 아니오. 결혼 할 뿐이요. 명문가의 며느리들이 행복할 것 같지요. 천만에 말씀이요. 시집의 가풍과 관계에 묶여서 얼굴을 보세요. 그늘이 팍 있지, 죽이는 겁니다. 이거, 돈 좀 도와 준다고 해서 꽁꽁 관계를 묶어놓고 숨도 못 쉬게 해요. 이런거 많이 잘못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두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하고 효도도 둘이 합의하에 하셔야 하는 겁니다. 결혼하고 집을 잊지 못해서 연연하고 남편을 속이고 아내를 속이는 것은 이건 효도가 아니에요. 이건 마마보이에요. 마마보이...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고하니 많은 가정중에 오해가 뭐냐하면 제가 많이 경험해요. 예를 들면 문제가 생기면 아내하고 관계 속에서 얘기가 잘 안 통하면 옛날 자기 집에다 전화해서 엄마, 어떻데, 어떻데하고 남자가 일러요. 저사람을 믿고 내가 일생을... 그러면서 이게 뭐냐면 우애라고 생각을 해요. 가족간의 우애라고 생각해요. 아닌거에요. 독립하지 못한 거에요. 그러므로 두사람 속에서 문제를 끝내야 해요. 도무지 불가능할 때가 있겠습니다만은 작은 일 가지고 쭈루룩 가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떠나야 한다는 것, 얼마전에 제가 텔레비젼을 봤는데 동물의 왕국인가 그런게 있던데 치이타가 어미 치이타가 두 마리 새끼를 길렀는데 이 새끼들이 사냥을 완벽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어미 치이타가 떠납니다. 조용히... 독립해서 잘 살라고, 아, 치이타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요. 허허허...
여러분 삶 속에는 여러 관계가 있답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른 관계가 나오잖아요. 동물과의 관계가 나와요. 요즘은 이걸 가지고 논문 써도 될 꺼에요. 애완동물과 인간관계와의 관계는... 허허허 강아지끼고서 뭐 친구라고 그러는데 말도 안되는 얘기에요. 성경에 말씀합니다. 짐승은 심심풀이는 되도 인간하고 친구아니다. 고독을 풀어줄 존재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씀을 합니다. 저 그런 가정도 봤어요. 연로하신 부모님이 외로워서 결혼하고 싶어하니까 자식들이 말이죠, 막 들고 일어납디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에는 세종류가 있어요.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있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면 동반자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자식이 열명되고 손주가 백명되도 짝 없는 노인네는 외로운 것이에요. 나 외롭다고 그러면 "엄마가 왜 외로워 우리가 있는데. " 그런 말은 말 같지 않은 소리요, 자기 생각이요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원리는 짝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있는거요. 노인네가 주책이네,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결혼하고 안 하고는 노인네가 결정할 일이고 자식들은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망령된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파트너쉽(Partnership)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중요성 성경에 나오고 있어요. 이 결혼을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절이 필요합니다. 25절 함께 봉독 합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서로에게는 부끄러운 점이 있어요. 덮어줘야 할 부분이 있다고요. 용서해야만 이 관계는 이루어지는 거에요. 왜, 흠 없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만 하나가 될 것이에요. 용서해 주고, 받아 주고, 이해해 주고, 기다려 주고, 도와 주며 살아 가는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 인간의 행복은 극대화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하는 겁니다. 여기 본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하신 가정과 그 목적이 나와 있어요. 이건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아무리 바꿔도 변하지 않는 원리요, 질서입니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들의 미숙함과 이기심 때문에 불행이 오는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가 절대로 잘못된 것은 아니올시다. 그러므로 불행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하고 그리고 항상 생각할 것은 원래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했던 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고 계획하셨던 그 관계 속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할 때에 가정은 가장 행복한 인간의 보금자리로 굳게 서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의 가정들이 이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철학이 발달했던 헬라의 신화에 의하면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하나된 이 육체가 너무도 완전해서 신은 그것에 질투를 느겼고 그래서 그들을 서로 떼어놓게 됐는데 그들이 떨어진 자리가 바로 배꼽이요, 그 후로부터 서로는 잃어 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갈망으로 가득찼다. 이것이 신화의 내용입니다. 이 신화를 통하여 보여 주려고 하는 내용이 무엇인고하니 남자와 여자의 기원은 무엇이며, 사랑의 원인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여러분 이 신화를 통해서 왜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져 있고 왜 그들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지에 대한 답변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이 진정한 궁금함에 대한 답변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하게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뭐를 주셨다고 했나요 "선악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내 위에는 나에게 명령하는 창조주가 계시고 나는 그 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그 범위 내에서 나는 자유롭고 나는 풍성하며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어 질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인간은 두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부어 넣으시니 그들이 생령이 된지라 그랬어요. 