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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치유와 회복이 있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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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쉽게 경험된다. 수 십 년 동안 모은 재산을, 한 순간에 잃고 실망에 빠질 수도 있고, 출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기회를 놓치고 실망할 수도 있다. 국가나 교회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고,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 서로 실망하기도 한다.
또 우리는 자녀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실망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겪고 있는 실망가운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실망감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
실망가운데 가장 큰 아픔은 가장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때는 마음의 상처만 아니라, 인생의 목적마저도 흔들린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반드시 실망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상처받기 쉽다. 가정과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도, 상처를 받아 아픔이 있을 수 있다. 가정과 교회는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더 상처를 받기 쉽다. 이 상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어떤 사람은 상처 때문에, 눈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아, 가슴에 큰 상처를 안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불러, 양 떼를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가서, 형들과 양 떼를 알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명을 따라, 형들이 있는 '도단'까지 갔다. 그는 이 도단에서 버린 바 되고, 찢긴 바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형들은 요셉이 멀리서 오자, 보고 죽이기로 하였다. 그가 입고 있던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졌다.
요셉은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형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은20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다. 거기서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다시 팔려갔다. 요셉은 그토록 충성했지만,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침으로 인하여, 오해를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형들을 통해 받은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또 감옥에서 도와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은혜를 잊고 살겠다고 했지만, 다 잊어버렸을 때, 인간을 향한 불신의 씨앗은 더욱 자랐다. 요셉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이성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요셉은 달랐다. 그는 진정으로 형들을 용서했고, 오히려 그들을 그리워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갚았다. 그는 쓴 마음을 정복했다. 오히려 그 경험을 살려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입은 상처를 회복해야 한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나, 상처를 주는 가족을 진정으로 용서해야 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정복할 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상처를 극복하는 비결을 살펴보자.
1. 상한 마음은, 나를 파괴시킨다는 의식을 가져라.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화가 생기고, 화를 품으면 한이 맺히게 되는데, 이때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1) 불안 심리
불안심리는 무슨 일이든 '안 될 것 같고, 잘못될 것' 같은 심리다.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은, 지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앞으로 나빠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껏 기뻐하지 못한다.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호사다마라는 말을 즐겨 쓴다. 심지어 자가다가 벌떡 일어나서, 걱정할 정도다.
(2) 심한 죄책감에 빠진다.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어떤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보통 기도할 때도, "마땅히 죽어야 할 이 죄인…", "손톱의 때만도 못한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그 사랑을 누리며 살지 못하고 밤낮 죄인이라고 부르짖으며, 죄책감에 시달려 산다.
물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극심한 죄책감은 삶의 에너지를 무력화하여 의욕상실을 불러오기 쉽다. 죄에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도 죄를 깨닫게 되고, 마귀가 역사해도 죄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마귀는 너는 이런 죄들을 지었는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이런 죄를 지었으니,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된다.
(3) 불면증에 시달린다.
40고개를 넘기면서부터, 마음속에 맺힌 한이 불면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흔히 '수면제를 먹으면 낫겠지'하고, 예사로 넘기기 쉬운데, 무지한 생각이다.
한이 풀리기 전에는, 불면증은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면장애가 있을 경우는, 먼저 한이 가슴속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그때 드러나는 현상만 다스리면 결국 큰 병을 키우게 된다.
(4) 무기력해진다.
삶의 활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무슨 일에든 흥미를 잃는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청소 설거지 모두 다 하기 싫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쌓여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만 '저 일들을 빨리 해치워야 할텐데…"라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학생들은 "공부해야 할 텐데…"라며 걱정만 한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한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이런 증상을 '우울증'이라고 한다.
(5) 식욕이 떨어진다.
몸이 급속히 약해지는데,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급기야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런가 하면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여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간다.
마음의 상처를 풀지 못하면, 화와 한이 되어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한은 여러 가지로 우리를 공격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신경이 쓰인다. 화가 나고 쉽게 피곤해지고 짜증이 난다. 자유도 없어지고 평화도 사라진다. 신경질이 자주 나고, 신경쇠약에 걸리기 쉽다.
지난날의 아픔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아픔은 커 간다. 나를 배척했던 사람들, 나를 이용하려 들었던 사람들, 나를 속이고 기만했던 사람들, 그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힘을 빼앗고, 상처를 더 깊게 만들어, 결국에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나를 그런 죽음으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를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
(6) 쾌락에 쉽게 빠져든다.
화가 싸이면,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술독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가슴속에 한이 쌓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 중독이 되고 만다.
(7) 성격이 격해진다.
운전도 동승하기 겁날 만큼 거칠게 한다. 병적인 분노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갑자기 터져 나온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고,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용서하는 훈련을 우리는 해야 한다. 예수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용서는 믿음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격이다.
