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의 끈은 핏줄
본문
미디안에서의 고적한 삶을 살아 온 모세로 하여금 청년의 혈기를 제어하고 지도자적인 소양을 갖추게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현현하시어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출애굽의 선두자요 구원자로 모세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운데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의 조상의 여호와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하나남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고 언명하신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전래로 내려 온 조상들의 얼이나 남겨주신 유산을 기리면서 삼대 가정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새겨 봄직해서 '가정의 끈은 핏줄'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한다.
삼대(代)가 사는 가정은 핵가족의 가정 보다 더 좋은 지혜의 학교가 된다. 살아가는 지혜를 어린것에게 가르치기로는 조부모 만한 선생이 없는 까닭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놈 버릇없다는 말은 빈말에 불과할 뿐 조부모의 귀여움 받는 아이로 세상을 밝게 보는 기(氣)를 얻는다. 겨울이면 부모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부모를 시원하게 해 드리는 마음가짐을 온청(溫淸)이라고 한다. 저녁이면 부모의 잠자리를 돌봐 드리고 새벽에도 부모의 잠자리를 살펴보는 마음가짐을 정성(定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온청과 정성의 효행을 근본으로 삼는 가정의 교훈은 삼대가 함께 사는 생활 속에서 효행의 삶을 배운다. 인생의 근본을 깨닫는다. 여전히 부모는 천지(天地)와 같기 때문이다.
천지를 그냥 하늘과 땅이 아니다. 생명을 주는 근원을 천지라고 한다. 햇빛과 공기 그리고 물과 땅이 없으면 생명 갖는 모든 것 그리고 자연은 살지 못한다. 생명이 있는 곳이면 무엇이든 천지 덕에 산다. 부모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삼대 가정의 지혜는 소중한 부모를 대하고 마음가짐에서 막가는 인생을 택할 수 없게 만든다. 막가는 세상살이는 고달프다. 막가는 인생은 층층히 모시는 삶에서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삼대 가정은 좋은 지혜의 학교가 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조상(祖上)을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왜 낡은 티를 내게 하느냐고 빈정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상이라고 한다 해서 죽은 귀신을 모시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을 섬기자는 것은 나를 태어나게 한 근본을 생각하자는 존경이다.
조상을 근본으로 삼고 우러러 존경하라 함이다. 이것이 없이는 집안의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자유롭게 살면 되는 것이지 가정에 무슨 질서냐고 따질는지 모른다. 집안의 질서를 군대에서 지켜지는 질서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군대의 질서는 명령을 따르지만 가정의 질서는 도리(道理)를 따르기 때문이다. 가정의 도리를 반시(反始)라고 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반시이다. 가정을 이루는 가족의 시초를 조상이라고 한다. 조상을 더럽히지 말라 이 말이 제일 엄하고 무서운 말씀이다. 내 자신이 잘못으로 부모나 가정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라 왜 보답해야 하는가
부모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자녀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모가 가르치고 먼저 선행을 보이면 그 집안의 질서는 잡힌다. 요즘은 현실로 보이는 교통질서, 월드컵 축구 대회를 앞두고 줄서기 등 선진국의 생활질서를 익히도록 홍보하고 선행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을 본다.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맨 먼저 하는 일은 내 가정에서부터 자녀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모가 가르치고 몸소 실행의 본이 되어질 때 그 집안의 질서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질서는 잡히게 된다. 막가는 생활습성은 삼대 가정의 삶을 통하여 제지될 수 있다.
가족은 모두 조상의 고마움을 서로 나누면서 가정을 튼튼한 끈으로 묶어 흐트러지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끈은 곧 핏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농부는 곡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곡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거름을 제대로 주어야 함을 농부는 알고 있다. 어느 부모이든 농부의 지혜를 닮아야 자녀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다. 자녀사랑이 지나치면 거름을 많이 먹는 곡식처럼 엇되고 만다. 엇자란 곡식은 이삭을 맺지 못한다. 과보호를 해서 키우는 부모는 자녀를 엇자라게하고 철부지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자식 농사는 망하고 만다. '엇'이란 우리말의 뜻은 '비뚜로', '어긋나게'란 뜻이고 '엇가다'의 뜻은 '말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그러지게 나가다'란 뜻이다. 고로 '엇갈리다' 같은 말은 '서로 어긋나서' 근본의 뜻이 아닌 대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일수록 자식 농사를 망친다. 천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부모는 정신나간 외통수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학대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그리고 엇갈리게 사는 부모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있음을 본다. 더불어 사는 삶으로 삼대가정을 들어 보면서 먼저 부모로서 해야할 일이 생각난다. 어느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공자 왈 '인간은 직(直)이다. ' 이렇게 공자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곧아야 인간이지 굽으면 인간이 아니다. 이 보다 더 준엄한 심판은 없다. 마음이 곧아야 인간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곧은 마음을 꼭 익혀 주어야 한다. 누가 곧은 사람인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강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면 부모는 먼저 자신부터 정직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까닭이다. 예부터 일러 말하기를 '덤불 속 쑥은 엎드려 굽고, 삼밭 속 쑥은 곧게 쑥쑥 자라 햇빛을 받는다고 했다. 자녀를 곧게 키우려면 부모들의 좋은 가정 환경을 이루어야 됨을 알게 한다.
