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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불행한 야곱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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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행복을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어려서는 더욱 모릅니다. 자기에게 아무 일만 없으면 행복인 줄 압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일단 결혼하면 행복이란 것을 조금 실감하게 되고 행복을 특별히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과정에서도 행복이란 개념이 자꾸만 변합니다.
어려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움을 하지 않고 잘 살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아무런 걱정이 없다면 그것이 행복이란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즐겁게 지냅니다.
남편은 일찍 퇴근하여 아내와 같이 식사하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아껴 주고 같이 있는 것으로도 만족합니다.
이때는 부부싸움이 없습니다.
남편이 하라고 하는데로 하고, 아내가 좋아하고 원하니까 합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고 남편의 직장일이 복잡해져 갑니다.
아내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몸이 피곤합니다.
수입은 고정되어 가는데 지출은 많아집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몸의 피로가 쌓이고 사회적인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때는 서로가 짜증이 납니다. 그 결과 부부의 충돌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이때는 신혼의 행복과는 인생개념이 달라집니다.
부부가 중년이 됩니다. 이제는 인생의 경험이 풍부해졌습니다.
그런데 풍부한 것만큼 생활의 여유가 없습니다.
남편이 주는 돈은 부족해서 아내가 직장생활을 합니다.
자식들은 점점 말을 않듣고 속을 썩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 행복이란 개념이 바뀝니다.
그러다가 이웃의 다른 사람의 생활과 비교해 봅니다.
그러다가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행복하고, 그렇지를 못하면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노년이 되어서 인생의 황혼을 바라볼 때는 행복이란 정의를 새롭게 내립니다.
그것은 돈이나 세상의 즐거움과 명예 등 외적인 어떤 환경적인 조건이 행복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만
족과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이며,
반면에 아무리 나쁘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어도 마음에 감사와 평화가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처럼,
행복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해질 수 있고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만족과 감사를 갖고 사는 사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불만과 비교의식을 갖고 사는 가정이 불행한 것입니다.
양주동씨의 국어사전을 보면 행복의 정의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다 많이 더 좋은 것을 갖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웹스터 영어사전에는 행복을 좀 더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족'이나 '기쁨'이란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돈이나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나쁘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세상의 모든 핍박과 고난과 질병과 고독함이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어디서든지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을 보십시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라헬이 행복을 느낍니까
남편이 그를 사랑해서 무려 14년간 돈을 받지 않고 봉사를 하고 결혼할 정도로 끔찍하게
사랑을 하였는데 그가 행복하다고 고백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자 항상 불만이요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괴롭히고 화가 나게 합니다.
라헬은 스스로 죽어버리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를 불행한 여자로 평가합니다.
반면에 자식을 많이 낳은 레아가 행복합니까
고대사회는 아들을 낳아야했습니다.
아들은 낳지 못한 여자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라헬이 아들을 하나도 낳지 못할 때 무려 네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더구나 야곱은 아들이 갖다 준 조그마한 합환채란 식물을 통하여 싸움을 하고 투기를
하는 두 명의 아내 사이에서 줏대없이 왔다 갔다를 했습니다.
그리고 무능한 자신을 탓하면서 갈등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아내들의 몸종까지 아내로 삼으므로 가정의 질서는 파괴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아들을 낳는 일종의 경연대회를 합니다.
여인들의 투기로 그는 심신이 매우 피곤합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것이 사는 것인가", "나의 가정이 행복한가" 하고 많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아니올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행복하고 은혜스러워야 합니다만 야곱의 가정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여인들의 투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11을 보면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도 내가 자족
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자족하기를 배워야 행복합니다.
자족이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족하기를 배운다고 말했을 때는 고난이 가중될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자족하기를 배움으로 그는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할 때 자족을 배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레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두었지만
자족하지를 못했고,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으로
자족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투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1절을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지도 못한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을 투기하였고,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은 것을 투기합니다.
투기하는 가정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아가서 8:6을 보면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환난과 핍박이 있고 죽음의 고통스러움이 있어도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러나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뜨겁게 일어나서 자신과 남을 죽입니다.
여기 나오는 '투기'란 질투심에 불타는 여인의 울그락불그락하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라헬의 모습입니다.
레아는 일찌감치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키우는 재미로 삽니다.
그러나 라헬은 자기가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아들을 낳고 사는 언니 레아만 투기합니다.
그리고 야곱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화를 내면서 투기합니다.
어찌 이러한 가정이 행복하겠습니다.
여기 남편된 여러분. 직장일에 피곤하고 지쳤을 때 아내가 웃는 얼굴로 대해도
지치고 피곤한 일이 쉽게 풀어지지 않는데, 집에 오자마자 얼굴색이 울그락붉으락하면서
표독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대한다면 행복하겠습니까
이럴 때는 남편을 대하는 말투가 가시가 돋고 거칠게 됩니다.
이런 아내를 둔 남편이 행복하다면 그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일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상냥하고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을 원합니다.
반면에 아내는 남편이 항상 정직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아내의 사소한 일을 덮어주고
이끌어 주는 그런 남편을 원합니다.
남편이 잘못했는데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자존심 때문에 아내에게 큰소리를 상처를 주고 괴롭힙니다.
그리고 끝가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아내는 자기의 허물과 실수를 남편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니 항상 갈등과 싸움이요 행복은 이미 멀리 도망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그런 것입니다.
레아는 자기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고 투기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야곱은 아내의 투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투기와 몰이해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탄으로 몰고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라헬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자기 남편이 어떻게 출생하였는가를
조금만 생각하였던들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레아를 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시어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시아버지인 이삭이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을 생각하였다면 그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5:21을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남편이 어떻게 출생하게 되었습니까
생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합심하여 기도하고 낳지를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나도 기도하여 아들을 낳겠다고 결심하고 기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언니를 투기하며 남편을 괴롭힙니다.