그러니깐 인간은 흙의 부분 육체의 부분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인 부분이 결합된 존재라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부분 즉,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부분은 선악과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여기서 근본적인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흙으로 이루어진 육체를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또 다른 환경이 필요하다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부부사이가 무척이나 좋으셨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 속에서 한 이삼년 굉장히 방황하던 부인께서 중대한 결심을 하기 전에 저한테 찾아 왔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내게 위로를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도 목사님 내 남편은 옆에 없어요. 그래서 너무도 외롭습니다. 그래요. 그 말을 듣고 너무도 마음이 아팠던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 이 속에서 인간은 영혼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므로 그래도 외롭고 고독함이 남아 있는 것이올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는가 하면은 동료 인간들과 서로 사귀며 어울려 살도록 환경을 허락해 주십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행복과 기쁨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관계의 기초가 뭐냐하면 남자와 여자지요. 그래서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이 가정을 통하여 부부가 생겨나고 부모 생겨나고 자식이 생겨나고 형제가 생겨나면서 그리고 친척이 파생되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가 가정이요 그 핵심은 바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지는 부부라는 것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들이 서로 사귀며 사랑하게 하고 그리고 서로의 성숙을 향하여 나가게 하고 그 결과로써 파생되는 인간관계 속에서 육체된 인간의 행복을 완성시켜 주셨다. 그것이 바로 가정의 목적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이올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결혼하는 목적이 뭐냐 최근에 내린 결론에 의하면 세가집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둘째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셋째는 방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결혼을 한다. 그랬습니다. 가정이 없는 홀로 사는 고독에서부터 벗어나서 또한 내 뒤를 이을 자가 없는 그러한 허무 속에서 해방되고 불건전한 애정의 유혹으로부터 그 방종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하는 것 이것이 결혼의 목적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답변일 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결혼이란 가장 깊은 사귐을 통하여 행복을 만족케하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 선물입니다. 이걸 철학용어로 바꿔볼까요. 결혼을 통하여 인간은 그의 사회성이 근원적으로 만족되는 것이올시다. 진정한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만족이 어디에 있느냐 결혼 속에서 그리고 결혼을 통해 파생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이올시다. 흔히 결혼하면 성적인 요소를 생각하는데 사실 성적인 요소란 하나됨을 돕는 도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분명하게 설정해야겠습니다. 결혼이란 기쁜것이요, 감사한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피크요, 축복의 도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말자. 그러한 독신주의 혹은 혼인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관점들 혹은 결혼을 인간의 굴레라고 받아들이고 속박으로 여기는 생각들 혹은 금욕적인 삶이 훨씬 더 거룩하고 고상하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철저한 거짓말이며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디모데전서 4장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관계 속에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모습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깨끗하게 버려야할 것이올시다. 흔히 부모들의 실수 중에 하나는 무엇인고하니 자기 결혼에 대한 불평을 자식에게 쏟아 놓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주입시키는 것이 큰 실수 중에 하납니다. 얘야, 너희 아버지는 아이구… 말도 말아 내가 겪은 것을 책으로 쓰면 열권도 넘을거다. 남자들이 하긴 다 그렇지 뭐... 자 이렇게 얘기해 놓고 딸보고 너 빨리 시집가라 그럼 뭐라고 하겠어요 여러분! 생각을 해 보세요. 난 안가 미쳤어요. 엄마같이 살기 싫어 그럴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집안에 노총각 노처녀 있는 경우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랍니다. 나도 모르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아이들의 결혼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논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고 반성할 필요는 있는 것이어요. 내가 결혼 안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결혼 안하는게 옳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런 얘깁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빚진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쩌다 불행할 수는 있는 거여요.
