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기근을 만난 믿음의 가정
본문
저는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선생님 한분을 소개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합니다. 헬렌켈러과 설리반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헬렌켈러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태어난지 1년 7개월 되던날 갑자기 병을 앓은 헬렌겔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3중의 장애를 가진 고통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설리반이라는 교사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기지 시작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은 헬렌에게 머리가 되고, 눈이되고, 귀가되고, 입이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야기 하고 글씨도 쓸수 있게 했습니다.
헬렌이 10살되던때 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한손을 목에 대고 다른 손을 입술에 대어 입놀림을 보며 발성연습을 합니다. 헬렌은 말을 배우려고 하루종일 똑같은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하며 연습했습니다. 이때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에게 사랑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말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12살 때 농아학교에 들어가 2년동안 집중적으로 발성법과 독순법을 배웠습니다. 독순법이란 입술의 움직이는 모양으로 말의 뜻을 아는 법입니다.
헬렌은 퍼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타자기를 사용하여 편지를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헬렌은 처음으로 서리의 임금님이란 동화를 썼습니다. 16살 때 그는 생애 처음으로 600명이 모인 군중앞에서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헬렌은 20살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여학생부인 래드클리프대학에 입학합니다. 24살되던해 대학의 졸업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일을 해낸것입니다. 헬렌은 그 엄청난 불행속에서 연설과 글쓰기를 하면서 전세계에 장애와 고통을 가진자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던저주었습니다. 헬렌은 52살되던해 그래스고우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헬렌켈러가 미국의 어느 마을에서 했던 감동적인 연설을 소개합니다. "피부 빛깔이 까맣다고 마음도 까만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정신과 영혼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결코 피부 색깔 따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흑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손이고, 백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흑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피부색깔이 검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고, 피부색깔이 희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더 착한 일을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많이 받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귀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눈이 멀고 귀가 멀었어도 세상 사람들보다 한가지 더 보고 또 한가지 더 들을 줄 압니다. 그것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려고 이렇게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3중의 불행속에서도 온갖 역경을 헤치고 전세계에 불행하고 절망에 빠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배후에 설리번이라는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심각한 망막질환으로, 실명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 왔던 고통이 헬렌켈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를 키워낼수 있게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설리번에게 그런 고난이 없었던들 그 위대한 헬렌켈러는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은 그 누구에게나 싫은 것입니다. 아무도 고난을 초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잘 극복하고 고난뒤에 감추어진 축복들을 획득하는 자들에게서는 참으로 유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극복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가정이든 고통속에 휩싸이지 않는 가정은 없습니다. 문제는 가정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들을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심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상의 소굴이었던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했고,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할 때 아브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땅도 포기합니다. 친구들과도 헤어집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등지고 떠났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요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신앙은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막상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했던 가나안 땅에 왔을땐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키가 크고 성질이 고약한 가나안 족속들이 이미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기대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장미빛 낙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대했던 환상적인 장소는 쉽게 적응할수 없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겨우 정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에 자리잡기도 전에 그곳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기근이 든 약속의땅은 이제 먹고살기조차 힘들어 졌습니다. 갈수록 기근은 심해졌습니다. 이 심한 기근 때문에 이제 사느냐 죽느냐라는 극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아브람은 더 이상 고민할것도 주저할것도 없었습니다. 물이 있고 먹을것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물이 충분히 있었고,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속에 땅에는 없는 무서운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자고 아내와 약속을 합니다. 살기 위해 사용했던 그의 거짓말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더 큰 어려움 속으로 그를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애굽왕 바로가 청혼을 한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청입니다. 결국 눈뜨고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1. 우리가 먼저 살펴 볼 부분은 아브람이 기근을 만나자 약속의 자리를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삶을 시작했을 때 곧바로 풍요로운 환경의 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택이 반드시 현실적인 축복과 풍요로운 환경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약속의 땅에서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자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 따른 결과가 현실적인 고통입니다. 기근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자체에 회의가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회의에 빠지면 반드시 우리의 관심은 곧바로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으로 결국 결론내립니다. "그래 돈을 벌어야지 먹고 살지, 신앙생활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을 때 잘 할수 있는거야. 그래 돈을 벌자 어디에 돈이 많은가"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보통 기근이 아닙니다. 먹고 살수도 없는 형편에 이른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할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졌습니다. 이런상황에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굶어죽더라도 약속의 땅에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먹을것이 풍요로운 애굽으로 가야합니까