사람은 고독한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인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갈래의 삶을 영위한다. 하나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여럿이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은 자신의 뜻대로 될 수가 없다.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따라 더불어 사는 삶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성찰하고 사는 사람은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을 진지하게 영위한다. 성찰하는 삶은 성실하고 겸허하게 마련이다. 성찰은 진실과 마주 서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관찰할 때 숨기거나 감출 수 없으므로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내면을 들여다 볼 때 거짓이나 속임수를 불릴 수 없다.
더불어 사는 삶에는 믿음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내가 상대를 믿어주면 상대도 나를 믿어준다. 이러한 믿음이 튼튼하다면 더불어 사는 삶도 순리에 따라 풀려가게 된다. 순리는 항상 상식의 잣대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잣대를 무시하고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치수를 재려 한다면 탈이 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불신이 생길까 생각해 본다. 의리의 균형을 상실하면 불신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옳은 것(義)과 이로운 것(利) 중에서 의(義)를 앞세우면 명분에 메이게 되고 이(利)를 앞세우면 실속을 차리게 된다. 오늘 현대인은 명분이야 어떠하든 실속만 차리면 그만 이라는 속셈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탐욕스럽고 잔인한 욕망을 현대인은 버릴 줄 모른다. 탐욕을 부리면 더불어 사는 삶은 험하게 된다. 더불어 사는 삶은 탐욕과 싸워 이기는 삶이다.
가정은 한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삶의 터전이다. 한가족이 품고 사는 믿음은 뜻을 함께 하므로 한가족 마음은 서로 하나되는 삶이다. 이런 삶이 피어나는 것을 가리켜 복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으므로 흥정하고 속셈하는 사회와는 달리 가족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산다. 마음이 하나되어 오손 도손한 지붕 아래서 가족이 나누는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 따질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살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그것은 한 가족이 창조해 가는 삶의 과정이다. 그 과정이 정성스럽고 성실해야 행복한 가정을 한 가족이 이룩할 수 있다. 돈이나 지위, 명예 등이 행복한 가정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가족이 함께 하는 가정은 서로 믿는 한 마음에 달려 있다.
삶은 지식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식과 지혜가 서로 어울려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돌아가야 삶이 튼튼하고 든든하게 굴러가는 법이다. 학교에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면 가정에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선생이 있다.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는 선생이다. 지식은 살아가는 기술을 주고 지혜는 살아가는 거름을 준다. 한 손만으로 장구소리를 낼 수는 없다. 두 손이 장구 소리를 낸다. 오른 손은 채로 단단한 소리를 왼손은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소리를 내어 어울리는 장구 소리를 낸다. 화목한 가정은 맞장구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가정에 엄친 자모가 있어야 자녀는 어울리는 맞장구 소리처럼 삶의 지혜를 얻는다. 자녀를 오냐 오냐 길러내면 자신밖에 모르고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어머니는 부드러워야 자녀는 제대로 크는 법이다.
