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건강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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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어린이주일이었고 이번 주는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래서 통틀어서 가정과 관련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조직으로는 가정과 교회가 있습니다. 국가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조직이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조직인 것은 아닙니다. 가정은 교회보다 앞선 개념입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먼저 서야 가정이 서고 가정이 서야 교회가 서고 교회가 서야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섭니다. 부부는 서로의 차이를 좁히고 좁혀 결국 한몸으로 연합해야 하고 부모와 자녀는 적당한 차이를 두어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연합해도 좋으나 부모자녀는 연합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끼리는 서로 연합하고 부모자녀는 서로 유별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정반대로 부부는 서로 유별하고 부모자녀는 서로 연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효도를 중시하는 유교 원리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신앙인의 가정에서조차도 '부부연합-부자유별'이라는 기독교 원리와 '부부유별-부자유친'이라는 유교 원리가 서로 뒤섞여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자식 때문에 산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자식 때문에 살아서 되겠습니까. 부부끼리 연합하는 재미가 있어야지 어찌 자식 때문에 살아서 되겠습니까.
1. 부모자녀 유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 때가 되면 남자는 부모의 둥지를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의 둥지에서 보호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느라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렇지만 보통 부모가 아들을 보호하면서 키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이가 차면 남자는 부모의 보호막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아내를 만나 자기만의 새 인생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현명한 부모라면 언젠가는 자기 품을 떠나야 하는 아들을 염두에 두고 부단히 떠나 보내는 훈련을 해야 하며 아들도 끊임없이 부모를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 아내가 시집오지 않고 남자가 아내에게 장가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내는 남자의 최고 뼈요, 최고 살이기 때문에 아내가 부모를 떠나 남자에게로 오지 않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남자는 껍데기요, 아내는 알짜인 것입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남자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얻은 자는 복받은 자요, 은총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잠18:22).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은 복음사역을 위해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큰 일을 감당하신 분들은 독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그렇지 않습니까. 꽃동네 오웅진 신부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들은 복음사역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이 중요하고 부부관계가 중요하고 부모자녀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둥지를 포근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거친 돌과 가시를 둥지에 깔아둡니다. 새끼를 둥지에서 더 넓은 창공으로 내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지나치게 포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자식이 어릴 때에는 가정이 포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자랄수록 부모의 절제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지나친 애정 고착현상이 있으면 안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한덩어리로 고착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오지랖에 싸여 자란 아들은 마마보이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타락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변화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마보이나 파티걸은 이 변화의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습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을 마마보이니 파티걸로 키워서는 안됩니다. 현실감각을 갖춘 건전한 사회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니 부모와 자녀 간에는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유별이 아니라 부모자녀 유별인 것입니다. 원래 남자는 떠나는 존재입니다. 남자는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고 부모를 떠나고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넓어지는 지구촌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빨라지는 속도경쟁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이동하는 유목민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혼란스러워지는 위험증가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힘들어지는 스트레스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약해지는 약자의식시대(민13:33)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물러서는 후퇴의식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개척정신이, 모험정신이, 전진정신(히10:38)이 더욱 필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시기가 다가올수록 우주적인 혼돈과 지구적인 혼란은 한층 가중될 것입니다.
절제된 사랑으로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만 합니다. 부모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 둥지를 뒤흔듭니다. 때가 되면 어미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립니다. 영혼육을 강하게 훈련받은 자식만이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수천년간의 박해상황에서도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세계 금융시장과 노벨상을 장악하는 것이겠지요.
다윗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아버지 이새는 여덟째 말째아들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 이새는 막내 다윗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망각하고 있었지 않습니까(삼상16:10-11). 이새는 맹수가 있는 광야에서 양을 치도록 막내 다윗을 내몹니다. 이새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로 막내 다윗을 내보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아버지의 목장에서 양치는 비법을 터득합니다. 다윗은 어린양 우리와 늙은양 우리와 젊은양 우리를 따로 만드는 지혜를 터득합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어린양을 풀밭에 내보내 여린 풀을 먹이고 다음에 늙은양을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젊은양을 내보내는 지혜를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찬양시를 지어부르고 양을 치면서 수금으로 찬양합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물매질로 사자와 불곰을 물리치는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목양비결은 나중에 백성 통치기술로, 다윗의 찬양은 나중에 시편으로, 다윗의 물매질은 나중에 골리앗 퇴출로 이어집니다. 결국 아버지 이새가 막키운 덕분에 다윗은 적군 블레셋의 칼날을 꺾는 여호와 하나님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둥글둥글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둥글둥들한 가운데 모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뭔가 특별한 것을 일구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둥글둥글한 사람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그런 사람이 대하기 편하고 막 대해도 괜찮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유치한 생각 때문에 둥글둥글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좋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이 남자를 찾을 때 이런 기준으로 찾는 것 같습니다. 너무 둥글둥글한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요. 이 세상현실은 보기보다 험난합니다. 모난 구석이 없으면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없는 게 세상현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악한 영들과의 씨름입니다(엡6:12).