믿은 좋은 사람들은 그럽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약속의 땅은 떠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일일땐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상 자신의 일이되고 나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눈 앞에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찾습니다. 일단 내가 살아야 여호와 하나님도 있고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정말 죽을 각오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남아있었다면 굶어 죽었을까요, 아니면 살아남았을까요 분명히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것이 있습니다. 현실이 어려워도 여호와 하나님안에 있는 것이, 믿음의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애굽은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결코 아브람의 가정으로 볼 때 애굽은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더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정이 파탄날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이 그의 가정을 더 큰 어려움으로 몰아 넣은것입니다. 그 잘못된 선택은 신앙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더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게 되었나요 약속의 땅에서 기근이 올 때 여호와 하나님보다 주위 환경이 더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위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기근이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자에게 찾아오는 기근을 믿는 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을 만들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만날 때 순수해 집니다. 환란과 역경과 부딪칠 때 강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근을 허락하신 것은 아브람을 믿음이 조상 만들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주신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자는 현실의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합니다. 약속의땅에서 맞이하는 기근은 불행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을 여호와 하나님께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그 위대했던 아브람의 믿음이 현실앞에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믿음이 오늘이라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것일까요 과거에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는 주위 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약속만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약속에 땅에 들어와서 아브람은 그만 여호와 하나님을 본걱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대신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기근을 본것입니다. 기근을 보자 아브람은 그 기근 때문에 죽게될것이라고 본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게된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변한것입니다. 여러분 기근이 왔을 때 변절자가 되지 않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브람이 거짓말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거짓말입니다. 아브람이 거짓말을 했는데 벌을 받기 는커녕 오히려 재산이 늘고 아무것도 모르고 옂를 탐낸 바로는 재앙을 맞았고 결과적으로 재산을 잃게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거짓말을 해도 결과적으로 유익을 얻으며 불신자는 벌을 받는 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선한 거짓말은 괜챦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까요
아브람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애굽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라가 아닌 세상의 삶의 방식은 거짓말이 필수입니다. 이 세상살면서 거짓말하지 않고 살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남을 속이지 않으면 속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려면 거짓말은 필수입니다. 어쩔수 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아비는 거짓말쟁이 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애굽에는 아무도 자기를 지켜줄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스스로 지킬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속여서라도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닥친 기근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워 놓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되자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그에게는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지켜줄자 없는 애굽에서 그가 죽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입니다. 그 집착은 이기적인 자기보호 본능을 발동시키고 결국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방식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거짓말은 하는데 반은 진짜입니다. 새까만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실 사래와 아브람은 이복형제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완전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를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사람들은 거짓말을 식은 죽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살려고 하니까 어쩔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는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러니까 반쪽은 진실을 말하거나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앙양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거나 무슨 거래를 하게 되면 거래가 잘 안됩니다. 저쪽사람은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데 우리는참말만 하면 장사가 됩니까 그러니까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말을 택합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많이 쓰면서 자위합니다. 어쩔수 없다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아브람의 반쪽 거짓말하는 태도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반쪽 거짓말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반쪽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목숨이 상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생명의 근원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는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미래에 다가온 엄청난 축복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은 거짓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더 꼬인것입니다. 결국 아내를 빼앗기게 될 상황에 빠지고 만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의 한계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은 결혼의 파괴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요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결혼관계를 깨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이 더 큰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거짓말이 아들 이삭에게 대물립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 받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버지의 거짓말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에는 가정 환경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정 환경가운데 부모의 환경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상처가 신화가 되어 아들에게 대물림되기 십상입니다.
이제 막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성수는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그 습관에 익숙해진 성곤은 문득 자신이 누구가를 닮아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는 공통된 점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성곤은 방학때 낮 한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몹시 화를 냈다. "사람이 어떻게 낮 1시까지 잠을 잘수 있단 말이냐"
성수는 왜 사람들이 늦잠을 잘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수는 아침 6시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잠을 깬다. 다시 잠들려고 애써보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재를 옷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못마땅해 한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수는 담배를 피우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 보니 무릎위에 담배재가 잔뜩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성수는 "아 내가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아 내가 정말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왜 난 그때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가"성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성수는 이제 노년의 아버지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다정하고 섬세하고 현명한 성격을 물려받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말한다. "그런데 왜 내 아들놈은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지"
부모의 모습은 자식이 닮습니다.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점도 그대로 닮습니다. 상처는 상처받은 세대로 끝나야 합니다. 한 시대의 아픔은 그 시대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대물림하지 맙시다. 불신앙을 대물림하지 맙시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믿음위에 굳건하게 섭시다. 기근과 고통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아브람을 건져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을 믿으십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지켜주실것입니다.
