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
본문
어떤 화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려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여행을 통해서 멋진 장면들을 많이 봤고 또 화폭에 담았습니다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민을 하다가, 하루는 어떤 수도사를 만나서 묻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뭡니까” “아! 그것은 바로 믿음이올시다. ” 이 대답을 듣고 보니 정말 믿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았습니다. 조금 후에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인을 만나서 똑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 그 대답을 듣고 보니 정말 평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았습니다. 또 한참 길을 가는데, 젊은이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걸어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더니만, “아, 그거야 사랑이지요!” 이 말도 그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그린다지 이 추상적인 대답을 어떻게 종합하고 구체화해서 화폭에 담을 것이냐, 그 방법이 없을까’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너무도 몸과 마음이 피곤해져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그가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놀던 아이들이 “아빠-아!” 하면서 달려왔습니다. ‘아! 이 아이들이 나를 믿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뒤에 보니 아내가 따뜻한 미소로 자기를 보고 웃어줍니다. ‘아내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자기의 마음을 평안하게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외쳤답니다. ‘세상에 참 아름다운 것이 많지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이로구나! 내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찾아 방황하지 않으리라! 이제는 가정을 그리며 살리라!’고 결심을 했답니다. 세상에서 가정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양육을 받고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가정을 떠나서 죽게 됩니다. 우리의 일생과 가정은 결코 떠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불행은 가정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한 이 가정의 소중함을 위하여 내가 노력하지 못하면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로 가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가정의 기원’입니다. 가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문화인류학적으로 말이 많습니다만 성경은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담을 만드셨는데, 혼자 있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서 둘을 만나게 하셨다. 바로 이 순간이 가정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만드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해서 자기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이 가정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창조의 맨 끝에 이루어진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절정! 피크(Peak)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할 때 그들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결혼하는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가정을 선물로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혼자사는 게 좋다 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비혼주의’라 그렇게 부르는데 이 비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뭐, 복잡하게 살 것 있나,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살지 말고, 시집이니 친정이니 그런 거 다 필요없이 그저, 혼자 편하게 살자!, 그러다가 필요하면 그때 그때 넘기면 되는 거지. 뭐, 이렇게 얽매이는 삶을 살아가냐’ 이렇게 말하면서 결혼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들어보니 그럴 듯하죠 그런데, 이 생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가 파생되어 나오는지 모릅니다. 홀로 사는 고독에서부터 나오는 병리현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게 되고, 이들이 결혼을 하고, 또 결혼을 통하여 철저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좋지!’ 그렇게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십시다. 18절 상반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까짓껏 결혼이라는 것 하면 어떻고 않하면 어떠냐 말합니다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혼자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 어디 먼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내 가정 속에 내가 세상에서 누려야 할 가장 큰 행복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찾으셨다면 더 찾아내시고, 아직 못 찾았다면 발견해 내야 합니다. 가정은 행복의 보물 찾기와 같은 것이올시다. 왜 이렇게 행복하게 만든 가정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이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개인들의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인간들의 죄와 무지에 의하여 훼손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는 생각해야 할 원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맨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고백’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21절과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그랬습니다.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여자를 만드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아담 앞에 데려오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 사람을 나에게 데려와 주셨다, 이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내 앞에 와 있었다, 이 오묘한 만남의 신비를 시로 표현하기를 “깊은 잠 속에서…” 자고 깨니 그 사람이 와 있었다고 본문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많은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만나고, 사랑을 해서, 이렇게 삽니다. ” 하면 좋은데, 꼭 얘기를 하다 보면 중간에 곁길로 새고 삐딱해져서 하는 말이 “저 사람이 나를 하도 죽자 사자 쫓아다녀서 그 인생이 불쌍해서 결혼해 줬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쪽에서 열을 냈다 이겁니다. 결국 그 말은 내가 좀 더 낫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결혼한 그 시간부터 끝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분을 보내셔서 저 분이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달려가 그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것이요, 성경이 전하는 원리입니다. 