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데라 가정의 위기
본문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데라입니다. 27절에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로 시작해서, 32절에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데라의 가정, 그 가정이 당한 문제, 고난들을 소개하며, 데라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데라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부족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비였습니다. 데라 가문의 족보는 10장 1절에 나오는 '노아의 족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0장과 11장은 커다란 족보 이야기인데, 그것은 노아에서부터 시작해서 데라에 이르는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노아의 후손, 셈의 후예, 곧 믿음의 후예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을 두었습니다.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한번도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뜨겁지 못했습니다. 데라의 신앙이란 그저 '우리 조상이 믿었다'는 것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상이 물려준 신앙을 팔아먹고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신앙의 가문에 가장 큰 유산은 믿음입니다. 셈의 후예는 신앙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데라 가정에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위기가 그 가정의 모든 위기의 시작이었고, 원인이었습니다.
데라가 위기를 만난 곳이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 비옥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풍요의 도시였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세련된 건축물들이 있었던 건축의 도시였고, 최신 수학적 도판(圖板)들, 각종 사전들, 그리고 교육용 서적들이 발견되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달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큰 사원을 지닌 우상숭배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갈대아인'이란 말이 히브리어 발음으로 '카스다인'이라는 말인데 '점성가', '마술사'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서 4장 7절에서 보면 이 말을 "갈대아 술사"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우르'라는 말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우르 라는 말도 '빛나다', '불사르다'는 뜻을 지닌 '오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우르'는 밤에 빛나는 달의 신을 의미합니다.
데라는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지만, 그 사회의 이교적인 문화, 환경에 물들어 믿음을 저버리고 함께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라가 신앙을 잊어버리자 그 가정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시험, 고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데라 가정의 위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데라 가정의 위기는 질서가 깨진 것이었습니다.
본문 27절에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데라의 장남은 아브람이고, 둘째는 나홀입니다. 그리고 하란은 제일 막내입니다. 그런데 제일 막내 하란이 먼저 장가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형들 둘을 제치고 막내가 먼저 아들을 낳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나중에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을 때, 그의 아내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란의 아내는 누구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식 결혼을 하기도 전에 아들을 낳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든 데라 가정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두 형을 제치고 막내가 아들을 낳아 들어왔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순서기 뒤바뀌고 질서가 깨졌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데라 가정의 두 번째 위기는 아들 하란의 죽음입니다.
28절에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형들보다 먼저 아들을 낳아 들어왔던 '하란'이 아버지 데라 면전에서 죽은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은 '면전에서'라는 말입니다. 아버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죽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잘났든 못났든 형들보다도 먼저 손자를 안겨 주었던 그 아들이 아버지 보는 앞에서 먼저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다는 것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데라는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막내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란 데라는 서둘러 그 형들을 장가들입니다. 29절에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알 수 없지만, 원어로 보면, 이 표현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는 주어가 복수이면, 반드시 복수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라는 말은 주어가 둘인데, 동사는 단수형을 사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결혼식을 한번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입니다. 데라가 막내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서 서둘러 두 아들을 장가들였는데, 둘을 한번에, 동시에 장가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둘러 장가들였는데, 여기에 또 다른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데라 가정의 세 번째 위기가 되었습니다.
30절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사래는 아이 못 낳는 여인이었습니다. 데라 가정의 불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풍요의 도시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데라는 경제적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자식 농사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풍요 속에서 가난을 경험하고, 수치를 당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꾼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수는 그 가문의 힘과 비례했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있던 아들도 죽었습니다. 장남은 장가들었는데, 그 며느리는 아이도 낳지 못합니다. 경제적 손실이고, 가문의 힘의 상실이었습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훈련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데라 가정의 문제도 그 가정을 훈련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데라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데라가 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을 떠난 것은 그 가정에 닥친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가정에 위기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성서는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는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의 후손들은 모세의 인도로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했을 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들은 고향을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그들을 떠나도록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떠날 때, 위기는 다시 기회가 됩니다.
데라는 떠났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떠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그대로 안주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떠나는 방향도 잘 잡았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었습니다. 가나안이 목표입니다. 그는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그곳은 믿음의 사람에게 약속의 땅으로 허락하신 곳입니다.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갔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담대하게 보고하던 여호수아가 들어간 땅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강해서 들어 갈 수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낙심하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데라는 지금 가정에 위기가 닥치자 본향을 향해, 믿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데라는 지금까지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다 팔아먹고 산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정의 위기는 잘못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믿음을 회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떻습니까 위기가 있습니까 문제나 고난, 시험은 없습니까
위기는 기회입니다. 문제에는 언제나 답이 있습니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후에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도 있지만, 시험을 이기면 더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지만, 그것을 이김으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것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들어가고, 사자 굴에 들어가는 고난과 시험을 받았지만, 그것을 이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데라도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신앙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위기가 기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 백 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왜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 떠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회복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죽고 말았을까요
31절 마지막 부분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는데,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향해 출발했는데,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데라의 위기 극복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다' 거류하였다는 말은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던 데라가 중도에서 여행을 포기하고 하란에 머물러 살았다는 말입니다.