헬렌켈러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태어난지 1년 7개월 되던날 갑자기 병을 앓은 헬렌겔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3중의 장애를 가진 고통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설리반이라는 교사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기지 시작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은 헬렌에게 머리가 되고, 눈이되고, 귀가되고, 입이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야기 하고 글씨도 쓸수 있게 했습니다.
헬렌이 10살되던때 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한손을 목에 대고 다른 손을 입술에 대어 입놀림을 보며 발성연습을 합니다. 헬렌은 말을 배우려고 하루종일 똑같은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하며 연습했습니다. 이때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에게 사랑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말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12살 때 농아학교에 들어가 2년동안 집중적으로 발성법과 독순법을 배웠습니다. 독순법이란 입술의 움직이는 모양으로 말의 뜻을 아는 법입니다.
헬렌은 퍼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타자기를 사용하여 편지를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헬렌은 처음으로 서리의 임금님이란 동화를 썼습니다. 16살 때 그는 생애 처음으로 600명이 모인 군중앞에서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헬렌은 20살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여학생부인 래드클리프대학에 입학합니다. 24살되던해 대학의 졸업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일을 해낸것입니다. 헬렌은 그 엄청난 불행속에서 연설과 글쓰기를 하면서 전세계에 장애와 고통을 가진자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던저주었습니다. 헬렌은 52살되던해 그래스고우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헬렌켈러가 미국의 어느 마을에서 했던 감동적인 연설을 소개합니다. "피부 빛깔이 까맣다고 마음도 까만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정신과 영혼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결코 피부 색깔 따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흑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손이고, 백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흑인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피부색깔이 검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고, 피부색깔이 희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더 착한 일을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많이 받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귀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눈이 멀고 귀가 멀었어도 세상 사람들보다 한가지 더 보고 또 한가지 더 들을 줄 압니다. 그것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에 옮기려고 이렇게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3중의 불행속에서도 온갖 역경을 헤치고 전세계에 불행하고 절망에 빠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배후에 설리번이라는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심각한 망막질환으로, 실명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 왔던 고통이 헬렌켈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를 키워낼수 있게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설리번에게 그런 고난이 없었던들 그 위대한 헬렌켈러는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은 그 누구에게나 싫은 것입니다. 아무도 고난을 초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잘 극복하고 고난뒤에 감추어진 축복들을 획득하는 자들에게서는 참으로 유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극복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가정이든 고통속에 휩싸이지 않는 가정은 없습니다. 문제는 가정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들을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심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우상의 소굴이었던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했고,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할 때 아브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땅도 포기합니다. 친구들과도 헤어집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등지고 떠났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요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신앙은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막상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했던 가나안 땅에 왔을땐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키가 크고 성질이 고약한 가나안 족속들이 이미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기대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장미빛 낙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대했던 환상적인 장소는 쉽게 적응할수 없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겨우 정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에 자리잡기도 전에 그곳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기근이 든 약속의땅은 이제 먹고살기조차 힘들어 졌습니다. 갈수록 기근은 심해졌습니다. 이 심한 기근 때문에 이제 사느냐 죽느냐라는 극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아브람은 더 이상 고민할것도 주저할것도 없었습니다. 물이 있고 먹을것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물이 충분히 있었고,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속에 땅에는 없는 무서운 위험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자고 아내와 약속을 합니다. 살기 위해 사용했던 그의 거짓말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더 큰 어려움 속으로 그를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애굽왕 바로가 청혼을 한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청입니다. 결국 눈뜨고 자기 아내를 빼앗기는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1. 우리가 먼저 살펴 볼 부분은 아브람이 기근을 만나자 약속의 자리를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삶을 시작했을 때 곧바로 풍요로운 환경의 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택이 반드시 현실적인 축복과 풍요로운 환경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약속의 땅에서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자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 따른 결과가 현실적인 고통입니다. 기근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자체에 회의가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회의에 빠지면 반드시 우리의 관심은 곧바로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으로 결국 결론내립니다. "그래 돈을 벌어야지 먹고 살지, 신앙생활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을 때 잘 할수 있는거야. 그래 돈을 벌자 어디에 돈이 많은가"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보통 기근이 아닙니다. 먹고 살수도 없는 형편에 이른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할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졌습니다. 이런상황에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까 굶어죽더라도 약속의 땅에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먹을것이 풍요로운 애굽으로 가야합니까
