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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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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학교 다니면서 다 외웠을 것입니다.
다시 그때를 생각하며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분은 이러한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가끔 높은 산에 오르거나 비행기를 탈 때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밀려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갈 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하다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르면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다보면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 존재에 대하여 잘못 인식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산에 자주 올라갈 것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큰 도시에 사는 여러분, 그리고 그 도시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높은 산에 올라가 여러분이 사는 도시들을 내려 다 보십시오.
그 보여지는 큰 도시는 너무나도 작아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 도시의 일원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이 지식이 많은지, 권력이 많은지, 얼마나 큰집을 가지고 사는 지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단지 “나도 저 작은 일원에 불과 했구나”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도시 살다보면 그 작은 존재가 도심과 사회 요구에 취해,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욕심과 많은 욕구 속에서 포장되어 절망과 힘겨움으로 인생을 절며 살아 갈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몇 년전 근처 도시에 살던 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에 따라 친구들을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이유가 부모들에 의하여 행동되어진 결과라는 것에 대하여 더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임대 아파트에 살면 사귀지 못하게 하고 평수가 큰 아파트 친구들 또는 같은 평수의 아이들만 사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산에 올라 자신의 존재만이라도 보았으면 그럴 수 있을까?
시편 2편의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웃으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바른 존재를 위해 이 시간 고민하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1. 주님 앞에서 기억되어진 존재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핍박 속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태어날 당시, 히브리인의 자손의 수가 많아지고 번성하여 지자,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자신들보다 강성해져 무서운 적으로 돌변할까봐 태어나는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정책을 폅니다.
이러한 위협의 시기에 모세는 태어났고 아기 모세를 살리기 위하여 그의 가족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가에 띄우게 됩니다.
때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이 갈대 상자를 발견하고 히브리인인 모세를 자신의 아들로 삼습니다.
바로의 딸은 유모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고 몰래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는 친 어머니를 불러오게 됨으로 친어머니의 모유를 먹으며 자라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으로 자라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히브리 민족을 향한 불타는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자 울분을 감추지 못한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쳐 죽입니다.
이틀이 지난 후에 밖에 나가보니 이번에는 히브리사람 둘이 싸우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싸움을 말리며 잘잘못을 가리려 하자 “누가 너를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고 하느냐”라는 물음에 자신의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겁을 먹은 모세는 광야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2:14)
광야로 도망한 모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습니다.
낳은 아들의 이름을 보면,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출 2장 22절을 보면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은 이유가 설명되어있습니다.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버려진 나그네, 잊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릅니다. 누가 부르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를 부릅니까? 어떻게 부르고 계십니까?
출애굽기 3장 4절을 보십시오.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그네처럼 버려진 그의 이름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을 나그네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생각과 달리 그의 존재에 대하여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가 밟고 있는 광야의 한곳을 말하기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서있는 땅은 이집트의 왕자의 자리를 떠난 실패한 자리입니다.
나그네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곳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실패한 이 자리를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며 그곳의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실패의 자리이고 잊혀진 자신의 이름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 가운데 ‘모세’ 그 자체로서 그를 부르시고 그 자리에서 그를 기억하여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모세가 무슨 뜻입니까?
‘건져냄’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서 건져내었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그리고 잊고 싶은 자신의 이름 모세입니다.
나일강에서 건져낸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가 모세가 되었을 때, 그는 왕자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세가 되기 위해 겪었던 사회적 혼란과 어려움은 그를 모세의 자리에 세우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가 모세가 되었을 때,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는 자신의 지난 과오로 인하여 광야로 도망 왔을 때, 바로 지금 40년이 지난 그 시점에서 지난 모든 것들은 아픔이고 잊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야 하시며 그 이름을 기억하기고 또 “모세야” 하시며 그의 이름은 ‘모세’임을 말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 ‘모세’는 잊고 싶은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 ‘모세’를 기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보노보노를 아십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해안가에 사는 해달과 그 주변 숲에 사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보노보노 시리즈 중에 2003년 극장판으로 쿠모모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향기나무라고도 하는데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사는 숲의 중앙 언덕에 향기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향기나무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동물들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다가오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이 향기나무에 오르거나 나무 그늘 주위에 있으면 그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동물들이 이러한 향기나무에 자신의 한 부분을 잊고자 이곳에 오곤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 나무에 다른 전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동물들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잊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향기나무를 누가 꺾어 가져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누가 그랬는지 숲은 떠들썩하게 되죠.