만남의 경로와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연애를 했든 중매를 했든지 간에 상관 없이 저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데려와 주신 분, 내게 가장 잘 맞는 분, 그렇게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십니다. “아이고, 내가 그 때 눈이 삐었지! 저 사람을 좋다고 생각하고 홀딱 넘어가다니” 그럽니다. 눈은 그 때 삔 것이 아니고 지금 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눈을 반짝 열어줘서 바로 봤는데 살다보니 딴 마음이 들어가서 지금 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유행가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우연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 바보같은 눈물 흘리지 마라..... 그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분을 나에게 데려 오셨다고 하는 바로 그 신앙고백 위에서 가정은 견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무엇인가 하니, 상대방을 내가 골랐다고 생각하고 내가 선택했으므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맞게 주신 사람이요, 그러므로 그를 내가 영접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한 사람을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모두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남과 그 사람을 절대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남편과 다른 남자를 비교하고, 아내와 다른 여자를 비교해서 문제가 됩니다. 내 마음 속에서 비교 대상을 지워야 합니다. 내게 가장 맞는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 주셨으니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 고백 위에 가정은 건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니 나하고 맞네 안맞네 취미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학식이 어떻고, 교양이 있네 없네 등등 말이 많지만 더 이상의 조건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 그러므로 끝! 어디에 조건이 더 있을 거냔 말입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신혼 여행은 일주일이고 결혼은 한평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혼 여행의 뜨거운 정열, 그것은 평생가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있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이 결혼을 유지케 하는가 하면 바로 신뢰입니다. 그 신뢰의 기초는 ‘여호와 하나님이 저 분을 내게 주셨다’입니다. 이 신뢰 속에 결혼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 신뢰 위에서 사랑이 뜨거워질 때도 있고, 식을 때도 있지만,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남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두 번째는 두사람이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24절 상반절입니다. “이러므로 부모를 떠나서.... ” 그랬습니다. 부모가 제일 떠나기 어려운 존재인가 봅니다. 우리 생각에는 남자는 가만히 있고 여자만 부모를 떠나서 나에게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성경을 잘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랬습니다. 남자도 부모를 떠나고 여자도 부모를 떠나서 둘이 만나서 이루는 것이 제대로 된 결혼입니다. 그런데 안 떠나서 문제입니다. 집은 따로 사는데, 정신적으로 독립을 못하고 그래서 간섭이 많습니다.
여러분! 결혼한 자식에 대하여, 며느리에 대하여 비방하는 것은 주책입니다. 성경에 보면 월권입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그는 독립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부모님들이 꼭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밥을 먹든, 떡을 구워 먹든 알아서 하겠지” 이래야 합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한 두 사람도 옛집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집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옛날 살던 집은 부모님 집이요, 우리 집은 여기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하고, 쪼르르 달려가서 욕하고, 이런 행동은 어린 애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어서 “얘, 너 우리 집에서 나가라!” 그랬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이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내보내야 하나..... 그 부인이 저에게 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 너무나 효자라서..... 어려울 것 같아요. ” 그 말을 듣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효자가 아닙니다. 마마보이(mama boy)지. ” 시집과 친정의 간섭 때문에 내 가정이 훼파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을 효도라 오해하고 사는 분이 너무도 많은데,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런 부당한 간섭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 제 아내가 어머니 맘에 못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제 가정 일이니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 이렇게 끊을 수 있어야 독립된 것입니다.
이 떠남의 상징적 행위가 신혼 여행입니다. 잘 곳이 없어서 떠납니까 오라는 데가 없어서 가는 것입니까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고백하는, 그러한 일을 위하여 떠나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부부 간의 합의 없는 효도는 잘못된 것이요, 참다운 효도가 아닙니다. 양가 때문에 싸움이 생길 때는 이렇게 말하세요. “우리 잠깐 중단합시다. 합의점이 이루어질 때까지 좀 가라 앉힙시다. ”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가만히 두지를 못하는데, 가만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자식 문제로 싸우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말입니다. 부모를 떠나야 하는 독립성! 이것을 명심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면 24절 하반절 말씀처럼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방해없이 순수한 하나가 되야 되는데, 그 순수한 하나가 된다는 말의 의미가 뭡니까 똑같은 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서의 내면 관계가 일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은 기능적인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둘은 서로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돈을 벌어 옵니다. 그러면 그 돈을 쓰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쓰는 사람도 그 돈을 가지고 잘 쓴다는 말입니다. 이 돕는 것은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남자는 돈 버는 은사를 가지고 돈벌고, 여자는 쓰는 은사를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다 먹여 살린다고 그러지만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가 번 돈 가지고 남자보고 살라고 하면 절대로 못 살아요. 돈 모으기는 커녕 밥도 못 얻어 먹습니다. 그런데 여자한테 주면 그 돈 가지고 다 같이 먹고도 남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남자는 벌면서 도와주고 여자는 쓰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자분들! 돈 못 번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것이므로 돈 벌어 주면서 고맙다 해야 하고, 쓰면서 고맙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능적인 협력입니다.
