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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내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모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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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사람들이 신앙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체계를 세운 ‘ 역사이전의 역사’에 관한 구약은 우리 인류역사의 발상지가 아득히 먼 그 이상 소급하여 올라 갈 수 없는 지점인 신비한 ‘에덴동산’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히브리인들의 신앙만이 이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이미 시초부터 죄와 타락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설명하므로써 특수한 성경적 인간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격 안에 타락의 본질을 지닌 인간의 역사가 갖가지 사건의 고비를 넘고 노아의 대홍수에도 오히려 살아남아 마침내는 하늘에까지 치솟는 거창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한 언어, 한 민족의 경이한 인간 문명을 이뤄 놓았습니다.
여기서 구약 창세기 제1막을 서서히 내리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의지, 인간의 힘이 성경이 기록한바 같이 한 언어의 연대 밑에 집대성 해놓을 ‘바벨의 문명’을 오히려 외면시 하시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활기 넘친 ‘도시문명’을 이룩한 문화인이 아니라 그런 문명에 어설프게 적응하지 못하는 변두리 사람 노아의 식구 위에 향하고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세 아들 중 ‘셈’ 한 사람의 핏줄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집중하였다.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르우, 스록, 나홀, 데라’
이렇게 집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
이렇게 추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
이렇게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전에 드디어 꼭 적중하는 한 사람.
성경이 이곳을 클로즈업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중의 사람 ‘아브라함’이 인간 역사 위에 등장하여
창세기 제2부의 막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2:1은 첫마디를 RSV는 “Now the Lord said to Abram…. ”
직역하면 ‘이제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글 개혁 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머릿부분의 “이제는”의 한 마디는 거기까지 도달하느라고 많은 곡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에 맞는 아브람에게 말씀을 시작하셨다고 하는 창세기 제2부의 첫 마디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신 한사람 아브라함의 족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시고 여호와 하나님 의중에 맞는 인물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상중의 조상’이라 부르며, 바울이 로마서4:12에서 할례자나 무할례자에게 다 조상이 된다고 한 아브라함의 인격과 신앙과 생활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격과 신앙과 생활이 별개의 관계로서 이중인격자가 아닌 통합된 삶을 살았습니다. 인격이 신앙이였고, 신앙이 곧 생활이였습니다.

1. 아브라함의 신앙
 첫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사람, 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창5:22이하에 보면, 모든 열조들이 수명을 다한 후 죽었으나 에녹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지 않고 승천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도 이미 노아와 그 아들들과 언약을 세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특수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존재가 뚜렷해지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신 일이 있습니다.
갈대아, 지방의 바벨론의 종교는 달신(神)을 숭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잡신들의 근거지에서 떠나 막연한 종교개념과 상관을 끊어야 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여기서 단절이라는 쓰라림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살릴 수 있고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개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분명한 개성의 것이었느냐를 설명해 주는 또 한가지는 그의 후손들이 그 후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개성/個性-다른 사람이나 객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
즉 막연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해 경험되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표현은 후손들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친히 이 사실을 승인하시어서 이삭이 파 논 여러 우물을 그랄 지방의 목자들이 시기해 흙으로 메꾸었을 때 이삭이 착잡한 심정으로 브엘세바로 물러 갔는데 이삭을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니 두려워마라”하셨던 것입니다. (창26:24)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의 독자적이며, 개성적인 관계는 그 후 야곱에게
그리고 훗날 출애굽3:15에 모세에게 찾아오시어 권면하실 때 주신 말씀에도
“너의 조상의 여호와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라”하시므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은 개인적인 확신과 긍정적 근거 위에 세워진 개인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크리스챤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긍정적 근거 위에 선 개인의 신앙입니다.
현대의 특징은 집단적 사고와 행위에서는 매우 강하고 용감하나 개인의 내면적인 사고는 빈약하며, 믿는 이들도 역시 같은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왜 위대합니까?
그의 신앙의 신앙되기 위해 책임을 지는 개인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산 신앙을 소유하지 위해 아버지의 우상을 떠났을 때 여호와 신앙의 진가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의 신앙입니다.