요새 젊은 부모들을 보면 안팎이 다같이 자녀에게 아이스크림처럼 굴려고 한다. 그래서는 아이를 제대로 바르게 키우기 어렵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온실 속의 화초같이 나약할 뿐이다. 자녀를 튼튼히 올바르게 키우려는 부모는 인생의 양지와 그늘을 터득하도록 길러야 한다. 아버지는 오른 손이 되고 어머니는 왼손이 되어 자녀의 삶이 어울리게 조율해 주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키운다면 곡식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어 웃자라게 하는 꼴이 된다. 웃자란 곡식은 키만 클 뿐 이삭을 맺을 줄 모른다. 이렇게 자녀를 키우면 자식 농사는 망친다. 엄한 아버지와 부드러운 어머니의 맞장구는 자식 농사도 제대로 하게 된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다. 이번 추석에도 뉴스에서는 시간 시간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대행렬을 보도하고 있다. 모천회귀라는 말이 있다. 연어는 알을 날 때나 죽을 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추석에 한국인들은 고향을 찾아간다. 고향을 찾는 한국인의 귀소본능은 가히 본능이라 할 만큼 유난히 극렬하다. 교통체증과 불편함을 이끌고서도 고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있고, 둘째는 생존에 계시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찾아뵙는 효심 어린 모습이 있고, 셋째는 산업사회에 찌들린 현대인의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태고적 고향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 즉, 죽마고우라고 하는 친구들과 흙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다. 넷째는 타향에서 꿈을 이루고 금의환향하는 모습도 있고, 다섯 번째로 가지 못하는 땅을 바라보며 임진각에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슬픈 모습도 있다. 여섯 번째는 얻어진(수확한) 득(得)을 나타낸 감사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자연을 통한 은혜의 보답이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소명기사와 스데반의 순교 전 설교에서 조상들의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야기와 출애굽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유의한다. 우리는 고향을 찾는 한가위의 분주한 발걸음을 통해서 사람은 고향을 찾는 본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안다. 육신의 몸뚱이가 탄생한 산천의 고향을 넘어서 우리 생명의 영원한 본향을 인간은 그리워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와 오늘 우리들의 삶과는 무슨 관계와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모세나 스데반의 조상 이야기에는 우리들이 고향을 찾는 것과는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이라는 말속에는 핏줄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구원의 사건에 대한 자손 대대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이다.
추석을 맞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자각하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첫째는 고향을 찾는 발걸음은 단순히 혈육의 고향산천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믿음의 본향 영생의 나라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자각함이요.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피땀어린 노력과 애씀 그들의 고난과 시련을 은혜의 고백으로 감사해야 한다. 셋째는 부모형제가 하나되고 화목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축복의 날임을 알아야 한다. 고향은 육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으로도 찾아야 하고, 또한 더욱 중요하게 영으로도 찾아야한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반드시 온 곳이 있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영혼의 고향,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와 스데반과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공통된 고백인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이라는 고백 끝에 "나의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 될 수 있어야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근원을 찾는 마음이며 나의 뿌리를 찾는 마음이다. 불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늘 높은 곳 태양이 있기에 불은 항상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다. 물의 근원은 어디인가 저 바다에 있기에 물은 항상 낮은 바다로 향해 내려가는 것이다. 나무의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다. 뿌리가 향하는 곳에 생명이 깃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이 귀소본능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존재의 가치로 의미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의 끈이요 핏줄이다.
전래로 내려 온 조상들의 얼이나 남겨주신 유산을 기리면서 삼대 가정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새겨 봄직해서 '가정의 끈은 핏줄'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한다.
삼대(代)가 사는 가정은 핵가족의 가정 보다 더 좋은 지혜의 학교가 된다. 살아가는 지혜를 어린것에게 가르치기로는 조부모 만한 선생이 없는 까닭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놈 버릇없다는 말은 빈말에 불과할 뿐 조부모의 귀여움 받는 아이로 세상을 밝게 보는 기(氣)를 얻는다. 겨울이면 부모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부모를 시원하게 해 드리는 마음가짐을 온청(溫淸)이라고 한다. 저녁이면 부모의 잠자리를 돌봐 드리고 새벽에도 부모의 잠자리를 살펴보는 마음가짐을 정성(定省)이라고 한다. 이러한 온청과 정성의 효행을 근본으로 삼는 가정의 교훈은 삼대가 함께 사는 생활 속에서 효행의 삶을 배운다. 인생의 근본을 깨닫는다. 여전히 부모는 천지(天地)와 같기 때문이다.
천지를 그냥 하늘과 땅이 아니다. 생명을 주는 근원을 천지라고 한다. 햇빛과 공기 그리고 물과 땅이 없으면 생명 갖는 모든 것 그리고 자연은 살지 못한다. 생명이 있는 곳이면 무엇이든 천지 덕에 산다. 부모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삼대 가정의 지혜는 소중한 부모를 대하고 마음가짐에서 막가는 인생을 택할 수 없게 만든다. 막가는 세상살이는 고달프다. 막가는 인생은 층층히 모시는 삶에서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삼대 가정은 좋은 지혜의 학교가 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조상(祖上)을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왜 낡은 티를 내게 하느냐고 빈정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상이라고 한다 해서 죽은 귀신을 모시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을 섬기자는 것은 나를 태어나게 한 근본을 생각하자는 존경이다.