데라는 믿음의 순례를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나 하란은 모두 달의 신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결단을 하고 고향을 떠났는데, 하란이라는 곳에 와보니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고향의 문화 풍습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만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례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여러분!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순례자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푯대를 향해 똑바로 달려야합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실패에 연연하면, 신앙을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앞을 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똑바로 직시해야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백열전등을 발명할 때, 전구의 원리를 발견한 다음에도 무려 11만 번 실험을 한 끝에 완성했습니다. 콩, 오이, 사과, 옥수수, 감자, 복숭아, 그리고 수많은 화초의 개량종을 낸 위대한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도 실험 중 난관에 봉착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험이 성공을 거둘 때까지 무려 6천 번의 실험을 하였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도 수백 번의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도 계속 하늘을 날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인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말 수는 없습니다. 깨어지고 부서져 한 조각 심장만 남아도 전진하고 또 전전해야합니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 간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목표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떠났는데, 그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데라는 중도에 포기한 미완성의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데라가 머물렀던 하란은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하란은 바벨론, 지중해와 팔레스틴, 애굽 등으로 통하는 교차로였습니다. '하란'이라는 지명의 뜻도 '교차로'입니다. 교차로는 다음 길의 방향을 정하는 곳이지 눌러 앉아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하란에 머물러 버린 데라! 그는 교차로의 머문 신앙인입니다. 본향을 향해 떠났으나 본향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 신앙인입니다.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란이 있습니다. 그곳은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입니다. 가장 큰 위기는 고난이나 시련이 아니라 현실에, 습관과 타성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입니다. 그런 위기를 넘어서야 합니다. 교차로에서 방향을 재 설정 하고 다시 목표를 굳건히 하고 달려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그 목표를 향해 달려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목표만을 위해 달려나갈 때, 모든 유혹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승리자에게 상급이 있습니다. 끝까지 목표에 도달한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면류관을 받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왜 '하란'에서 머물고 말았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나안에 반드시 도착해야한다'는 절박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정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긴 떠났지만, 그리고 가나안을 목표로 삼긴 삼았지만, 반드시 가나안이어야 한다.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살길이고,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고, 못 도착해도 그만이다 고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내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단과 결심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그 가정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분명 믿음의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도 본향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영적 가나안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확신이 있습니까 이 길이 살길이라고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체험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까 사
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온갖 핍박과 고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교차로가 나오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흔들립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한 신앙 체험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도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지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데라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부족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람, 나홀, 하란의 아비였습니다. 데라 가문의 족보는 10장 1절에 나오는 '노아의 족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0장과 11장은 커다란 족보 이야기인데, 그것은 노아에서부터 시작해서 데라에 이르는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노아의 후손, 셈의 후예, 곧 믿음의 후예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을 두었습니다.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한번도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뜨겁지 못했습니다. 데라의 신앙이란 그저 '우리 조상이 믿었다'는 것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상이 물려준 신앙을 팔아먹고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신앙의 가문에 가장 큰 유산은 믿음입니다. 셈의 후예는 신앙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데라 가정에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위기가 그 가정의 모든 위기의 시작이었고, 원인이었습니다.
데라가 위기를 만난 곳이 "갈대아인의 우르"라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 비옥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풍요의 도시였고,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세련된 건축물들이 있었던 건축의 도시였고, 최신 수학적 도판(圖板)들, 각종 사전들, 그리고 교육용 서적들이 발견되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달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큰 사원을 지닌 우상숭배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갈대아인'이란 말이 히브리어 발음으로 '카스다인'이라는 말인데 '점성가', '마술사'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서 4장 7절에서 보면 이 말을 "갈대아 술사"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우르'라는 말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우르 라는 말도 '빛나다', '불사르다'는 뜻을 지닌 '오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우르'는 밤에 빛나는 달의 신을 의미합니다.
데라는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지만, 그 사회의 이교적인 문화, 환경에 물들어 믿음을 저버리고 함께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라가 신앙을 잊어버리자 그 가정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시험, 고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데라 가정의 위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데라 가정의 위기는 질서가 깨진 것이었습니다.
본문 27절에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데라의 장남은 아브람이고, 둘째는 나홀입니다. 그리고 하란은 제일 막내입니다. 그런데 제일 막내 하란이 먼저 장가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형들 둘을 제치고 막내가 먼저 아들을 낳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나중에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을 때, 그의 아내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란의 아내는 누구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식 결혼을 하기도 전에 아들을 낳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든 데라 가정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두 형을 제치고 막내가 아들을 낳아 들어왔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순서기 뒤바뀌고 질서가 깨졌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데라 가정의 두 번째 위기는 아들 하란의 죽음입니다.