그러나 결혼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할 내용이올시다. 그러므로 결혼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이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요 이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과정을 이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올시다. 그 방법은 뭔가 가정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 속에 가정을 통한 행복의 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비결을 찾아내야 할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정속에서 부부의 위치는 뭐냐 18절입니다. 함께 봉독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다. 너희 두 사람의 관계는 돕는 배필이야, 그런 얘기죠. 서로 돕고 보안해 주는 존재란 말입니다. 여기에 반대 개념은 두가집니다. 종속관계나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는 거에요. 결혼 전문가들에 의하면 결혼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 돕는 배필에 대한 개념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오해했냐 서로에게 유익한 돕는 존재가 아닌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소유물로 생각하고 동등하게 대접을 안해줬습니다. 심지어는 옛날 사람은 밥도 같이 안 먹었잖아요. 무시해 가지고... 자 그러다 보니 피해를 누가 봤는가하면 둘이다 본 거지요. 둘이다 봤어요. 일치와 화합과 하나됨의 기쁨을 모르고 살아 왔어요. 하나는 억눌려 살아 왔고 하나는 찍어 누르면서 그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행복을 알지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종속관계라고 하는 사고방식 속에 붙들린 사람은 손해보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이제 정반대가 되가지고 이제는 라이벌 의식으로 바뀌는게 문젭니다. 여자라고 못할게 뭐가 있어 그렇게 하고 다 도전하잖아요. 이것도 문제지요.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른 방향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남자가 하는 일을 모두가 하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올시다. 해서 사람은 돕는 배필, 즉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 자기는 손도 하나 까닥 안하고 나를 시중들게 함으로써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더란 말이죠. 그러므로 이 돕는 배필, 나도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주고 받는 이 사랑 속에 진정한 일치와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흔히 이 돕는 배필 속에서 나오는 두가지 소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데렐라 콤플렉스(Complex)를 버려라 그런 얘깁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며 돕는 것이지 결혼을 통하여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오직 결혼을 통하여 뭔가를 왕창 얻으려고 하는 신데렐라가 되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버리란 말이죠. 나는 희생하지 않고 돕지 않고 다 된 밥 다 된 열매만 똑 따먹는 그러한 결혼은 없는 것이에요. 둘이 함께 도와서 고생하면서 이루어 가는 것이 진정한 가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버릴 것이며 또 하나는 정 반대로 어려운 사람을 동정해서 내가 저 사람 도와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해서 동정 결혼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니에요. 왜 서로 돕고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 좋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건전한 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장점으로 저분은 저분의 장점으로 서로를 도와서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원리다. 이 원리만 바로 알고 있으면 말입니다. 사실은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지를 못하거든요. 돕는 배필이다.
두 번째 그럼 너와 나의 만남은 어떻게 된거냐 말이죠. 21절에 설명을 해주십니다. 함께 봉독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로 여인을 만드셨다. 깊이 잠들게 하시고 이건 말 그대로 깊이 잠 재운 거지요. 깊은 수술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만남의 신비라는 말이 이 잠이라는 말로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어요. 아, 내가 이 사람 만날 줄 알았겠어요. 그 사람이 알았겠어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고 많은 장소에서 어떻게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고 사랑하게 됐는가는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할 길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점지(點指)해 줬다 그러잖아요. 그것이 뭐냐 잠으로 표현되는 거에요. 알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속에 너와 나는 만난 것이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담에게로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손잡고 이끌어 오셔서 만나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우연이 만난게 아니라는 거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데리고 오셨단 말입니다. 이 만남의 과정에 대한 고백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쩌다 우리가 오다 가다 눈이 마주쳐가지고 좋아하게 됐다. 아니지요. 그렇게 생각해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잘못 골랐구만 이거, 바꿔야지 그게 문제 아닙니까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데려오신 바 유일한 사람이다. 