조상을 근본으로 삼고 우러러 존경하라 함이다. 이것이 없이는 집안의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자유롭게 살면 되는 것이지 가정에 무슨 질서냐고 따질는지 모른다. 집안의 질서를 군대에서 지켜지는 질서와 비교해서는 안된다. 군대의 질서는 명령을 따르지만 가정의 질서는 도리(道理)를 따르기 때문이다. 가정의 도리를 반시(反始)라고 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반시이다. 가정을 이루는 가족의 시초를 조상이라고 한다. 조상을 더럽히지 말라 이 말이 제일 엄하고 무서운 말씀이다. 내 자신이 잘못으로 부모나 가정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라 왜 보답해야 하는가
부모가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자녀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모가 가르치고 먼저 선행을 보이면 그 집안의 질서는 잡힌다. 요즘은 현실로 보이는 교통질서, 월드컵 축구 대회를 앞두고 줄서기 등 선진국의 생활질서를 익히도록 홍보하고 선행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을 본다.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맨 먼저 하는 일은 내 가정에서부터 자녀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모가 가르치고 몸소 실행의 본이 되어질 때 그 집안의 질서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질서는 잡히게 된다. 막가는 생활습성은 삼대 가정의 삶을 통하여 제지될 수 있다.
가족은 모두 조상의 고마움을 서로 나누면서 가정을 튼튼한 끈으로 묶어 흐트러지지 않게 할 수 있다. 그 끈은 곧 핏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농부는 곡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곡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거름을 제대로 주어야 함을 농부는 알고 있다. 어느 부모이든 농부의 지혜를 닮아야 자녀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다. 자녀사랑이 지나치면 거름을 많이 먹는 곡식처럼 엇되고 만다. 엇자란 곡식은 이삭을 맺지 못한다. 과보호를 해서 키우는 부모는 자녀를 엇자라게하고 철부지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자식 농사는 망하고 만다. '엇'이란 우리말의 뜻은 '비뚜로', '어긋나게'란 뜻이고 '엇가다'의 뜻은 '말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그러지게 나가다'란 뜻이다. 고로 '엇갈리다' 같은 말은 '서로 어긋나서' 근본의 뜻이 아닌 대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일수록 자식 농사를 망친다. 천재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부모는 정신나간 외통수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학대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그리고 엇갈리게 사는 부모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있음을 본다. 더불어 사는 삶으로 삼대가정을 들어 보면서 먼저 부모로서 해야할 일이 생각난다. 어느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공자 왈 '인간은 직(直)이다. ' 이렇게 공자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곧아야 인간이지 굽으면 인간이 아니다. 이 보다 더 준엄한 심판은 없다. 마음이 곧아야 인간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곧은 마음을 꼭 익혀 주어야 한다. 누가 곧은 사람인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강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면 부모는 먼저 자신부터 정직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까닭이다. 예부터 일러 말하기를 '덤불 속 쑥은 엎드려 굽고, 삼밭 속 쑥은 곧게 쑥쑥 자라 햇빛을 받는다고 했다. 자녀를 곧게 키우려면 부모들의 좋은 가정 환경을 이루어야 됨을 알게 한다.
사람은 고독한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인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갈래의 삶을 영위한다. 하나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여럿이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삶은 자신의 뜻대로 될 수가 없다.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따라 더불어 사는 삶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성찰하고 사는 사람은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을 진지하게 영위한다. 성찰하는 삶은 성실하고 겸허하게 마련이다. 성찰은 진실과 마주 서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관찰할 때 숨기거나 감출 수 없으므로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내면을 들여다 볼 때 거짓이나 속임수를 불릴 수 없다.
더불어 사는 삶에는 믿음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내가 상대를 믿어주면 상대도 나를 믿어준다. 이러한 믿음이 튼튼하다면 더불어 사는 삶도 순리에 따라 풀려가게 된다. 순리는 항상 상식의 잣대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잣대를 무시하고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치수를 재려 한다면 탈이 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불신이 생길까 생각해 본다. 의리의 균형을 상실하면 불신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옳은 것(義)과 이로운 것(利) 중에서 의(義)를 앞세우면 명분에 메이게 되고 이(利)를 앞세우면 실속을 차리게 된다. 오늘 현대인은 명분이야 어떠하든 실속만 차리면 그만 이라는 속셈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탐욕스럽고 잔인한 욕망을 현대인은 버릴 줄 모른다. 탐욕을 부리면 더불어 사는 삶은 험하게 된다. 더불어 사는 삶은 탐욕과 싸워 이기는 삶이다.