먼 훗날 한나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첩인 부닌나가 그를 업신여기고 괴롭히자
여호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결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10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무엘을 낳지 않았습니까
같은 환경에 있을 때 누구는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누구는 투기와 원망으로
집안의 행복을 깨버렸습니다.
투기하는 마음 때문에 라헬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투기 때문에 남편을 괴롭혔고,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하여 버렸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여인들의 부당한 경쟁과 질투와 투기로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2. 잘못된 방법이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의 질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대로 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급하고 시간이 절박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선하신 질서를 파괴해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 어떤 요구를 합니까
3절을 보면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고
하였습니다.
투기는 결국 잘못되고 사악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레아를 투기하는 라헬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자기의 몸종인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아들을 낳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시할머니인 사라가 믿음과 인내가 없을 때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내어 준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들 때문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또한 자기의 몸종인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 때문에 사라가 얼마나 많이
괴롭힘을 당하고 울었습니까
단지 아들을 낳기만 하면 행복한 줄 알았던 자기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가정은 불행한 가정으로 전락되어 버렸고,
사이좋던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생겼습니다.
잘못된 방법은 불행을 가져오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라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야곱은 그의 몸종인 빌하와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또다른 죄를 짓습니다.
결국 빌하를 통하여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단과 납달리입니다.
단은 '심판관'이란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니와 나 사이에 심판관이 되어 주셔서 몸종인 빌하를 통하여
네게 아들을 주셨으므로 나의 억울함이 이제 풀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납달리는 '씨름'이란 뜻으로 내가 언니와 아들 낳기 위한 경쟁에서
크게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네명의 아들을 낳은 언니인 레아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우리 같으면 축하하고 잘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네가 직접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몸종을 통하여 아들을 갖게 되었으니 잘했다"고
따듯하게 격려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9절을 보면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레아는 자기의 동생이 몸종을 통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자 자기도 몸종인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다른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레아는 이미 아들이 네 명이나 있었으므로 이러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시기와 투기로 얼룩진 자매는 아들낳기 위한 치졸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도 그러냐 나도 할 수 있다", "너만 몸종을 통하여 아들을 낳느냐
나도 몸종을 통하여 얼마든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미련하고 치졸하고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탐욕어린 속임수로 중혼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라헬의 투기와 사악한 경쟁으로 거듭되는 중혼을 또다시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레아의 부당한 경쟁으로 야곱은 또다시 장가를 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용서와 긍휼을 베푸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구속사적인 역사를 이어갑니다만, 야곱은 여인들의 잘못된 방법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레아의 몸종인 실바를 통하여 갓과 아셀이란 아들을 얻었습니다.
갓은 행복이란 뜻입니다.
나도 아들을 낳았으니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이 그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아셀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은 그것이 아닌데도, 투기하고 질투하는 어리석은 여인들은
단지 눈앞에 있는 아들만 보고 행복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방법과 경쟁심, 투기와 질투는 사악한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의 행복과 질서를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3. 성적인 문란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한 두 자매의 경쟁과 투기는 몸종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이 맥추때 들에서 합환채를 꺾어서 어머니에게 드립니다.
14절을 보면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
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합환채는 당시 널리 쓰였던 임신 촉진제이며 성적 흥분제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자매는 이제 합환채란 식물을 놓고 남편의 사랑을 흥정하는 추태를 벌립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지 못한 자기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하자,
레아는 "네가 내 남편을 빼앗았는데 이제는 합환채까지 빼앗느냐"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라헬은 언니의 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합환채를 자기가 먹어야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흥정합니다.
"언니가 나에게 합환채를 주면 오늘밤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할 것이니
그 합환채를 나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동생에게 합환채를 주고 야곱과 동침을 합니다.
15절을 보면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합환채를 갖는 조건으로 그를 떠나 본부인인 레아와 동침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야곱의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일부일처제로 제정하신 신성한 가정의 제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의 가정이 성적으로 문란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그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하여 서로 흥정하는 두 자매의 모습에서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타락한 야곱의 가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영향은 훗날 자녀들에게 나타납니다.
르우벤은 서모인 빌하와 통간하는 죄를 저질렀고,
유다는 자부 다말과 불륜의 관계를 갖습니다.
이러한 불륜의 행위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가정에서 자식들에게 나타나는
죄의 유전성입니다.
매를 맞고 자란 아이들은 결혼하여 자기의 자식을 더 잘 때립니다.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결혼하여 이혼하는 확률이 높습니다.
그것은 죄의 유전성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님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면 그 자녀들도 성적으로 문란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통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고 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족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저들의 가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은혜스럽고 행복한 줄 믿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이들의 젊을 때의 허물과 실수는 나이를 먹어서 보응을 받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로 믿음과 순종을 인정받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참으로 험악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인 대가로 고향에서 도망해서 이방땅 하란에서 힘든 목자생활을
하였고 외삼촌 라반의 탐욕에 속았습니다.
먼 훗날 130세의 나이로 야곱은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험한 나그네 세월을 보내었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의 험한 나그네 세월은 그가 저지른 죄의 보응이요 불미스러운 가정의 댓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생애 속에서 깊이 반성하고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자손을 주셨지만,
죄에 대해서도 결코 묵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많은 자식들을 가졌지만 죄의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또하나의 교훈은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당한 경쟁과 투기, 잘못된 방법과 성적인 문란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잘못해 놓고서 남을 탓하고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안 살면 되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과 말을 하지 맙시다.
부부가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아 서로가 정직해야 하며, 서로가 사랑하고 희생하며,
서로가 깨끗하고 아끼는 삶을 삽시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은
구김살 없이 성장하다가 주님의 큰 일을 이루는 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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