또 하나는‘배필이다’그랬습니다. 영어로 파트너쉽(partnership)입니다.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주종관계도 아니고 라이벌 의식을 가져서도 안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으로 은사를 따라 돕고 인격적으로는 동등한 존재, 이 내면적 일치가 이루어질 때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연합이라고 하는 말은 직역하면 스티커(sticker)입니다. 딱 붙은 한 장의 종이! 한 장의 종이란 다른 말로 공동 운명체라는 말입니다.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둘이 싸워 봐야 이기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기나 결판을 내보십시오. 상처 뿐입니다. 제 얼굴에 침뱉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몸으로 연합하게 해 주셨는데, 구겨봤자, 자기 손해입니다.
결혼을 깊이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결혼에의 헌신이 부족하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결혼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명이 주어지고 이 사명에 충실하게 헌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필요하고 그렇게 될 때에 위대한 부부가 된다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결혼이란 Great Commission!, 위대한 계명입니다.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위대한 계명이 있고, 여기에 Great Commitment! 위대한 헌신, 즉 철저히 노력하면 위대한 Couple!, 위대한 부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헌신을 하나 헌신의 첫째는 말조심입니다. 상대편 마음 상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조심부터 시작해서 헌신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까투리와 장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둘이 너무 사랑하다 보니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앞날이 걱정이 되서 새들의 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올빼미를 찾아가서 “올빼미 선생님!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데, 결혼해도 되겠나요” 물으니까 올빼미가 묻기를 “둘은 서로 싸워봤니” “아니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왜 싸웁니까 사랑할 뿐입니다. 이제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한 번 싸울 때까지!” “아니, 우리는 평생 안 싸울 거라니까요” 올빼미가 하는 말이 “반드시 싸울거다, 싸운 다음에 ‘미안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때 결혼해라” 그랬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는 인격이란 ‘사랑해’ 이 말을 고백하는 정도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고 사는 시간은 짧으니까.... 더 많이 필요한 말은 ‘미안해’입니다. 미안하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인격이 될 때에야 그 사람의 결혼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여러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내가 좀 문제가 있다 싶으십니까 그러면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십시오. 이 말을 하면 자존심이 깨진다고 생각 하는데,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말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 못해서 깨지는 가정이 수도 없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짐작하지 말고 분명하게 질문하랍니다. 왜냐하면 상대편이 무슨 뜻으로 말한지도 모르고 괜히 자기 혼자 오해해 가지고 오해에 오해를 쌓고 갈등하는 부부가 하도 많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세계 최고의 정신분석 학자라고 하는 ‘칼 메닝거’ 박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남자가 직장에 다녀오면서 자기 집 문을 쓱 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와 하고 웃다가, 아버지를 보고 딱 그치니까 그 아버지가 생각하기를 “저것들이 나 없을 때 나만 따돌리고 저희들끼리만 노는구나! 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나! 나는 버림받은 가장이다!” 이렇게 스스로 외로워져서 고민하다가 자살을 했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현실 속에서 실재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실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말했느냐 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말조심하고, 넘겨집지 말고, 실수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것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70이 넘은 여자 스킨 스쿠버 챔피언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느 기자가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할머니! 이 바다 깊숙이 들어가서 몇 년 동안이나 탐사를 했습니까” 했더니 “나는 60년 넘게 바닷 속에 들어 갔지요. ” 그러더랍니다. “그럼 이제 지겨우시겠네요” 했더니 하는 말이 “아니요, 바닷속은 보면 볼수록 즐겁고 신기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들이 아직도 많고 예쁜 생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기자가 묻기를 “그럼, 이 스킨 스쿠버를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했더니 “내 생각엔 결혼과 비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결혼이란 바닷속 세계와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모르고, 들어가 봐야만 알지요. 또 처음 잠수할 때는 어렵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속에서 자유로와지는데, 거기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보물이 끝없이 많지 않소 내가 우리 남편과 함께 50년을 넘게 살았는데, 난 아직도 이 양반 장점을 다 발견하지 못했다오. ” 그렇게 얘기를 했더랍니다.