28절에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형들보다 먼저 아들을 낳아 들어왔던 '하란'이 아버지 데라 면전에서 죽은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은 '면전에서'라는 말입니다. 아버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죽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잘났든 못났든 형들보다도 먼저 손자를 안겨 주었던 그 아들이 아버지 보는 앞에서 먼저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다는 것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데라는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막내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란 데라는 서둘러 그 형들을 장가들입니다. 29절에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알 수 없지만, 원어로 보면, 이 표현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는 주어가 복수이면, 반드시 복수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라는 말은 주어가 둘인데, 동사는 단수형을 사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결혼식을 한번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입니다. 데라가 막내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서 서둘러 두 아들을 장가들였는데, 둘을 한번에, 동시에 장가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둘러 장가들였는데, 여기에 또 다른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데라 가정의 세 번째 위기가 되었습니다.
30절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사래는 아이 못 낳는 여인이었습니다. 데라 가정의 불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풍요의 도시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데라는 경제적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자식 농사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풍요 속에서 가난을 경험하고, 수치를 당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꾼이 많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수는 그 가문의 힘과 비례했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있던 아들도 죽었습니다. 장남은 장가들었는데, 그 며느리는 아이도 낳지 못합니다. 경제적 손실이고, 가문의 힘의 상실이었습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훈련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데라 가정의 문제도 그 가정을 훈련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데라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데라가 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을 떠난 것은 그 가정에 닥친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가정에 위기가 그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성서는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는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의 후손들은 모세의 인도로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했을 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들은 고향을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그들을 떠나도록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떠날 때, 위기는 다시 기회가 됩니다.
데라는 떠났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떠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그대로 안주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떠나는 방향도 잘 잡았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었습니다. 가나안이 목표입니다. 그는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그곳은 믿음의 사람에게 약속의 땅으로 허락하신 곳입니다.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갔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담대하게 보고하던 여호수아가 들어간 땅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강해서 들어 갈 수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낙심하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데라는 지금 가정에 위기가 닥치자 본향을 향해, 믿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데라는 지금까지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다 팔아먹고 산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정의 위기는 잘못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믿음을 회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떻습니까 위기가 있습니까 문제나 고난, 시험은 없습니까
위기는 기회입니다. 문제에는 언제나 답이 있습니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후에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도 있지만, 시험을 이기면 더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지만, 그것을 이김으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것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들어가고, 사자 굴에 들어가는 고난과 시험을 받았지만, 그것을 이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데라도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신앙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위기가 기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 백 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왜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 떠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회복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죽고 말았을까요
31절 마지막 부분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는데,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향해 출발했는데,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데라의 위기 극복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다' 거류하였다는 말은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던 데라가 중도에서 여행을 포기하고 하란에 머물러 살았다는 말입니다.
데라는 믿음의 순례를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나 하란은 모두 달의 신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결단을 하고 고향을 떠났는데, 하란이라는 곳에 와보니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고향의 문화 풍습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만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례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여러분!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순례자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푯대를 향해 똑바로 달려야합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실패에 연연하면, 신앙을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앞을 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똑바로 직시해야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백열전등을 발명할 때, 전구의 원리를 발견한 다음에도 무려 11만 번 실험을 한 끝에 완성했습니다. 콩, 오이, 사과, 옥수수, 감자, 복숭아, 그리고 수많은 화초의 개량종을 낸 위대한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도 실험 중 난관에 봉착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험이 성공을 거둘 때까지 무려 6천 번의 실험을 하였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도 수백 번의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도 계속 하늘을 날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인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말 수는 없습니다. 깨어지고 부서져 한 조각 심장만 남아도 전진하고 또 전전해야합니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 간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목표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떠났는데, 그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데라는 중도에 포기한 미완성의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데라가 머물렀던 하란은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하란은 바벨론, 지중해와 팔레스틴, 애굽 등으로 통하는 교차로였습니다. '하란'이라는 지명의 뜻도 '교차로'입니다. 교차로는 다음 길의 방향을 정하는 곳이지 눌러 앉아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하란에 머물러 버린 데라! 그는 교차로의 머문 신앙인입니다. 본향을 향해 떠났으나 본향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 신앙인입니다.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란이 있습니다. 그곳은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입니다. 가장 큰 위기는 고난이나 시련이 아니라 현실에, 습관과 타성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입니다. 그런 위기를 넘어서야 합니다. 교차로에서 방향을 재 설정 하고 다시 목표를 굳건히 하고 달려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그 목표를 향해 달려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는 목표만을 위해 달려나갈 때, 모든 유혹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승리자에게 상급이 있습니다. 끝까지 목표에 도달한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면류관을 받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데라가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왜 '하란'에서 머물고 말았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나안에 반드시 도착해야한다'는 절박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정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긴 떠났지만, 그리고 가나안을 목표로 삼긴 삼았지만, 반드시 가나안이어야 한다.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살길이고,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고, 못 도착해도 그만이다 고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내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단과 결심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그 가정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분명 믿음의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도 본향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영적 가나안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확신이 있습니까 이 길이 살길이라고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체험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까 사
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온갖 핍박과 고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교차로가 나오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흔들립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한 신앙 체험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도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지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