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믿음의 조상들의 가정
본문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들의 자손인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도 이들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이들의 믿음을 연구하고, 이들의 일생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려고 하며, 이들의 믿음을 본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이 한가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역시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으며 이들의 인격도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세상의 책들과 달리 이들이 범한 죄와 허물을 숨김없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이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것까지도 정직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밝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나타나시고 이들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의 일생을 주장하시고 이들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는 것을 흔치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옛날 믿음의 조상들의 가정도 역시 문제가 대단히 많았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제가 하나도 없었던 가정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72세 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이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 가나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나, 나이 75세 때에 비로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커녕 딸도 하나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바심이 난 그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막상 주인의 아이를 갖게 되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몸종이라는 자기 본래의 신분을 망각하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창 16:4). 이에 사라가 하갈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을 시도했습니다. 사실 한 가정에 두 여자가 있으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겠지요. 사실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낳은 이스마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자 이삭을 낳게 되자 그동안 이스마엘에게 쏟았던 이들 부부의 관심이 하루아침에 이삭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할 때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창 21:10). 아마 사라의 불같은 요구를 받은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앞에 두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아들인데 이 일을 어찌 할꼬 얼마나 근심이 되었겠습니까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각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1:12-1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을 받은 아브라함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그의 자식 인 이스마엘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라고 명했습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였지만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또 버림을 받고 내어쫓기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두 모자가 평생 아브라함의 가정에 대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후에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는 창세기 21:20절의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아브라함 집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급함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조급한 판단으로 인해 후에 많은 문제를 드러낸 것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으니 아브라함의 나이 160세 때에 비로소 두 손자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5:22절을 보면, 야곱과 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서로 싸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두 아들중 한 사람은 이방인의 조상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큰아들 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온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작은아들 야곱은 몸이 아주 매끈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의 성격도 매우 달랐습니다. 큰아들은 유능한 사냥꾼이 되어 날마다 온 들판을 쫓아다니며 사냥을 즐겼으나, 작은아들은 밖에서 일하기보다 집안에 있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연히 아버지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큰아들 에서를 사랑하였고, 그의 아내 리브가는 늘 집에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많지도 않은 네명의 식구가 불행하게도 두 패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에서는 40살이 되었을 때에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방 여인을 둘이나 취하여 같이 살았습니다. 이 일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8:8-9절을 보면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하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에서는 여자를 세 명이나 데리고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살았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히다가 망하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두 아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신앙으로 바르게 키우지를 못함으로 해서 두 아들 중 하나가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외삼촌의 두 딸 중 작은 딸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헬과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 지방의 풍속은 큰딸을 놓아두고 작은딸이 먼저 혼인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이러한 풍습을 야곱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결혼식 날 밤에 큰딸을 신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야곱이 다음 날 깨어보니 자기 옆에 있었던 신부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고 그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삼촌의 두 딸과 차례차례 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내들의 자식 낳기 경쟁으로 아내들의 몸종까지 데리고 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4명의 아내에게서 1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 가정의 분위기가 어떠하였겠습니까 13명의 자녀가 한 여인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문제가 많았을텐데 네 명의 여인을 통해서 태어났으니 야곱의 가정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이 밤낮 험악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가정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네명의 아내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녀가 늦게 낳아준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혀 키웠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이처럼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에 대하여 불평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연히 그들은 요셉을 시기질투하여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들판에 나온 요셉을 죽일 기회로 생각하고 죽이려다가 요셉을 애굽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위장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옷을 보이며 마치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처럼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야곱은 피묻은 요셉의 옷을 보자마자 요셉이 짐승에게 찢긴 것으로 단정하여, 다른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그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슬픔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하게 된 이유가 모두 야곱에게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특별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들의 악함을 익히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아들이 자식을 생산하기도 전에 거두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아이 없는 청상 과부가 된 큰며느리 다말이 특별히 이 집안의 자손을 얻기 위해 길거리의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기다리다가 그를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됩니다(창 38:29).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부끄럽게도 자신의 며느리를 통해 자식을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성군 다윗의 가정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상들의 가정이 모두 다 이렇게 문제가 많았으니 평범한 다른 가정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저는 믿음의 가정들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이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이들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완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들이 점점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시체와 같습니다.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완전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다 아시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족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완전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허물과 죄가 많은 고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권능을 주셔서 악마를 이기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며,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 경건하게 살수 없고 경건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경건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의 가정보다 더 좋은 가정, 더 경건한 가정,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저는 성령의 역사로 한 가정이 놀랍게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안수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은 성격이 아주 강하고, 평소에 가족들에게 잘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게 되자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얼마나 온순하고 겸손해졌는지 너무나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하루는 이 집사님이 가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장모님께는 사위로서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아내에게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시킨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으며, 아들딸에게도 아버지로서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함께 끌어앉고 기도하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가정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가정이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천국과 같은 가정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들의 