용서는 타인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한을 품게 되면,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파괴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전에, 자신이 미움의 불덩이를 안고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용서하며 살자.
2. 상한 마음을 치료하려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시선을 맞춰라.
요셉은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은 형들이나,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에게, 상처를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시선을 모았다.
노예로 팔린 일이나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결국은 애굽의 총리 대신까지 오르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에 요셉은 시선을 맞추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해석하는 능력이다.
해석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건을 보게 된다. 롬8:28 말씀을 통해서, 해석함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고 인생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이적이 나타난다. 지나간 사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과거에 고통스러웠던 사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다정한 손길이 있었고, 섭리가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인생의 위기가, 위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기회였음을 알게 된다.
요셉은 사건의 해석에 있어서 탁월했다. 요셉은 기근 때에 곡식을 사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와 벌벌 떨고 서있는 형들 앞에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45: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본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7),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8)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로 받아들이면 된다.
요셉에겐 형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였고, 보디발의 아내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위기라는, 변장된 축복을 보내신다. 고난을 통해, 더 강하고 위대하게 만드신다. 마리아 칼라스는 6살 때 자동차에 치어서, 12일 동안 혼수상태로 누워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정상에 서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가 정말 뛰어난 오폐라 가수가 된 배경에는, 위기라는 신비로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는 성공의 어머니요, 또한 창조의 어머니다. 변화를 주도해 가는 강력한 힘이다.
3.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다.
원망해도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을 원망할 수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한을 품게 되면, 과거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상처를 가진 사람일수록, 과거 지향적인 경우가 많다.
요셉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기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주목했다.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가 매여 있거나, 교회나 직장에서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지 말라. 그 일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열매를 보라.
사람은 항상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에, 늘 옛날의 상처를 되씹고 되씹어, 증오와 복수의 칼을 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미래를, 환하게 열어 주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는 항상 미래가 있다. 요셉은 과거에 형들이 자신을 팔아먹은, 그 악랄한 행동을 생각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다고 했다.
복수는 미래가 없지만, 용서는 미래가 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과거의 어떤 죄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그의 구원 사역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그때 과거의 억울한 일, 슬픈 일 다 잊을 수 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용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역사를 덮어두자는 말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요셉은 형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온갖 연극을 다 꾸민다.
그러나 형들이 회개하자, 요셉은 깨끗이 과거를 잊어버리고, 다 용서했다. 이같이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이해함으로,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함으로, 용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가정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 장소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가정을 이루어, 아내의 사랑을 받으며, 자녀를 낳으므로 아픔을 치료하셨다. 그래서 그의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하였다(창41:51).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정의 행복을 통해, 요셉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셨다.
1967년 8월 충청남도 구부 광산에서 매몰사고가 있었다. 그때 '양찬성'씨는 갱 속에서, 16일 만에 구출되었다. 당시에는 세계적인 기록이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지하의 갱 속에서, 양식도 없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 이유는 바로 갱과 지상을 연결해 주는 전화 때문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통해, 가족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족과의 대화가 절망의 상황에서, 그의 생명을 지탱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가족끼리 뜻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무리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가정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뜻을 나눌 때, 모든 피곤이 풀리고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서로 대화가 있는 가정을 만들자.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때, 치유와 회복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정이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식구들은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집으로 온다. 그래서 가정은 문제가 모이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가정에서 풀어지지 않고, 다른 곳에서 풀리면, 그 가정은 깨어진다. 가정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어야 한다. 가정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상처와 아픔으로 더욱 커진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마음과 심정을 들어주면, 그 사람은 바뀌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가정 속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가족이 있고, 속상한 얘기나 기쁜 얘기를 모두 할 수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
자녀들이 가진 꿈이 아버지에 의해 짓밟히고, 엄마에게 꺾이고 사회에서 무시당하면, 그 아이는 온전히 자라지 못하게 된다. 온전히 자라지 못한 채 사회적인 지위만 갖게 되면, 그 사람은 고통을 안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내 방식, 내 뜻대로만 하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하는 폭력일수도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다. 모든 것을 믿고, 바라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스럽고 힘들다.
사람은 격려의 말을 들을 때 성장한다. 말에도 입술의 말, 머리의 말, 가슴의 말이 있다. 가슴의 말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마음을 움직인다. 가슴의 말을 들으면 감동이 있다. 가정에서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격려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황폐하고 격려의 말을 할 수도 없다.
꽃밭처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저절로 되겠지'하면 무너진다. 식구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비료를 주어야 한다.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성장한다. 상대방이 필요를 채워줌이 사랑의 시작이다. 용서하고 받는 경험을 할 때, 성장한다.
요셉의 용서로 형들은,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이루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요셉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을까! 교회와 가정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곳이다.
이런 사랑과 용서가 흘러 넘치는, 교회와 가정을 이루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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