‘젊은 시절 다갔구만! 다 늙었는데 우리 사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호호백발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나도 그 속에 비밀이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이고 다 알겠는데 사랑이 안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는데 여기에 마지막 대안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근본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너와 나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사랑을 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월이 가면서 더러워지고 오염되고 상처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어서 초기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위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사랑은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가정은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야만 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유일한 사람이다. ” 이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안에서 하나되기를 힘쓰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아름다운 가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양육을 받고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가정을 떠나서 죽게 됩니다. 우리의 일생과 가정은 결코 떠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불행은 가정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한 이 가정의 소중함을 위하여 내가 노력하지 못하면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로 가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가정의 기원’입니다. 가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문화인류학적으로 말이 많습니다만 성경은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담을 만드셨는데, 혼자 있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서 둘을 만나게 하셨다. 바로 이 순간이 가정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만드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사랑해서 자기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이 가정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창조의 맨 끝에 이루어진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절정! 피크(Peak)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할 때 그들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결혼하는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가정을 선물로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혼자사는 게 좋다 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비혼주의’라 그렇게 부르는데 이 비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뭐, 복잡하게 살 것 있나,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살지 말고, 시집이니 친정이니 그런 거 다 필요없이 그저, 혼자 편하게 살자!, 그러다가 필요하면 그때 그때 넘기면 되는 거지. 뭐, 이렇게 얽매이는 삶을 살아가냐’ 이렇게 말하면서 결혼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들어보니 그럴 듯하죠 그런데, 이 생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가 파생되어 나오는지 모릅니다. 홀로 사는 고독에서부터 나오는 병리현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게 되고, 이들이 결혼을 하고, 또 결혼을 통하여 철저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좋지!’ 그렇게 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십시다. 18절 상반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까짓껏 결혼이라는 것 하면 어떻고 않하면 어떠냐 말합니다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혼자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 어디 먼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내 가정 속에 내가 세상에서 누려야 할 가장 큰 행복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찾으셨다면 더 찾아내시고, 아직 못 찾았다면 발견해 내야 합니다. 가정은 행복의 보물 찾기와 같은 것이올시다. 왜 이렇게 행복하게 만든 가정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이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개인들의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인간들의 죄와 무지에 의하여 훼손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는 생각해야 할 원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맨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고백’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21절과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그랬습니다.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여자를 만드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아담 앞에 데려오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 사람을 나에게 데려와 주셨다, 이 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내 앞에 와 있었다, 이 오묘한 만남의 신비를 시로 표현하기를 “깊은 잠 속에서…” 자고 깨니 그 사람이 와 있었다고 본문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많은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만나고, 사랑을 해서, 이렇게 삽니다. ” 하면 좋은데, 꼭 얘기를 하다 보면 중간에 곁길로 새고 삐딱해져서 하는 말이 “저 사람이 나를 하도 죽자 사자 쫓아다녀서 그 인생이 불쌍해서 결혼해 줬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쪽에서 열을 냈다 이겁니다. 결국 그 말은 내가 좀 더 낫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결혼한 그 시간부터 끝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저분을 보내셔서 저 분이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달려가 그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것이요, 성경이 전하는 원리입니다. 만남의 경로와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연애를 했든 중매를 했든지 간에 상관 없이 저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데려와 주신 분, 내게 가장 잘 맞는 분, 그렇게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십니다. “아이고, 내가 그 때 눈이 삐었지! 저 사람을 좋다고 생각하고 홀딱 넘어가다니” 그럽니다. 