믿은 좋은 사람들은 그럽니다. 굶어 죽을지언정 약속의 땅은 떠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일일땐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상 자신의 일이되고 나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눈 앞에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 나름대로 살길을 찾습니다. 일단 내가 살아야 여호와 하나님도 있고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정말 죽을 각오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남아있었다면 굶어 죽었을까요, 아니면 살아남았을까요 분명히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것이 있습니다. 현실이 어려워도 여호와 하나님안에 있는 것이, 믿음의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애굽은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결코 아브람의 가정으로 볼 때 애굽은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더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정이 파탄날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이 그의 가정을 더 큰 어려움으로 몰아 넣은것입니다. 그 잘못된 선택은 신앙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더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게 되었나요 약속의 땅에서 기근이 올 때 여호와 하나님보다 주위 환경이 더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위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기근이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자에게 찾아오는 기근을 믿는 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을 만들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만날 때 순수해 집니다. 환란과 역경과 부딪칠 때 강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근을 허락하신 것은 아브람을 믿음이 조상 만들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주신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자는 현실의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합니다. 약속의땅에서 맞이하는 기근은 불행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을 여호와 하나님께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그 위대했던 아브람의 믿음이 현실앞에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믿음이 오늘이라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것일까요 과거에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는 주위 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약속만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약속에 땅에 들어와서 아브람은 그만 여호와 하나님을 본걱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대신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기근을 본것입니다. 기근을 보자 아브람은 그 기근 때문에 죽게될것이라고 본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게된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변한것입니다. 여러분 기근이 왔을 때 변절자가 되지 않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브람이 거짓말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거짓말입니다. 아브람이 거짓말을 했는데 벌을 받기 는커녕 오히려 재산이 늘고 아무것도 모르고 옂를 탐낸 바로는 재앙을 맞았고 결과적으로 재산을 잃게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거짓말을 해도 결과적으로 유익을 얻으며 불신자는 벌을 받는 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선한 거짓말은 괜챦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까요
아브람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애굽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라가 아닌 세상의 삶의 방식은 거짓말이 필수입니다. 이 세상살면서 거짓말하지 않고 살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남을 속이지 않으면 속는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려면 거짓말은 필수입니다. 어쩔수 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아비는 거짓말쟁이 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애굽에는 아무도 자기를 지켜줄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스스로 지킬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속여서라도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닥친 기근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워 놓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되자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그에게는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지켜줄자 없는 애굽에서 그가 죽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입니다. 그 집착은 이기적인 자기보호 본능을 발동시키고 결국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방식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거짓말은 하는데 반은 진짜입니다. 새까만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실 사래와 아브람은 이복형제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완전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를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사람들은 거짓말을 식은 죽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살려고 하니까 어쩔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는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러니까 반쪽은 진실을 말하거나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앙양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거나 무슨 거래를 하게 되면 거래가 잘 안됩니다. 저쪽사람은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데 우리는참말만 하면 장사가 됩니까 그러니까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말을 택합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많이 쓰면서 자위합니다. 어쩔수 없다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아브람의 반쪽 거짓말하는 태도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반쪽 거짓말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반쪽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목숨이 상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생명의 근원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는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미래에 다가온 엄청난 축복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은 거짓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더 꼬인것입니다. 결국 아내를 빼앗기게 될 상황에 빠지고 만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의 한계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은 결혼의 파괴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설계요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결혼관계를 깨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이 더 큰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거짓말이 아들 이삭에게 대물립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 받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버지의 거짓말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에는 가정 환경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정 환경가운데 부모의 환경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상처가 신화가 되어 아들에게 대물림되기 십상입니다.
이제 막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성수는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그 습관에 익숙해진 성곤은 문득 자신이 누구가를 닮아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는 공통된 점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성곤은 방학때 낮 한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몹시 화를 냈다. "사람이 어떻게 낮 1시까지 잠을 잘수 있단 말이냐"
성수는 왜 사람들이 늦잠을 잘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수는 아침 6시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잠을 깬다. 다시 잠들려고 애써보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재를 옷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못마땅해 한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수는 담배를 피우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 보니 무릎위에 담배재가 잔뜩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성수는 "아 내가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아 내가 정말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왜 난 그때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가"성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성수는 이제 노년의 아버지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다정하고 섬세하고 현명한 성격을 물려받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말한다. "그런데 왜 내 아들놈은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지"
부모의 모습은 자식이 닮습니다.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점도 그대로 닮습니다. 상처는 상처받은 세대로 끝나야 합니다. 한 시대의 아픔은 그 시대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대물림하지 맙시다. 불신앙을 대물림하지 맙시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믿음위에 굳건하게 섭시다. 기근과 고통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아브람을 건져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을 믿으십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지켜주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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