가정은 한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삶의 터전이다. 한가족이 품고 사는 믿음은 뜻을 함께 하므로 한가족 마음은 서로 하나되는 삶이다. 이런 삶이 피어나는 것을 가리켜 복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으므로 흥정하고 속셈하는 사회와는 달리 가족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산다. 마음이 하나되어 오손 도손한 지붕 아래서 가족이 나누는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 따질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살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그것은 한 가족이 창조해 가는 삶의 과정이다. 그 과정이 정성스럽고 성실해야 행복한 가정을 한 가족이 이룩할 수 있다. 돈이나 지위, 명예 등이 행복한 가정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가족이 함께 하는 가정은 서로 믿는 한 마음에 달려 있다.
삶은 지식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식과 지혜가 서로 어울려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돌아가야 삶이 튼튼하고 든든하게 굴러가는 법이다. 학교에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면 가정에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선생이 있다.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는 선생이다. 지식은 살아가는 기술을 주고 지혜는 살아가는 거름을 준다. 한 손만으로 장구소리를 낼 수는 없다. 두 손이 장구 소리를 낸다. 오른 손은 채로 단단한 소리를 왼손은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소리를 내어 어울리는 장구 소리를 낸다. 화목한 가정은 맞장구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가정에 엄친 자모가 있어야 자녀는 어울리는 맞장구 소리처럼 삶의 지혜를 얻는다. 자녀를 오냐 오냐 길러내면 자신밖에 모르고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어머니는 부드러워야 자녀는 제대로 크는 법이다.
요새 젊은 부모들을 보면 안팎이 다같이 자녀에게 아이스크림처럼 굴려고 한다. 그래서는 아이를 제대로 바르게 키우기 어렵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온실 속의 화초같이 나약할 뿐이다. 자녀를 튼튼히 올바르게 키우려는 부모는 인생의 양지와 그늘을 터득하도록 길러야 한다. 아버지는 오른 손이 되고 어머니는 왼손이 되어 자녀의 삶이 어울리게 조율해 주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키운다면 곡식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어 웃자라게 하는 꼴이 된다. 웃자란 곡식은 키만 클 뿐 이삭을 맺을 줄 모른다. 이렇게 자녀를 키우면 자식 농사는 망친다. 엄한 아버지와 부드러운 어머니의 맞장구는 자식 농사도 제대로 하게 된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다. 이번 추석에도 뉴스에서는 시간 시간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대행렬을 보도하고 있다. 모천회귀라는 말이 있다. 연어는 알을 날 때나 죽을 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추석에 한국인들은 고향을 찾아간다. 고향을 찾는 한국인의 귀소본능은 가히 본능이라 할 만큼 유난히 극렬하다. 교통체증과 불편함을 이끌고서도 고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있고, 둘째는 생존에 계시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찾아뵙는 효심 어린 모습이 있고, 셋째는 산업사회에 찌들린 현대인의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태고적 고향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 즉, 죽마고우라고 하는 친구들과 흙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다. 넷째는 타향에서 꿈을 이루고 금의환향하는 모습도 있고, 다섯 번째로 가지 못하는 땅을 바라보며 임진각에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슬픈 모습도 있다. 여섯 번째는 얻어진(수확한) 득(得)을 나타낸 감사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자연을 통한 은혜의 보답이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소명기사와 스데반의 순교 전 설교에서 조상들의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야기와 출애굽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유의한다. 우리는 고향을 찾는 한가위의 분주한 발걸음을 통해서 사람은 고향을 찾는 본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안다. 육신의 몸뚱이가 탄생한 산천의 고향을 넘어서 우리 생명의 영원한 본향을 인간은 그리워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와 오늘 우리들의 삶과는 무슨 관계와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모세나 스데반의 조상 이야기에는 우리들이 고향을 찾는 것과는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이라는 말속에는 핏줄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구원의 사건에 대한 자손 대대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이다.
추석을 맞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자각하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첫째는 고향을 찾는 발걸음은 단순히 혈육의 고향산천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믿음의 본향 영생의 나라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자각함이요.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피땀어린 노력과 애씀 그들의 고난과 시련을 은혜의 고백으로 감사해야 한다. 셋째는 부모형제가 하나되고 화목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축복의 날임을 알아야 한다. 고향은 육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으로도 찾아야 하고, 또한 더욱 중요하게 영으로도 찾아야한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반드시 온 곳이 있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영혼의 고향,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와 스데반과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공통된 고백인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 .... '이라는 고백 끝에 "나의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 될 수 있어야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근원을 찾는 마음이며 나의 뿌리를 찾는 마음이다. 불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늘 높은 곳 태양이 있기에 불은 항상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다. 물의 근원은 어디인가 저 바다에 있기에 물은 항상 낮은 바다로 향해 내려가는 것이다. 나무의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다. 뿌리가 향하는 곳에 생명이 깃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이 귀소본능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존재의 가치로 의미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의 끈이요 핏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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