여호와 하나님은 어머니 리브가의 오지랖을 떠나지 못하던 야곱을 떼어내 멀리 타향으로 내모십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아들 야곱 사이에 영혼육의 고착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간에 연합현상은 곧 타락입니다. 부모자식 간에는 유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도 아버지 야곱의 품에서 떼어내 머나먼 타국으로 내보내십니다.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지 않는 자식은 분명히 망할 자식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꼭 부모를 떠나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같이 있으면서도 부모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같이 있게 되면 아무래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겠지요.
어머니 한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 사무엘을 실로의 성소로 떼어 보내는 용단을 내립니다. 한나는 외아들 사무엘을 향한 감정의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사무엘의 장래를 위해 제사장 엘리에게로 보냈습니다(삼상2:11). 한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거스리면서 아들 사무엘을 당시 최고의 제사장이었던 엘리 문하로 떠나 보냅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떠나보내는 것, 이것이 더 큰 사랑이지요. 어머니 엘리사벳은 애지중지 늦둥이 세례요한을 빈들로 내어 보냅니다(눅1:80). 늦둥이 외아들 세례요한을 떼어 보내는 아픔이야 컸겠지만 어머니 엘리사벳은 자기 아들이 빈들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독대하는 훈련을 쌓도록 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최고의 지배자로 징기스칸을 꼽습니다. 징기스칸은 포근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일찌기 고아가 됐던 그는 허허벌판의 광야에서 생존비결을 터득했고 기동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그 기동력으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유럽전역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골프의 여왕 박세리도 지독한 훈련의 강을 건넜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담력을 키우기 위해 밤중에 공동묘지를 찾아가야 했고 투견장에서 피흘리며 싸우는 투견들을 구역질나도록 구경해야 했습니다.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칵테일'을 개발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19세의 벤처기업가 이상협은 원래 학교교육 부적응자였습니다. 그러나 풀어놓아 마음껏 다니게 한 부모의 자유로운 교육방식은 그의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던 것입니다.
2. 부부연합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 부부는 유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부부는 연합하는 존재입니다. 한몸의 연합은 영혼육의 연합입니다. 단지 육체의 연합이나 의견의 연합만 가지고 안됩니다. 부부는 영적인 연합, 신앙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을 공유해야 하고 신앙수준도 서로 일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일치되는 신앙수준에서 인생의 멍에를 매는 게 아무래도 좋습니다. 신앙수준에 차이가 심하면 멍에의 높이가 크게 기울기 때문에 피차 피곤하게 됩니다. 신앙수준에서 서로 차이가 심하면 갈등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남편은 영적인 것에, 신앙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려고 하고 아내는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려고 한다면 어찌 그 가정에 화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 돈과 시간과 정력을 신앙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고자 애쓰는데 아내는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 가정이 든든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이 앞선 남편은 인내심으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신앙이 뒤처진 아내는 열심히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피차 피곤해 지고 서로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맙니다. 언제나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면 그 가정에는 생기가 넘치겠지요.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생각하는 지성, 서로 느끼는 감성, 서로 책임지는 의지에 있어서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는 같이 생각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책임지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는 육체적으로도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건강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부부는 서로를 위해 건강한 육체를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부에게는 딴 주머니가 없어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공유하고 나누고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모르는 돈주머니가 있으면 안됩니다. 비자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도박꾼이거나 알콜중독자일 경우에는 아내의 비자금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남편이라면 비록 남편을 위해서 하는 저축일지라도 비자금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제가 너무 꼬장꼬장한가요. 부부 사이에는 서로 모르는 생각 주머니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서로 딴 생각을 품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서로 모르는 감정 주머니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감정을 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물만 마셔야 합니다(잠5:15-19).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의 물만 마셔야 합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의 샘물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의 샘에서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의 물을 얻어 마시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오직 아내의 샘에서 인생의 갈증을 채워야 합니다. 남편은 그 어떤 다른 여자로부터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물이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로 흐르도록 방치해서도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이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로 흘러가지 않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을 지키는 파숫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게 돼 있습니다(창3:16). 그런데 남편을 사모하고자 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아내는 다른 남자를 찾아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사모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한방울의 물이라도 그 어떤 다른 남자와 더불어 마셔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독점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한방울의 감정이라도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하기 나름입니다. 