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진정한 가치혁신
본문
요즘 다들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들어 정부차원에서 창업을 지원해 주기도 하고 창업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TV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의 ‘해결 돈이 보인다’ 라는 프로그램도 비슷하지요. 장사 잘 되는 집을 찾아서 어려운 사람에게 연결시켜서 재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소위 대박집이라는 곳을 보면 한순간에 대박집이 된 것이 아니고 다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쳐서 지금의 대박집이 된 것이며 그들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즉, 노하우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음식장사이기 때문에 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대박집마다 경영을 하는데 있어서의 철학과 노하우가 있으며 손님을 대하는 서비스에서도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가치혁신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날마다 새로운 가치혁신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치혁신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가치혁신을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것을 개발하는 것이 가치혁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가치혁신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매일 매일의 일상이 똑같이 반복되어 지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반복되어 갑니다. 이러한 반복되어지고 습관화되어 가는 신앙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크리스천의 가치혁신은 바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사가 등장을 하지요.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5절에 기록되어 있지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실 율법사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뻔한 것입니다. 율법사가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율법사는 율법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내용을 몰라서 질문할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들이 질문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대답을 꼬투리삼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소련의 KGB가 숙청해야 될 사람들을 심문할 때에 주로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긴 대답 필요 없지요. 단 한마디 하면 그 한마디로 인하여 꼬투리를 잡아 제거를 해버립니다. 율법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럴만한 자신감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율법사들의 계략을 모르셨을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반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이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사들은 질세라 바로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의 내용이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7절)
이는 신명기 6:5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입니다. 율법사들이 이를 모를 리 없지요. 그래서 아주 자신 있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사들은 뒤에 이어질 예수님의 대답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에 대답하신 내용은 율법사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28절에 기록된 것처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사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읽는다고 해도 그대로 살지 않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사들이 여기서 이대로 물러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묻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 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0절 이하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가치는 바로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말씀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혁신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임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입으로는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진정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나에게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욥 35:6-7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욥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또 욥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여호와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욥의 친구 엘리후가 한 말입니다. 즉,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에게 하나도 유익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신 10: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모두들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청년들에게는 그렇게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는 아무래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서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고 허무한 인생의 가치혁신을 이루어 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1분 1초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져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시간을 건져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살던지 초호화판으로 유럽과 같은 곳에서 살든지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가라져 가는 것 뿐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5:3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의 계명은 무겁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에게 있어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고 어렵게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말씀대로 살아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흉년에 부자와 그 집의 머슴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흉년이 들어도 곳간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어서 별 상관이 없지만 머슴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날 부자가 머슴을 불러다가 쌀 한가마니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시켰습니다. 가뜩이나 흉년이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쌀 한 가마니를 옮기라니…. 짜증도 날 것이고, 무겁고 억지로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부자가 머슴을 불러다가 쌀 한가마니를 주면서 이것으로 너희 가족들을 먹여 살리라고 한다
면 그 때에 느껴지는 쌀 한 가마니의 무게는 차원이 다릅니다. 쌀 두 가마니를 갖고 가라고 해도 무겁다는 핑계 없이 가볍게 가지고 갈 것입니다.
사실 한 줌의 재 이상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인간의 삶에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위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요일 5:3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청년 시절부터 말씀으로 자신의 시간을 건져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갈 때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무언가를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안식일 날. 한 유대인 여자가 이웃집 여자에게 급하게 무언가를 부탁하더랍니다. 빨리 우리 집에 와달라고…그래서 이웃집 여자는 무슨 큰 일이라도 났는가 싶어서 갔더니 그 유대인 여자가 하는 말이 거실의 에어컨을 꺼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손님이 찾아와서 손님이 에어컨을 켜고 갔는데 끄지 않고 그냥 가서 에어컨을 꺼야 하는데 자신은 안식일이라 에어컨을 끄는 것이 죄라 안 된다면서 이웃집 여자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도 누르지 않고 옆 사람에게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 유대인 여자는 율법(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가장 큰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말씀 안에서 자기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자기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나 에어컨의 버튼을 누르는 것이 자기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남에게 시켜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죄를 짓기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무서운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은 율법을 지키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은 지를 짓거나 말거나 오히려 죄를 짓도록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자신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누구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고, 지금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앞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는 분명히 간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씀으로 자기통합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간격을 메우고 자기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기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짧게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1. 투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해야 합니다. 성경통독한 적이 있나요? 이 자리에 손을 들어 보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으로 손을 들어 보십시오. 성경통독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2.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약속입니다. 신앙도 약속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약속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약속, 사회적인 약속부터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한항공 항공기를 타본 사람을 알 것입니다. 국내선말고 국외선을 타면 대한항공에서 담요를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집에 이 담요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기내에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요.
