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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십자가안에서 새 정체성 발견하기

본문

이사야는 가장 무참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는 “ ...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 ” (사 52:14)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매 맞음으로 몹시 상하여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형체는 사람의 자녀 같아 보이지 않았고, 전혀 여호와 하나님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은 몇 군데의 상처와 멍든 부분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마치 사람이 아닌 벌레처럼 생각되어질 정도로 비열한 장면이었다. (시 22:6-8). 여호와 하나님의 이와 같은 격하는 누구도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다. 이것이 전부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그와 같은 슬픔으로 고난 받도록 허락하신 것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사야 50:6-7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시 22:15-1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비열하고 잔혹한 사단의 계략과 여호와 하나님의 제한되지 않는 사랑이 맞닿은 곳이 바로 십자가상이었다. 바로 거기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골 1:13-20).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인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손상된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다이아몬드와 함께 은과 금으로 덮어 깨끗하게 만든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바로 그것이 죄가 우리 각자에게 하기 원하는 것임을 스스로에게 인식시켜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각자의 삶을 위한 죄의 목적인 죽음과 멸망을 잘 설명해 준다. 사단이 여호와 하나님께 한 그 일을 당신에게도 하기 원한다!
1.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 보기를 잃었기 때문에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죄는 우리가 누구인가로부터 우리를 눈멀게 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보기를 잃은 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하려는데 수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오늘날 남자는 여자의 육체라는 덫에 거려들었고, 여자는 남자의 육체라는 덫에 걸려 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것으로부터 눈멀어서 우리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는데 수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인가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만들어진 형상인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해 준다.벧전 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헬, 썩어질 것으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세상안에서 잃어버린 형상을 얻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존재의 비밀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은 예수님의 상한 몸을 봄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거기에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분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구약을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는 인류가 어떻게 그 자신의 형상을 재창조하는지를 보여 준다. 매번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추구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타락시켜왔다.. 창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창 1:27-28)라고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십자가상에 나타난바 되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소의 형상을 위해 그들의 “영광”을 협상한 이스라엘과 같다.
시 106:19-22
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시편기자가 이스라엘의 “영광”, 즉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이 만든 소의 형상의 것과 비교되는 이 본문에 서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가 종종 어떻게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려는 노력을 함을 말하고 있다.
합 2:18-20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오늘날 이와 같은 종류의 우상숭배가 육체의 세계에서 우리를 누구라고 정의하는 형상을 믿음으로 허락하면 자리 잡게 된다. 우리의 세상의 탐욕의 습관은 우리의 가치가 이러한 물건들을 찾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항상 우리의 일그러진 자아를 보여 준다. 하박국은 우리에게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답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안에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찾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인정하자, 세속적인 존재로부터 본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에 대해 우리는 종종 눈이 가려져 있다. 그런 예수님은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십자가로 가야만함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
마 16:24-27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골짜기에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발견되어질 것이다.
2. 우리의 정체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안에 싸여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우리 각자를 우리 자신의 가장 내면으로부터 벗겨내는 무엇인가가 있다. 인류 역사상 십자가 자체를 신성시해왔으나, 십자가상에서 우리는 가장 겸손한 모습안에서 인간화시키는 신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정체성을 찾아야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우리 각자와 동일시 함으로써 십자가상에서 그분의 참된 정체성을 정의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인간의 경험을 맛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자의 임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히 4:15-16).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의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요 1:1-14) 십자가에서 죽음 앞에 굴복하신 때 완성이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아담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계보를 더듬어 올라간다. 그의 논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그래서 그분은 우리중 하나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산을 낮추고 모든 골짜기를 높여서 세상의 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듦으로써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사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동일한 기회를 우리 각자가 갖게 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심의 속성을 말하지만 십자가상에서 이 모든 속성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다 벗겨내 버리시고, 그분이 그분의 원수들조차도 위해서 순수한 모습의 사랑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분 존재의 가장 핵심을 보이시는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된다. 그러한 계시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간결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이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녀로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한 생명 안에 죄의 완전한 충돌을 예증하시려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밤새워 여호와 하나님께 “이 잔이 제게서 옮기어 가게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는 그를 고소하는 자들이 너무나 아연 질색하는 앞에서 인간의 죄의 짐을 지셨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그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해 여지없이 벌거벗겨 버리는 자들 앞에 완전히 힘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시몬이 그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어야 할 만큼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졌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죄의 손아귀에 대해 힘없을 정도로 너무나 인간이었다.
그는 그의 고소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나 인간이었다.
그의 죄의 짐은 살을 에는 듯했기 때문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
십자가는 나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는 이치에 맞도록 행하신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절망으로부터 종속시키신다면, 그분이 절망으로부터 세상에 자유를 공급하실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다. (롬 8: 18-2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죄의 짐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짐을 지신다. 그분은 우리와 동일시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참된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죄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고후 5:21).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기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그분을 거룩하게
만들고, 우리 역시 거룩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단 한가지이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이 만들어진 창조주의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만약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우리 있는 모습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창조주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우리의 창조주와 하나 되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창조주와 하나라면, 우리는 그분의 창조하신 일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와 같은 자리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에 비로소 창조주와 하나가 되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 인간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십자가의 영광과 능력을 허락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기회가 제공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눔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나는…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속죄 값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그의 삶에서 채워져갈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 삶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위해서는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의 삶은 그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만들고자 갈망했던 희생으로 완전히 채우지는 않았다. 바울이 치룬 대가와 그리스도가 이미 치룬 대가에는 큰 괴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이루기전에 그가 할 부분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는 그 남은 고난을 채우고자 고뇌하는 노력을 했었다. 그가 부족함에도 완성하려고 하는 그의 뜻안에는 그리스도안에 그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습이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려함은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서 그들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필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한다.
우리 문화의 개인주의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교회의 온전한 역할을 손상시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계속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삶에 채우는 일 위해 여기서 잃어진 자들을 찾고 구원하는 일을 한다. 우리 중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세례식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의 헌신을 기억해야만 한다.
 소년원에서..
소년원에서, 한 반항적인 소년이 다른 청소년을 찔러서 작은 상처를 냈다. 그는 그 일로 빵과 물만 주는 어두운 감옥에 3개월 있도록 언도를 받았다. 그는 어두움을 두려워했고 그의 앞에 벌어질 일들을 예견했다. 크리스천이었던 그 상처받은 소년은 그 감옥에 그 소년대신 들어가겠다고 자원했다. 감독관은 그 찌른 소년이 매일 상처 난 소년에게 빵과 물을 가져다 주는 조건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6일째 되던 날, 그 찌른 소년은 울면서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크리스천 소년이 당하는 고통이 그의 마음을 만졌던 것이다. 곧 그 찌른 소년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사탄은 십자가를 왜곡함으로써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왜곡하기 원한다. 그는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멈추었다고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필요해서 드린 제물만을 드렸다고 믿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개인적 희생을 요구한다.
 십자가의 능력과 영광은 우리가 십자가의 지식을 통해 세상을 재창조할 것을 구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한 목적으로 하나 되는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십자가로 가는 길은 여러분이 그분과 함께 세례식에서 그와 함께 자진해서 죽고 그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안에 여러분이 부활하여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그 지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십자가상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서운 것처럼 보이만, 그것만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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