남편의 보살핌에 달려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의 샘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살피고 가꾸어야 합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의 샘을 즐거워하며 만족하게 생각하며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동거하되 지식을 따라(벧전3:7) 동거함으로써 부부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함으로써 부부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보통 남자는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 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 명예를 얻으려는 욕구, 업적을 쌓으려는 욕구,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니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거나 절제시키는 데 있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여자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 듣고자 하는 욕구, 대화하고자 하는 욕구, 의논하고자 하는 욕구, 분위기를 찾고자 하는 욕구,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욕구,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니 남편은 이러한 아내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거나 절제시키는 데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지식적인 이해와 수용, 서로에 대한 양보와 상호접근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욕구 바구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지식을 따라 사랑하고 지식을 따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연합은 그저 되는 게 아닙니다. 계속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또한 부부는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남편이라야 남편의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아내라야 아내의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각각 자기 짐을 질 때 가정 공동체는 든든히 설 것입니다. 남편이 남편의 짐을 지지 않고 아내가 아내의 짐을 지지 않을 때 가정 공동체는 든든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일방적으로 혼자 짐을 져야 한다면 이미 그 가정은 병든 가정인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연합하되 건강하게 연합하고 성숙하게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존성에도 병적인 의존성이 있는가 하면 건강한 의존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잉꼬처럼 붙어 다닌다고 금슬이 좋고 건강한 관계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중년 부부가 살았습니다. 남편은 부인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퇴근하면 곧바로 귀가합니다. 가까운 시장에 장보려 가도 남편은 함께 갑니다. 장바구니도 들어줍니다. 다른 여자들이 너무 부러워하는 잉꼬부부부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인은 너무나 남편에게 의존해온 나머지 아주 가까운 데도 혼자 못갑니다. 남편을 대동하지 않으면 혼자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에도 남편하고 같이 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아내를 위해 남편은 정말로 최선을 다합니다. 아내를 도와주려고, 아내의 필요를 다 채워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최선이겠습니까. 아내는 점점 병약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정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건강한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나친 결탁은 부부관계를 병들게 합니다. 연합하되 서로 건강하게, 서로 성숙하게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남편과 건강한 아내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건강한 사람의 특성은 이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인간의 총체적인 성숙성을 뜻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현실감각이 뛰어납니다. 공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해결하고자 합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복잡다단해 지면서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지게 돼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어떤 문제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가정입니다. 부부싸움이 없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수없이 부부싸움을 하게 돼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부부싸움하지 않는 가정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되 건설적으로 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결국 건강한 남편과 건강한 아내만이 건강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납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동화됩니다. 대인관계가 좋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방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발적으로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습니다. 정서적인 반응이 풍부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민주적입니다. 창의적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일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람있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부부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연합하되 몸과 영혼이 연합해야 합니다. 연합하되 완전하게,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부모나 형제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좀 어설프고 부족하다 싶어도 서로 연합하는 가운데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부모효도니 형제우애니 하는 것 때문에 부부관계가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부모효도가 중요하고 형제우애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부부연합에 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결정을 해야 할 때 부부는 서로 연합하되 부모형제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조언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은 부부가 연합한 가운데 부부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신앙과 경제면에서도 부모형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부부간의 연합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건강한 부부관계에 대해 성경적인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는 건강하지 못한 부부관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심신이 병들었을 경우도 있고 다른 한쪽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인내하고 일방적으로 헌신해야만 가정이 지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님의 십자가 정신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건강하지 못한 가정보다는 건강한 가정이 더 많아지기를 원하시겠지요.
우리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건강한 나라를 만듭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부부가 만듭니다. 부부는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연합하되 영혼육이 연합해야 하고 지식을 따라 연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가 서로 연합하고자 노력할 때 가정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연합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실 것입니다.