사용한 뒤에 기내에 두고 내리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대한항공의 자산인 담요를 가져가고 있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속을 경히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전 세계의 항공기 중에서 기내 담요에 ‘이는 기내용이니 가져가지 말라’는 식의 안내문이 부착된 것은 대한항공밖에 없다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대한항공의 담요를 가져오는 많은 사람들이 (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승무원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담요를 넣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대한항공 담요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한항공 담요를 가져오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시편 1:1-2에 보면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하는 것은 바로 반복되어지는 적용을 의미합니다. Q. T의 생명은 적용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자주 Q. T를 한다고 해도 적용이 없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양교회의 청년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남아 있는 삶이 많다고 해도 그 인생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씀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말씀 안에서 자기통합을 이루어 가며 청년 시절부터 말씀대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소위 대박집이라는 곳을 보면 한순간에 대박집이 된 것이 아니고 다들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쳐서 지금의 대박집이 된 것이며 그들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즉, 노하우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음식장사이기 때문에 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대박집마다 경영을 하는데 있어서의 철학과 노하우가 있으며 손님을 대하는 서비스에서도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어렵고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가치혁신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날마다 새로운 가치혁신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치혁신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가치혁신을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것을 개발하는 것이 가치혁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가치혁신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매일 매일의 일상이 똑같이 반복되어 지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반복되어 갑니다. 이러한 반복되어지고 습관화되어 가는 신앙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크리스천의 가치혁신은 바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사가 등장을 하지요.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5절에 기록되어 있지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실 율법사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뻔한 것입니다. 율법사가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율법사는 율법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내용을 몰라서 질문할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들이 질문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대답을 꼬투리삼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소련의 KGB가 숙청해야 될 사람들을 심문할 때에 주로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긴 대답 필요 없지요. 단 한마디 하면 그 한마디로 인하여 꼬투리를 잡아 제거를 해버립니다. 율법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럴만한 자신감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율법사들의 계략을 모르셨을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반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이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사들은 질세라 바로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의 내용이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7절)
이는 신명기 6:5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입니다. 율법사들이 이를 모를 리 없지요. 그래서 아주 자신 있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사들은 뒤에 이어질 예수님의 대답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에 대답하신 내용은 율법사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28절에 기록된 것처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사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읽는다고 해도 그대로 살지 않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사들이 여기서 이대로 물러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묻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 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0절 이하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가치는 바로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말씀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혁신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임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입으로는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진정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나에게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욥 35:6-7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욥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또 욥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여호와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욥의 친구 엘리후가 한 말입니다. 즉,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에게 하나도 유익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신 10: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모두들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청년들에게는 그렇게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는 아무래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서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고 허무한 인생의 가치혁신을 이루어 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1분 1초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져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시간을 건져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살던지 초호화판으로 유럽과 같은 곳에서 살든지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가라져 가는 것 뿐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5:3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의 계명은 무겁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에게 있어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고 어렵게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말씀대로 살아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흉년에 부자와 그 집의 머슴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흉년이 들어도 곳간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어서 별 상관이 없지만 머슴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날 부자가 머슴을 불러다가 쌀 한가마니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시켰습니다. 가뜩이나 흉년이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쌀 한 가마니를 옮기라니…. 짜증도 날 것이고, 무겁고 억지로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부자가 머슴을 불러다가 쌀 한가마니를 주면서 이것으로 너희 가족들을 먹여 살리라고 한다
면 그 때에 느껴지는 쌀 한 가마니의 무게는 차원이 다릅니다. 쌀 두 가마니를 갖고 가라고 해도 무겁다는 핑계 없이 가볍게 가지고 갈 것입니다.
사실 한 줌의 재 이상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인간의 삶에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위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요일 5:3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청년 시절부터 말씀으로 자신의 시간을 건져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갈 때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무언가를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안식일 날. 한 유대인 여자가 이웃집 여자에게 급하게 무언가를 부탁하더랍니다. 빨리 우리 집에 와달라고…그래서 이웃집 여자는 무슨 큰 일이라도 났는가 싶어서 갔더니 그 유대인 여자가 하는 말이 거실의 에어컨을 꺼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손님이 찾아와서 손님이 에어컨을 켜고 갔는데 끄지 않고 그냥 가서 에어컨을 꺼야 하는데 자신은 안식일이라 에어컨을 끄는 것이 죄라 안 된다면서 이웃집 여자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도 누르지 않고 옆 사람에게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 유대인 여자는 율법(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가장 큰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말씀 안에서 자기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자기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나 에어컨의 버튼을 누르는 것이 자기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남에게 시켜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죄를 짓기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무서운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은 율법을 지키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은 지를 짓거나 말거나 오히려 죄를 짓도록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자신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누구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고, 지금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앞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는 분명히 간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씀으로 자기통합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간격을 메우고 자기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기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짧게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1. 투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해야 합니다. 성경통독한 적이 있나요? 이 자리에 손을 들어 보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으로 손을 들어 보십시오. 성경통독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합니다.
2.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약속입니다. 신앙도 약속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약속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약속, 사회적인 약속부터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한항공 항공기를 타본 사람을 알 것입니다. 국내선말고 국외선을 타면 대한항공에서 담요를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집에 이 담요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기내에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요.
사용한 뒤에 기내에 두고 내리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대한항공의 자산인 담요를 가져가고 있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속을 경히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전 세계의 항공기 중에서 기내 담요에 ‘이는 기내용이니 가져가지 말라’는 식의 안내문이 부착된 것은 대한항공밖에 없다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대한항공의 담요를 가져오는 많은 사람들이 (상당수의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승무원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담요를 넣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대한항공 담요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한항공 담요를 가져오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시편 1:1-2에 보면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하는 것은 바로 반복되어지는 적용을 의미합니다. Q. T의 생명은 적용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자주 Q. T를 한다고 해도 적용이 없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양교회의 청년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남아 있는 삶이 많다고 해도 그 인생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씀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말씀 안에서 자기통합을 이루어 가며 청년 시절부터 말씀대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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