이걸 고백할 때에 가정은 견고해 지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이 장면, 오늘 본문의 결혼장면이 나의 결혼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혼의 모델이란 왕자와 공주가 만나서 큰 성당에서 전세계 텔레비젼 중개를 받으면서 하는 것이 결혼의 모델이 아닙니다. 결혼의 모델은 오늘 본문 속에 조용한 가운데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겁니다. 너와 내가 있고 너와 나는 오다 가다 눈이 맞은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중에 만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와서 내게 위탁하셨다는 이 고백 말입니다. 내 아내는 누구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데려와 주신 바 그리고 나에게 위탁하신 바 소중한 생명 그게 아내의 정의입니다. 여러분 남편이란 누구냐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 손을 붙드시고 그 사람 앞에 세워 놓아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한 사람, 그게 남편이요. 이 고백이 바르게 될 때에 가정은 견고해 지는 것이올시다. 이 고백이 견고하다면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결론이 무어냐 하면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어요. 왜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내 앞에 잘 갖다 줬을까 그거요. 그러므로 이제 다른 남편과 내 남편을 다른 아내와 내 아내를 결단코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가 망조거든요. 이게... 내게 가장 좋은 사람 여호와 하나님이 데려 오셔서 나로 만나게 하셨다는 고백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주례한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관계를 주례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게 뭐냐, 목사님 앞에서 주례 받는거요. 이게, 주례를 누구한테 받아야 할 지 잘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아니라도 좋으니 목사님한테 받으세요. 우리는 때로 생각합니다. 믿음의 자매 믿음의 형제가 꼭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의 문맥을 잘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려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속에 만드시고 또한 여기에 더하여 인간과의 교제의 기쁨을 주시려고 남자와 여자를 주시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줄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러므로 서둘지 말 것입니다. 만약에 그럼 안 믿는 사람이 서로 좋아졌으면 어떻하냐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믿게 하세요. 믿게... 나중에 내가 결혼하면 믿게 하지요. 천만에 오해 하는거지, 지금 간이라도 빼줄 만큼 서로 사랑하는데 요때 못 만들면 나중에는 희망이 보장 할 수 없어요. 최소한 어디까지 가야하는고 하니 세례 받게 하는데 까지는 가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결혼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결혼하고 잘 믿어 주는 분도 계세요. 그런 경우는 참 복된 것이지만 내 경우에 그런 일이 있다고 장담 할 수가 있나 한사람 믿게 하려고 이삼십년 허비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지 말고 기간을 단축시키세요. 결혼전에 어느 선까지는 끌고 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빠진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됐습니다. 이제, 그럼 두 사람은 살면서 어떤 고백을 해야 되느냐 23절입니다. 함께 봉독 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시가 뭐냐 사랑의 시입니다. 이거,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가 성경 속에 나오는 시의
첫번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는 비결을 이렇게 잘 가르쳐 주셨어요. 이 고백이 많은 가정은 참 행복할 것이라는거요.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바로 나올시다. 당신과 나는 한 몸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존재의 가치를 모를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이 얘기에요. 오 솔레미오지. 허허허... 이 얘기요. 이 고백이 살아 있는 부부가 행복한 가정의 주인공이 되는거요. 신앙 고백이 있어야 성도이고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부부입니다. 이거 없는 부부는 힘을 잃은 부부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고백은 멋적다 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르쳐 준 거니깐 열심히 하시면 기적이 일어 날거에요. 반찬도 바뀔지 몰라요. 열심히 열심히 이 사랑을 노래하세요. 사랑을 노래 하시라구요. 그래야 내가 행복해 지고 그가 행복해 지는 것이올시다. 그럼 두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뭐냐 24절에 설명하지요. 함께 봉독합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떠나라 그랬어요. 누가요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 그랬어요. 따로 살란 말이라고 하겠나 뭐, 그보다는 정신적 독립을 의미하는 말이겠지요. 사실은 따로 사는게 정상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여자만 떨어져 나가는게 아니라 남자도 부모로부터 떠나서 자기들만의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독립적 인격이 되라는 것인데 그렇게 못되는 경우가 너무 많고 특별히 부모들이 빨리 결혼을 시키려고 합니다만은 결혼의 원리를 스스로 어기려고 합니다. 빨리 결혼시켜서 재미 볼려고 하지요. 독립시켜서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보다는 말이죠. 이것이 하나의 큰 문제가 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둘 만의 관계속에 집중하라 그 상징적인 표가 뭐냐하면 신혼여행입니다. 뭐 갈 데가 없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오라는 데가 없어서 가는게 아니어요.