부부가 먼저 서야 가정이 서고 가정이 서야 교회가 서고 교회가 서야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섭니다. 부부는 서로의 차이를 좁히고 좁혀 결국 한몸으로 연합해야 하고 부모와 자녀는 적당한 차이를 두어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연합해도 좋으나 부모자녀는 연합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끼리는 서로 연합하고 부모자녀는 서로 유별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정반대로 부부는 서로 유별하고 부모자녀는 서로 연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효도를 중시하는 유교 원리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신앙인의 가정에서조차도 '부부연합-부자유별'이라는 기독교 원리와 '부부유별-부자유친'이라는 유교 원리가 서로 뒤섞여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자식 때문에 산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자식 때문에 살아서 되겠습니까. 부부끼리 연합하는 재미가 있어야지 어찌 자식 때문에 살아서 되겠습니까.
1. 부모자녀 유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 때가 되면 남자는 부모의 둥지를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의 둥지에서 보호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느라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렇지만 보통 부모가 아들을 보호하면서 키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이가 차면 남자는 부모의 보호막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아내를 만나 자기만의 새 인생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현명한 부모라면 언젠가는 자기 품을 떠나야 하는 아들을 염두에 두고 부단히 떠나 보내는 훈련을 해야 하며 아들도 끊임없이 부모를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 아내가 시집오지 않고 남자가 아내에게 장가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내는 남자의 최고 뼈요, 최고 살이기 때문에 아내가 부모를 떠나 남자에게로 오지 않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남자는 껍데기요, 아내는 알짜인 것입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남자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얻은 자는 복받은 자요, 은총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잠18:22).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은 복음사역을 위해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큰 일을 감당하신 분들은 독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그렇지 않습니까. 꽃동네 오웅진 신부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들은 복음사역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이 중요하고 부부관계가 중요하고 부모자녀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둥지를 포근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거친 돌과 가시를 둥지에 깔아둡니다. 새끼를 둥지에서 더 넓은 창공으로 내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지나치게 포근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자식이 어릴 때에는 가정이 포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자랄수록 부모의 절제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지나친 애정 고착현상이 있으면 안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한덩어리로 고착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오지랖에 싸여 자란 아들은 마마보이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타락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변화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마보이나 파티걸은 이 변화의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습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을 마마보이니 파티걸로 키워서는 안됩니다. 현실감각을 갖춘 건전한 사회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니 부모와 자녀 간에는 유별해야 합니다. 부부유별이 아니라 부모자녀 유별인 것입니다. 원래 남자는 떠나는 존재입니다. 남자는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고 부모를 떠나고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는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넓어지는 지구촌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빨라지는 속도경쟁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이동하는 유목민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혼란스러워지는 위험증가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힘들어지는 스트레스시대입니다. 지금은 자꾸만 약해지는 약자의식시대(민13:33)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물러서는 후퇴의식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개척정신이, 모험정신이, 전진정신(히10:38)이 더욱 필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시기가 다가올수록 우주적인 혼돈과 지구적인 혼란은 한층 가중될 것입니다.
절제된 사랑으로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만 합니다. 부모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 둥지를 뒤흔듭니다. 때가 되면 어미 사자는 새끼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립니다. 영혼육을 강하게 훈련받은 자식만이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수천년간의 박해상황에서도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세계 금융시장과 노벨상을 장악하는 것이겠지요.
다윗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아버지 이새는 여덟째 말째아들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 이새는 막내 다윗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망각하고 있었지 않습니까(삼상16:10-11). 이새는 맹수가 있는 광야에서 양을 치도록 막내 다윗을 내몹니다. 이새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로 막내 다윗을 내보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아버지의 목장에서 양치는 비법을 터득합니다. 다윗은 어린양 우리와 늙은양 우리와 젊은양 우리를 따로 만드는 지혜를 터득합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어린양을 풀밭에 내보내 여린 풀을 먹이고 다음에 늙은양을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젊은양을 내보내는 지혜를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찬양시를 지어부르고 양을 치면서 수금으로 찬양합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물매질로 사자와 불곰을 물리치는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목양비결은 나중에 백성 통치기술로, 다윗의 찬양은 나중에 시편으로, 다윗의 물매질은 나중에 골리앗 퇴출로 이어집니다. 결국 아버지 이새가 막키운 덕분에 다윗은 적군 블레셋의 칼날을 꺾는 여호와 하나님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둥글둥글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둥글둥들한 가운데 모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뭔가 특별한 것을 일구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둥글둥글한 사람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그런 사람이 대하기 편하고 막 대해도 괜찮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유치한 생각 때문에 둥글둥글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좋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이 남자를 찾을 때 이런 기준으로 찾는 것 같습니다. 너무 둥글둥글한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요. 이 세상현실은 보기보다 험난합니다. 모난 구석이 없으면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없는 게 세상현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악한 영들과의 씨름입니다(엡6:12).