눈은 그 때 삔 것이 아니고 지금 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눈을 반짝 열어줘서 바로 봤는데 살다보니 딴 마음이 들어가서 지금 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유행가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우연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 바보같은 눈물 흘리지 마라..... 그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분을 나에게 데려 오셨다고 하는 바로 그 신앙고백 위에서 가정은 견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무엇인가 하니, 상대방을 내가 골랐다고 생각하고 내가 선택했으므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맞게 주신 사람이요, 그러므로 그를 내가 영접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한 사람을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모두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남과 그 사람을 절대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남편과 다른 남자를 비교하고, 아내와 다른 여자를 비교해서 문제가 됩니다. 내 마음 속에서 비교 대상을 지워야 합니다. 내게 가장 맞는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 주셨으니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 고백 위에 가정은 건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니 나하고 맞네 안맞네 취미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학식이 어떻고, 교양이 있네 없네 등등 말이 많지만 더 이상의 조건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 그러므로 끝! 어디에 조건이 더 있을 거냔 말입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신혼 여행은 일주일이고 결혼은 한평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혼 여행의 뜨거운 정열, 그것은 평생가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있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이 결혼을 유지케 하는가 하면 바로 신뢰입니다. 그 신뢰의 기초는 ‘여호와 하나님이 저 분을 내게 주셨다’입니다. 이 신뢰 속에 결혼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 신뢰 위에서 사랑이 뜨거워질 때도 있고, 식을 때도 있지만,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남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두 번째는 두사람이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24절 상반절입니다. “이러므로 부모를 떠나서.... ” 그랬습니다. 부모가 제일 떠나기 어려운 존재인가 봅니다. 우리 생각에는 남자는 가만히 있고 여자만 부모를 떠나서 나에게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성경을 잘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랬습니다. 남자도 부모를 떠나고 여자도 부모를 떠나서 둘이 만나서 이루는 것이 제대로 된 결혼입니다. 그런데 안 떠나서 문제입니다. 집은 따로 사는데, 정신적으로 독립을 못하고 그래서 간섭이 많습니다.
여러분! 결혼한 자식에 대하여, 며느리에 대하여 비방하는 것은 주책입니다. 성경에 보면 월권입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그는 독립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부모님들이 꼭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밥을 먹든, 떡을 구워 먹든 알아서 하겠지” 이래야 합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한 두 사람도 옛집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집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옛날 살던 집은 부모님 집이요, 우리 집은 여기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하고, 쪼르르 달려가서 욕하고, 이런 행동은 어린 애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어서 “얘, 너 우리 집에서 나가라!” 그랬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이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내보내야 하나..... 그 부인이 저에게 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 너무나 효자라서..... 어려울 것 같아요. ” 그 말을 듣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효자가 아닙니다. 마마보이(mama boy)지. ” 시집과 친정의 간섭 때문에 내 가정이 훼파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을 효도라 오해하고 사는 분이 너무도 많은데,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런 부당한 간섭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어머니! 제 아내가 어머니 맘에 못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제 가정 일이니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 이렇게 끊을 수 있어야 독립된 것입니다.
이 떠남의 상징적 행위가 신혼 여행입니다. 잘 곳이 없어서 떠납니까 오라는 데가 없어서 가는 것입니까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고백하는, 그러한 일을 위하여 떠나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부부 간의 합의 없는 효도는 잘못된 것이요, 참다운 효도가 아닙니다. 양가 때문에 싸움이 생길 때는 이렇게 말하세요. “우리 잠깐 중단합시다. 합의점이 이루어질 때까지 좀 가라 앉힙시다. ”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가만히 두지를 못하는데, 가만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자식 문제로 싸우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말입니다. 부모를 떠나야 하는 독립성! 이것을 명심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면 24절 하반절 말씀처럼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방해없이 순수한 하나가 되야 되는데, 그 순수한 하나가 된다는 말의 의미가 뭡니까 똑같은 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서의 내면 관계가 일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은 기능적인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둘은 서로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돈을 벌어 옵니다. 그러면 그 돈을 쓰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쓰는 사람도 그 돈을 가지고 잘 쓴다는 말입니다. 이 돕는 것은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남자는 돈 버는 은사를 가지고 돈벌고, 여자는 쓰는 은사를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다 먹여 살린다고 그러지만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가 번 돈 가지고 남자보고 살라고 하면 절대로 못 살아요. 돈 모으기는 커녕 밥도 못 얻어 먹습니다. 그런데 여자한테 주면 그 돈 가지고 다 같이 먹고도 남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남자는 벌면서 도와주고 여자는 쓰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자분들! 돈 못 번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것이므로 돈 벌어 주면서 고맙다 해야 하고, 쓰면서 고맙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능적인 협력입니다.