2. 대화(기도)의 신앙
창세기 12:1의 제2부의 막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인물이 아브람입니다. 이름이 나오면서 설명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가 졸지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기도의 계속/지속적이였다는 것입니다.
첫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은 ‘이스마엘’ 이름의 뜻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 들으시오”입니다. 이것도 분명 대화입니다. 항상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얘기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같은..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를 기도라고 하면 창세기18:23이하에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진 아브라함의 긴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변증을 한 대담한 대화입니다.
주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의사를 전하고(창17-18장) 소돔으로 떠났을 Ei에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시나이까?” 이렇게 거룩하신 전능자에게 변론을 시작합니다. “가령 의인 50명이 그 가운데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나는 티끌과 재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심에 비한다면 과연 아브라함은 티끌 같고 재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대화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끈기가 있습니다.
의인 50명이라는 수에서 5의 숫자로 끈질기게 타협의 선을 내려 가다가 마지막 32절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노하심이 심히도 조급해질때, 20명에서 10명으로 한번 건너 뛴 것 밖에는 아브라함은 10절이나 되는 긴 대화 속에서 사실상 한번도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어디를 보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과 맞부딪혀 이렇게 대담하고 끈기 있고 이렇게 긴 대화를 한 예가 없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끈기 있고 설득력이 비상하고 대담무쌍한 대화를 통해 그의 신앙이 표현된 사람입니다.

3. 신뢰와 우정을 본질로 하는 신앙
아브라함의 신앙은 신뢰와 우정을 본질로 하고 있는 신앙입니다.
한 친구가 또한 친구를 끝까지 신뢰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창세기 15:5이하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약속해 주실 때 노년의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이야기하며 걸으시다가 “하늘을 보라”하시므로 수염이 긴 아브라함이 검고 푸른 하늘에 창창한 반짝이는 별을 보고 황홀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친구였음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신약의 야고보서에서 증거합니다. 야고보서 2:23에 “이에 경(經)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았나니”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자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대한 생각과 믿음이 곧,
신관이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자며, 두려움의 대상 일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심과 같이 “아버지”요 예수님은 “나의 친구”로 신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의 사회’ 또는 과거의 문명 속에서 특히 아브라함 시대의 생활은 우리가 소위 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이해하는 풍습과 규례들은 절대화 했던 때입니다. 모든 자연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형식 그대로입니다.
이 때는 그 사회가 한 장소에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산을 넘어 가거나 냇물을 건너는 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들에게나 있는 것들입니다. 전통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에서 부르실 때에 산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특히 우상의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것은 과거에 집착하여 의기소침 등이 굽고 어깨가 처진 노예의 걸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기에 두신 미래를 향한, 미래에 도전하는, 미래를 꿈꾸는 신뢰와 믿음의 걸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순수한 순종과 신뢰를 보시고
창세기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 의로 여기시고”하시었고 이 믿음의 의로운 표로 그가 어디로 이동하든 항시 그와 함께 기억할 수 있고 몸 안에 있는 표로써 할례를 창세기 17장에서 주신 것입니다.
연로하나 여호와 앞에서 신뢰의 온전한 걸음을 쉬지 않았으며,
그의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사로 드리려고 모리아산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칼을 쳐들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알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칼을 든 손이 번득이며 내려올려는 순간, 다급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여호와 하나님의 신뢰는 인류의 구속사로 이어지는 감동의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아브라함의 신앙은 신뢰의 그것 여호와 하나님이 만족한 ‘신실한 믿음’이었습니다.

결론으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4:11에서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 하였습니다.
모든 후손은 조상을 닮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자랑 할 때에 마땅히 아브라함 같은 신앙을 닮아야 합니다.
그의 개인이 경험한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며,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며, 끝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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