여호와 하나님은 어머니 리브가의 오지랖을 떠나지 못하던 야곱을 떼어내 멀리 타향으로 내모십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아들 야곱 사이에 영혼육의 고착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자식 간에 연합현상은 곧 타락입니다. 부모자식 간에는 유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도 아버지 야곱의 품에서 떼어내 머나먼 타국으로 내보내십니다.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지 않는 자식은 분명히 망할 자식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꼭 부모를 떠나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같이 있으면서도 부모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같이 있게 되면 아무래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겠지요.
어머니 한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 사무엘을 실로의 성소로 떼어 보내는 용단을 내립니다. 한나는 외아들 사무엘을 향한 감정의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사무엘의 장래를 위해 제사장 엘리에게로 보냈습니다(삼상2:11). 한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거스리면서 아들 사무엘을 당시 최고의 제사장이었던 엘리 문하로 떠나 보냅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떠나보내는 것, 이것이 더 큰 사랑이지요. 어머니 엘리사벳은 애지중지 늦둥이 세례요한을 빈들로 내어 보냅니다(눅1:80). 늦둥이 외아들 세례요한을 떼어 보내는 아픔이야 컸겠지만 어머니 엘리사벳은 자기 아들이 빈들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독대하는 훈련을 쌓도록 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최고의 지배자로 징기스칸을 꼽습니다. 징기스칸은 포근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일찌기 고아가 됐던 그는 허허벌판의 광야에서 생존비결을 터득했고 기동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그 기동력으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유럽전역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골프의 여왕 박세리도 지독한 훈련의 강을 건넜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담력을 키우기 위해 밤중에 공동묘지를 찾아가야 했고 투견장에서 피흘리며 싸우는 투견들을 구역질나도록 구경해야 했습니다.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칵테일'을 개발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19세의 벤처기업가 이상협은 원래 학교교육 부적응자였습니다. 그러나 풀어놓아 마음껏 다니게 한 부모의 자유로운 교육방식은 그의 창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던 것입니다.
2. 부부연합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 부부는 유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부부는 연합하는 존재입니다. 한몸의 연합은 영혼육의 연합입니다. 단지 육체의 연합이나 의견의 연합만 가지고 안됩니다. 부부는 영적인 연합, 신앙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을 공유해야 하고 신앙수준도 서로 일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일치되는 신앙수준에서 인생의 멍에를 매는 게 아무래도 좋습니다. 신앙수준에 차이가 심하면 멍에의 높이가 크게 기울기 때문에 피차 피곤하게 됩니다. 신앙수준에서 서로 차이가 심하면 갈등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남편은 영적인 것에, 신앙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려고 하고 아내는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려고 한다면 어찌 그 가정에 화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 돈과 시간과 정력을 신앙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고자 애쓰는데 아내는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이 투자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 가정이 든든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이 앞선 남편은 인내심으로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신앙이 뒤처진 아내는 열심히 따라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피차 피곤해 지고 서로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맙니다. 언제나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면 그 가정에는 생기가 넘치겠지요.