또 하나는‘배필이다’그랬습니다. 영어로 파트너쉽(partnership)입니다.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주종관계도 아니고 라이벌 의식을 가져서도 안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으로 은사를 따라 돕고 인격적으로는 동등한 존재, 이 내면적 일치가 이루어질 때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연합이라고 하는 말은 직역하면 스티커(sticker)입니다. 딱 붙은 한 장의 종이! 한 장의 종이란 다른 말로 공동 운명체라는 말입니다.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둘이 싸워 봐야 이기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기나 결판을 내보십시오. 상처 뿐입니다. 제 얼굴에 침뱉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몸으로 연합하게 해 주셨는데, 구겨봤자, 자기 손해입니다.
결혼을 깊이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결혼에의 헌신이 부족하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결혼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명이 주어지고 이 사명에 충실하게 헌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필요하고 그렇게 될 때에 위대한 부부가 된다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결혼이란 Great Commission!, 위대한 계명입니다.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위대한 계명이 있고, 여기에 Great Commitment! 위대한 헌신, 즉 철저히 노력하면 위대한 Couple!, 위대한 부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헌신을 하나 헌신의 첫째는 말조심입니다. 상대편 마음 상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조심부터 시작해서 헌신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까투리와 장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둘이 너무 사랑하다 보니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앞날이 걱정이 되서 새들의 선생이라고 불리우는 올빼미를 찾아가서 “올빼미 선생님!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데, 결혼해도 되겠나요” 물으니까 올빼미가 묻기를 “둘은 서로 싸워봤니” “아니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왜 싸웁니까 사랑할 뿐입니다. 이제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한 번 싸울 때까지!” “아니, 우리는 평생 안 싸울 거라니까요” 올빼미가 하는 말이 “반드시 싸울거다, 싸운 다음에 ‘미안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때 결혼해라” 그랬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는 인격이란 ‘사랑해’ 이 말을 고백하는 정도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고 사는 시간은 짧으니까.... 더 많이 필요한 말은 ‘미안해’입니다. 미안하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인격이 될 때에야 그 사람의 결혼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여러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내가 좀 문제가 있다 싶으십니까 그러면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십시오. 이 말을 하면 자존심이 깨진다고 생각 하는데,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말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 못해서 깨지는 가정이 수도 없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짐작하지 말고 분명하게 질문하랍니다. 왜냐하면 상대편이 무슨 뜻으로 말한지도 모르고 괜히 자기 혼자 오해해 가지고 오해에 오해를 쌓고 갈등하는 부부가 하도 많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세계 최고의 정신분석 학자라고 하는 ‘칼 메닝거’ 박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남자가 직장에 다녀오면서 자기 집 문을 쓱 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와 하고 웃다가, 아버지를 보고 딱 그치니까 그 아버지가 생각하기를 “저것들이 나 없을 때 나만 따돌리고 저희들끼리만 노는구나! 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나! 나는 버림받은 가장이다!” 이렇게 스스로 외로워져서 고민하다가 자살을 했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현실 속에서 실재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실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말했느냐 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말조심하고, 넘겨집지 말고, 실수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것을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70이 넘은 여자 스킨 스쿠버 챔피언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느 기자가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할머니! 이 바다 깊숙이 들어가서 몇 년 동안이나 탐사를 했습니까” 했더니 “나는 60년 넘게 바닷 속에 들어 갔지요. ” 그러더랍니다. “그럼 이제 지겨우시겠네요” 했더니 하는 말이 “아니요, 바닷속은 보면 볼수록 즐겁고 신기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들이 아직도 많고 예쁜 생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기자가 묻기를 “그럼, 이 스킨 스쿠버를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했더니 “내 생각엔 결혼과 비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결혼이란 바닷속 세계와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모르고, 들어가 봐야만 알지요. 또 처음 잠수할 때는 어렵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속에서 자유로와지는데, 거기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보물이 끝없이 많지 않소 내가 우리 남편과 함께 50년을 넘게 살았는데, 난 아직도 이 양반 장점을 다 발견하지 못했다오. ” 그렇게 얘기를 했더랍니다.
‘젊은 시절 다갔구만! 다 늙었는데 우리 사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 결혼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호호백발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나도 그 속에 비밀이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이고 다 알겠는데 사랑이 안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는데 여기에 마지막 대안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근본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너와 나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사랑을 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월이 가면서 더러워지고 오염되고 상처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어서 초기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위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사랑은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가정은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해야만 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유일한 사람이다. ” 이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안에서 하나되기를 힘쓰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아름다운 가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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