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가정] 하나님을 가장 존중하는 가정

본문

다양한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나름대로의 여러 모임이 있습니다.
동창회가 세 개 정도는 있습니다.
친목계가 또 한 서너개가 있습니다.
취미 모임이 또 있습니다. (운동및 볼링크럽 )
인터넷 동호회가 있습니다.
아파트에 라인계가 있구요
어머니들은 학교 모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모임이 있어야 하는지 그 가치가 있는지 하는 것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많은 모임을 가지고 이런 저런 모임에 참여 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성경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 모임이 있는데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첫 창조의 절정에서 에덴동산보다 더 아름답게 만든 공동체가 가정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인 구속사역의 결과로 태어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 두 개의 모임 즉 가정은 육적인 공동체이며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이지만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똑같은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교회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며 가정에서도 최고의 가치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처음부터 가정과 교회는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가정과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주님의 이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3계명은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르쳐 “망령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망령되게”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본래 ‘샤웨’(shawe)라는 단어로 “헛되다”(in vain) 혹은 “가치가 없다”(worthless)는 뜻입니다.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를,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3계명은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살아야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식 없이 함부로 가볍게 여기는 그런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명령이 준행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고 가장 존중해야
살아야 할 중요한 삶의 마당이 우리 가정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셔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부되기로 서약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몇 주 전부터 십계명을 가정의 삶에 적용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확신하기는 십계명이 가정에서 존중되고 지켜 질 때에
분명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계명의 제 3계명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컷지 말라”라는 말씀으로
여러분의 가정에서“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존중되어야 할까요
두 가지 이유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그의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에서 친히 예수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구약의 여러 이름 중에 대표적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신약의 대표적인 이름이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은 별개의 이름이 아닙니다.
봉독한 빌립보서 2장에서의 바울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십자가에 즉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한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이 예수의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더 위대하고 더 고
귀한 이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름이며 나의 소망이 되는 이름입니다.
91장 찬송가의 작시자 리디아 박스터(Lydia Boxter)는
전신이 마비되어 늘 누어서 한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찾아오는 사람마다 그를 통하여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얼굴에 구겨진 구석이 없습니다.
불편하지만 제 삶에는 하나도 지장이 없습니다.
늘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면서 소망 가운데 살면서 늘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91장을 작사하였습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나에게 영원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이름으로 심판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 본문에서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개의 대조적인 단어를 보자 “낮추시고 높이시고... ”
낮추시니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2:10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그분의 이름을 모르고 그분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분에게 무릎을 꿇고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아니라면 언젠가 강제라도 그렇게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는 또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구원이지만 동시에 그의 이름은 심판입니다.
고후5:10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신 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큰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입니다.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분은 우리를 심판할 권세가 있으며
또한 심판을 하실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게 부르지 말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분명 죄입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이 무엇일가요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가치가 없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가치 없게 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직접적인 형태에 속한다면 또 하나는 간접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직접적으로 주님이나 주님과 관련된 것들을 함부로 말할 때입니다.
출20장의 10계명을 번역하면서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 번역에서는 제 3계명을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농담을 한다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된 장소나 교회나 직분이나 직분자들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무엇이든 고귀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물건 사람 직분 책임 다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언어사용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을 경박하게 사용할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의 가치를 농담수준으로 격하시킬지 모릅니다.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주님의 교회나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한다든지 우습게 말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언어를 통해 가치를 학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교회나 사역자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부모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결코 바른 믿음을 자랄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도의 자녀들이 신앙을 따나는 가정에서
두 가지 원인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부모들이 교회 생활은 하지만(심지어 직분도 갖고 있지만)
가정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모범을 배우지 못한 가정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가정에서의 신앙의 모범이 없습니다.
가정예배도 없고 문제를 놓고 함께 기도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늘 교회나 사역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가정의 자녀들은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어려워하시기 바랍니다.
2) 생활 가운데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고 예수님, 성령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라면 그분이 가장 중요하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생활하는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시인되고 고백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일 날 혹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나
주의 일에 참여하는 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우선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삶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뒤 전에 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날 직장에 가고, 놀러 가고, 집안 일 보러 다니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집사님의 자녀들이
주일날 학교에 가는 일이 있으면 교회 빼먹고 학교에 가라고 합니다.
교회에 모이고 어떤 행사를 하는 것보다 학원 보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진학지도를 할 때 혹은 취업 선택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허락한 은사보다 혹시 부나 출세나 명예를 더 고려하도록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예수를 주라고 가르쳐 놓고 실제로는 돈이 주라고, 인기가 주라고,
명예가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나도 주님이 주님이 아니라는 고백이며
주님의 이름을 망명되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장애가 바로 이런 크리스쳔 부모들의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태 혹은 일관성이 없는 이중적인 자녀 교육
이것이 결정적으로 자녀 교육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망령된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부모들에게 호소할 말은 꼭 하나입니다. -
“제발 망령 부리지 마십시다”
모든 생활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우선으로 귀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결론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1)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며 그 이름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 이름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이름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의 이름으로 모여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 때문에 살고 그 이름 때문에 죽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그 이름이 바로 우리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이름을 높이는 삶인 것입니다.
장애 시인 송명희는 그 이름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우리의 예배로 기도로 전도로 사랑함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날마다 삶에서 그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2)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삶은 곧 선택하는 것이며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우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내 삶과 영원한 삶이 결정됩니다.
우리에게 비록 물질적인 손해가 있어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존중하는 바른 결정을 내려보십시오.
그 일이 비록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어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가치 있는 결단을 내려보십시오.
내 인생이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이 없어 무미건조한 것 같아도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고 높이는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할 때, 취직할 때, 사업을 전환할 때, 자녀의 진학지도에
누구를 만나고 어떤 모임을 갖을 때에
손해를 보더라도 재미가 없어도 오직 주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습니까
그때 비로서 당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주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이롱 신자가 위선자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귀중하게 여기고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서 당신의 가정은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고,
당신의 인생은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린 삶으로 결산될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녀 중에 한 사람이 부스에게 다가와서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재산 정리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게 되겠습니다”고
말하자 부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그 앞에 펼쳐진 서류에 그가 가까스로 힘을 내어 서명한 후 그 서류는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들이 서류를 열었을 때
온 가족들은 모두가 깜짝 놀랬습니다.
아버지 부스가 남긴 마지막 서류 싸인에는 부스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그 서류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름, 그의 자녀들이 또한 붙들고 살아주기를 기대했던 이름,
아니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었던 최대의 유산은
돈이 아닌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3계명을 통하여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를 가장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이름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관계된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