자손인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도 이들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이들의 믿음을 연구하고, 이들의 일생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려고 하며, 이들의 믿음을 본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이 한가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역시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으며 이들의 인격도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세상의 책들과 달리 이들이 범한 죄와 허물을 숨김없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이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일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것까지도 정직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밝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나타나시고 이들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이들의 일생을 주장하시고 이들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는 것을 흔치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옛날 믿음의 조상들의 가정도 역시 문제가 대단히 많았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제가 하나도 없었던 가정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72세 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이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 가나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나, 나이 75세 때에 비로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커녕 딸도 하나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바심이 난 그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막상 주인의 아이를 갖게 되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몸종이라는 자기 본래의 신분을 망각하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창 16:4). 이에 사라가 하갈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을 시도했습니다. 사실 한 가정에 두 여자가 있으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겠지요. 사실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낳은 이스마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자 이삭을 낳게 되자 그동안 이스마엘에게 쏟았던 이들 부부의 관심이 하루아침에 이삭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할 때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창 21:10). 아마 사라의 불같은 요구를 받은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앞에 두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아들인데 이 일을 어찌 할꼬 얼마나 근심이 되었겠습니까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각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1:12-1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을 받은 아브라함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그의 자식 인 이스마엘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라고 명했습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였지만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또 버림을 받고 내어쫓기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두 모자가 평생 아브라함의 가정에 대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후에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활을 쏘는 자가 되었다는 창세기 21:20절의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아브라함 집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급함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조급한 판단으로 인해 후에 많은 문제를 드러낸 것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으니 아브라함의 나이 160세 때에 비로소 두 손자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5:22절을 보면, 야곱과 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서로 싸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두 아들중 한 사람은 이방인의 조상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큰아들 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온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작은아들 야곱은 몸이 아주 매끈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의 성격도 매우 달랐습니다. 큰아들은 유능한 사냥꾼이 되어 날마다 온 들판을 쫓아다니며 사냥을 즐겼으나, 작은아들은 밖에서 일하기보다 집안에 있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연히 아버지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큰아들 에서를 사랑하였고, 그의 아내 리브가는 늘 집에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많지도 않은 네명의 식구가 불행하게도 두 패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에서는 40살이 되었을 때에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방 여인을 둘이나 취하여 같이 살았습니다. 이 일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8:8-9절을 보면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하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에서는 여자를 세 명이나 데리고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살았고,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히다가 망하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두 아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신앙으로 바르게 키우지를 못함으로 해서 두 아들 중 하나가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외삼촌의 두 딸 중 작은 딸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라헬과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 지방의 풍속은 큰딸을 놓아두고 작은딸이 먼저 혼인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이러한 풍습을 야곱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결혼식 날 밤에 큰딸을 신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야곱이 다음 날 깨어보니 자기 옆에 있었던 신부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고 그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삼촌의 두 딸과 차례차례 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내들의 자식 낳기 경쟁으로 아내들의 몸종까지 데리고 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4명의 아내에게서 1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 가정의 분위기가 어떠하였겠습니까 13명의 자녀가 한 여인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문제가 많았을텐데 네 명의 여인을 통해서 태어났으니 야곱의 가정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이 밤낮 험악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가정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네명의 아내 중에 라헬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녀가 늦게 낳아준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혀 키웠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이처럼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에 대하여 불평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연히 그들은 요셉을 시기질투하여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들판에 나온 요셉을 죽일 기회로 생각하고 죽이려다가 요셉을 애굽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위장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옷을 보이며 마치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처럼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야곱은 피묻은 요셉의 옷을 보자마자 요셉이 짐승에게 찢긴 것으로 단정하여, 다른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그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슬픔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들과 생이별하게 된 이유가 모두 야곱에게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특별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들의 악함을 익히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아들이 자식을 생산하기도 전에 거두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아이 없는 청상 과부가 된 큰며느리 다말이 특별히 이 집안의 자손을 얻기 위해 길거리의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기다리다가 그를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됩니다(창 38:29).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유다는 부끄럽게도 자신의 며느리를 통해 자식을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성군 다윗의 가정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상들의 가정이 모두 다 이렇게 문제가 많았으니 평범한 다른 가정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저는 믿음의 가정들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이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이들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완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들이 점점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시체와 같습니다.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완전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다 아시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족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완전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허물과 죄가 많은 고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권능을 주셔서 악마를 이기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며,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 경건하게 살수 없고 경건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경건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의 가정보다 더 좋은 가정, 더 경건한 가정,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저는 성령의 역사로 한 가정이 놀랍게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안수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은 성격이 아주 강하고, 평소에 가족들에게 잘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게 되자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얼마나 온순하고 겸손해졌는지 너무나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하루는 이 집사님이 가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장모님께는 사위로서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아내에게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시킨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으며, 아들딸에게도 아버지로서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함께 끌어앉고 기도하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가정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가정이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천국과 같은 가정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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