주인공인 보노보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양이를 찾아갑니다.
고양이는 보노보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향기 나무라…. 왜 다들 그렇게 잊으려고만 하는 것일까? 나는 기억하고 싶은데… 내가 처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의 별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처음으로 자신의 손발을 움직였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막 태어났을 때 느꼈던 그런 것들을 지금 하나 하나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 내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살지 않겠니?”라고…. ‘
나중에 향기나무의 또 다른 전설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게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 오는 날 번개로 말미암아 향기나무에 불이 붙습니다.
이때 불붙은 향기나무는 불로 말미암아 다른 향기를 발합니다. 이 냄새를 맡은 숲속의 동물들은 잊고 살았던 것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었던 것은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께서 어릴 때 칭찬하며 가르쳐 준 사실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기게 되고, 그리고 오랫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대상이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향기나무는 잊혀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 향기나무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모세야, 모세야”라고 불렀듯이 여러분의 자신의 이름이 머물고 있는 그 힘겨운 자리에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이미 오래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자리에서 그렇게 잊으려고 하기에 더더욱 힘겹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잊으려고 하지 말고 기억해보십시오.
그 자리는 축복의 자리이고 여러분은 축복의 존재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1985년 5월15.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50세의 시각장애인이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인 전재경씨 입니다.
7살 때 안질에 걸려 맹인이 된 그는 신앙과 주위의 격려로 보이지 않는 암흑의 삶을 극복했다고 합니다.
전재경씨는 미국 유학 시절, 맹인 전용 도서관에 가기 위해 매일 세 번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20년이라는 긴 시간은 흘렀고 그의 인내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재경씨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오늘의 본문인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말씀은 전재경씨 삶에 존재의 용기를 부어주었고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의 의미를 예수 안에서 발견함을 통하여 인생을 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실패의 자리에서 그를 부르심과 동시에 그를 파송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 실패의 자리인 이집트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만난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0가지 재앙을 다시 표현해보십시오.
10번이나 도전한 것입니다.
같은 자리를 10번이라는 외로운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주님의 부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모세의 앞에 3가지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왕이 군사를 이끌고 오고 앞에서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같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뒤에 좇아오는 이집트의 왕은 과거로, 앞에 가로막고 있는 홍해는 미래로,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볼 때, 모세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온통 어려움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재에서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합니다.
그 안을 자세히 보십시오.
화나 불안은 없고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자신을 보내신 분이 자신과 함께 하는 분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믿습니까?
오늘의 본문인 에베소서 2장 1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 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세의 모습 속에 나타난 부름의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그 존재의 의미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3. 사랑의 존재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나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마을에서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의 온몸은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는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피부는 한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십시오.
출애굽기 3장 7절 이하로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세 너를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여 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치시기 위하여 힘이 있는 주위의 강대국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절망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기 위해 절망이라는 이름, 잊고 싶어하는 삶의 나그네인 모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작은 자를 통하여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해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그 힘의 능력으로 오시어 심판하지 않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의 약함으로 찾아오셔서 그 사랑을 확인하신 여호와 하나님 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10절을 통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사랑으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그 사랑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약함을 통해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의 행함 속에 실천 속에 사랑의 능력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주님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자 약속인 무지개를 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눈 앞에 보여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현실 속에서 실망하지 않고 하늘 소망을 품고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삽니까?
어느 시처럼 그냥 웃음으로 대답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는 분명의 존재의식,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모세에게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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