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서 가장 소중한 두사람과의 관계속으로 몰입하는 것이 바로 신혼여행입니다. 저는 결혼식을 주례하고 또 이런 것을 보면서 용어가 매우 잘못됐다고 판단합니다. 시집간다는 말,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성경적으로... 틀린 말이에요. 이건 부권(夫權)사회(社會)속에서 나온 말이어요. 장가간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틀린 말이에요. 이건 모권(母權)사회(社會)속에서 나온거에요. 그럼 정확한 말은 뭐냐 결혼한다 입니다. 결혼한다는 말이 정확한 말이요. 또 하나 청첩장을 보면 말이죠 요번에 우리 자식들이 결혼하게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혼주 아무게... 이렇게 해서 나와요. 다시 말하면 부모가 이 아이들을 결혼시킨다는 거요. 주체가 누구냐 부모요. 잘못 된거요. 이거는, 그럼 가장 정확한 초정장은 뭐냐 이번에 저희들이 여호와 하나님 은혜 중에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게 자식, 누구하면 끝나는거요. 전부 다 틀렸어요. 전부 다. 이런 생각과 용어를 바꾸지 않는 한 참 어려울 거에요. 그러므로 결혼의 주체는 누구다. 신랑과 신부지 양가의 부모가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부모님들 잘 알아두세요. 두 아이가 만나서 결단하는 거에요. 그리고 시집가는 것도 아니오. 장가가는 것도 아니오. 결혼 할 뿐이요. 명문가의 며느리들이 행복할 것 같지요. 천만에 말씀이요. 시집의 가풍과 관계에 묶여서 얼굴을 보세요. 그늘이 팍 있지, 죽이는 겁니다. 이거, 돈 좀 도와 준다고 해서 꽁꽁 관계를 묶어놓고 숨도 못 쉬게 해요. 이런거 많이 잘못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두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하고 효도도 둘이 합의하에 하셔야 하는 겁니다. 결혼하고 집을 잊지 못해서 연연하고 남편을 속이고 아내를 속이는 것은 이건 효도가 아니에요. 이건 마마보이에요. 마마보이...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고하니 많은 가정중에 오해가 뭐냐하면 제가 많이 경험해요. 예를 들면 문제가 생기면 아내하고 관계 속에서 얘기가 잘 안 통하면 옛날 자기 집에다 전화해서 엄마, 어떻데, 어떻데하고 남자가 일러요. 저사람을 믿고 내가 일생을... 그러면서 이게 뭐냐면 우애라고 생각을 해요. 가족간의 우애라고 생각해요. 아닌거에요. 독립하지 못한 거에요. 그러므로 두사람 속에서 문제를 끝내야 해요. 도무지 불가능할 때가 있겠습니다만은 작은 일 가지고 쭈루룩 가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떠나야 한다는 것, 얼마전에 제가 텔레비젼을 봤는데 동물의 왕국인가 그런게 있던데 치이타가 어미 치이타가 두 마리 새끼를 길렀는데 이 새끼들이 사냥을 완벽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어미 치이타가 떠납니다. 조용히... 독립해서 잘 살라고, 아, 치이타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요. 허허허...
여러분 삶 속에는 여러 관계가 있답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른 관계가 나오잖아요. 동물과의 관계가 나와요. 요즘은 이걸 가지고 논문 써도 될 꺼에요. 애완동물과 인간관계와의 관계는... 허허허 강아지끼고서 뭐 친구라고 그러는데 말도 안되는 얘기에요. 성경에 말씀합니다. 짐승은 심심풀이는 되도 인간하고 친구아니다. 고독을 풀어줄 존재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씀을 합니다. 저 그런 가정도 봤어요. 연로하신 부모님이 외로워서 결혼하고 싶어하니까 자식들이 말이죠, 막 들고 일어납디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에는 세종류가 있어요.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있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면 동반자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자식이 열명되고 손주가 백명되도 짝 없는 노인네는 외로운 것이에요. 나 외롭다고 그러면 "엄마가 왜 외로워 우리가 있는데. " 그런 말은 말 같지 않은 소리요, 자기 생각이요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원리는 짝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있는거요. 노인네가 주책이네,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결혼하고 안 하고는 노인네가 결정할 일이고 자식들은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망령된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파트너쉽(Partnership)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중요성 성경에 나오고 있어요. 이 결혼을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절이 필요합니다. 25절 함께 봉독 합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서로에게는 부끄러운 점이 있어요. 덮어줘야 할 부분이 있다고요. 용서해야만 이 관계는 이루어지는 거에요. 왜, 흠 없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만 하나가 될 것이에요. 용서해 주고, 받아 주고, 이해해 주고, 기다려 주고, 도와 주며 살아 가는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 인간의 행복은 극대화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하는 겁니다. 여기 본문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하신 가정과 그 목적이 나와 있어요. 이건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아무리 바꿔도 변하지 않는 원리요, 질서입니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들의 미숙함과 이기심 때문에 불행이 오는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가 절대로 잘못된 것은 아니올시다. 그러므로 불행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하고 그리고 항상 생각할 것은 원래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했던 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고 계획하셨던 그 관계 속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할 때에 가정은 가장 행복한 인간의 보금자리로 굳게 서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의 가정들이 이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