부부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생각하는 지성, 서로 느끼는 감성, 서로 책임지는 의지에 있어서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는 같이 생각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책임지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는 육체적으로도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건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건강과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부부는 서로를 위해 건강한 육체를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부에게는 딴 주머니가 없어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공유하고 나누고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모르는 돈주머니가 있으면 안됩니다. 비자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도박꾼이거나 알콜중독자일 경우에는 아내의 비자금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남편이라면 비록 남편을 위해서 하는 저축일지라도 비자금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제가 너무 꼬장꼬장한가요. 부부 사이에는 서로 모르는 생각 주머니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서로 딴 생각을 품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서로 모르는 감정 주머니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감정을 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물만 마셔야 합니다(잠5:15-19).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의 물만 마셔야 합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의 샘물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의 샘에서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의 물을 얻어 마시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오직 아내의 샘에서 인생의 갈증을 채워야 합니다. 남편은 그 어떤 다른 여자로부터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물이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로 흐르도록 방치해서도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사랑과 존경과 인정과 관심과 감정이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로 흘러가지 않도록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을 지키는 파숫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게 돼 있습니다(창3:16). 그런데 남편을 사모하고자 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아내는 다른 남자를 찾아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사모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흐르는 한방울의 물이라도 그 어떤 다른 남자와 더불어 마셔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독점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에서 한방울의 감정이라도 그 어떤 다른 남자에게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하기 나름입니다. 남편의 보살핌에 달려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샘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의 샘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살피고 가꾸어야 합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의 샘을 즐거워하며 만족하게 생각하며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동거하되 지식을 따라(벧전3:7) 동거함으로써 부부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함으로써 부부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보통 남자는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 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 명예를 얻으려는 욕구, 업적을 쌓으려는 욕구,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니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거나 절제시키는 데 있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여자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 타인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 듣고자 하는 욕구, 대화하고자 하는 욕구, 의논하고자 하는 욕구, 분위기를 찾고자 하는 욕구,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욕구,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니 남편은 이러한 아내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거나 절제시키는 데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지식적인 이해와 수용, 서로에 대한 양보와 상호접근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욕구 바구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지식을 따라 사랑하고 지식을 따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연합은 그저 되는 게 아닙니다. 계속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또한 부부는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남편이라야 남편의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아내라야 아내의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각각 자기 짐을 질 때 가정 공동체는 든든히 설 것입니다. 남편이 남편의 짐을 지지 않고 아내가 아내의 짐을 지지 않을 때 가정 공동체는 든든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일방적으로 혼자 짐을 져야 한다면 이미 그 가정은 병든 가정인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연합하되 건강하게 연합하고 성숙하게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존성에도 병적인 의존성이 있는가 하면 건강한 의존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잉꼬처럼 붙어 다닌다고 금슬이 좋고 건강한 관계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중년 부부가 살았습니다. 남편은 부인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퇴근하면 곧바로 귀가합니다. 가까운 시장에 장보려 가도 남편은 함께 갑니다. 장바구니도 들어줍니다. 다른 여자들이 너무 부러워하는 잉꼬부부부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인은 너무나 남편에게 의존해온 나머지 아주 가까운 데도 혼자 못갑니다. 남편을 대동하지 않으면 혼자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에도 남편하고 같이 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아내를 위해 남편은 정말로 최선을 다합니다. 아내를 도와주려고, 아내의 필요를 다 채워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최선이겠습니까. 아내는 점점 병약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정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건강한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나친 결탁은 부부관계를 병들게 합니다. 연합하되 서로 건강하게, 서로 성숙하게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남편과 건강한 아내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건강한 사람의 특성은 이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인간의 총체적인 성숙성을 뜻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현실감각이 뛰어납니다. 공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해결하고자 합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복잡다단해 지면서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지게 돼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어떤 문제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가정입니다. 부부싸움이 없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인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수없이 부부싸움을 하게 돼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부부싸움하지 않는 가정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되 건설적으로 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결국 건강한 남편과 건강한 아내만이 건강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납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동화됩니다. 대인관계가 좋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방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발적으로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습니다. 정서적인 반응이 풍부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민주적입니다. 창의적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꾸준하게 일관성을 갖고 일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람있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부부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연합하되 몸과 영혼이 연합해야 합니다. 연합하되 완전하게,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부부는 부모나 형제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좀 어설프고 부족하다 싶어도 서로 연합하는 가운데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부모효도니 형제우애니 하는 것 때문에 부부관계가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부모효도가 중요하고 형제우애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부부연합에 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결정을 해야 할 때 부부는 서로 연합하되 부모형제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조언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은 부부가 연합한 가운데 부부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신앙과 경제면에서도 부모형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부부간의 연합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건강한 부부관계에 대해 성경적인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는 건강하지 못한 부부관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심신이 병들었을 경우도 있고 다른 한쪽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인내하고 일방적으로 헌신해야만 가정이 지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님의 십자가 정신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건강하지 못한 가정보다는 건강한 가정이 더 많아지기를 원하시겠지요.
우리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건강한 나라를 만듭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부부가 만듭니다. 부부는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서로 연합하되 영혼육이 연합해야 하고 지식을 따라 연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가 서로 연합하고자 노력할 때 가정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연합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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