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본문
사람마다 인식의 수준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믿음에서도 수준이 차이가 날 수 있다. 똑 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믿는 반면 아무리 설명을 해주고, 증거들을 제시해도 도무지 믿으려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알고 있거나 경험한 범위 안의 일은 잘 이해하고 믿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이해하거나 믿는 일에 주춤거리게 된다.
옛날에는 호랑이 온다면 울던 아이도 홍시 감을 준다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요즈음의 아이들에게는 홍시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돈을 주겠다는 제안이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런데 그 제안도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액수를 달리해야 지혜롭다. 2-3살 아이라면 지폐보다 동전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5-6살 유치원생쯤 되면 동전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2-3살 아이에게 "100만원을 주마. " 해보아야 "100원 주마. "보다 더 못한 약속이다. 그 나이또래 아이들은 만원이라는 단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냥 종이에 불과하다. 그것이 100원짜리 100개와 같다는 사실을 아직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100원짜리 동전은 돈이라고 믿지만, 100만원 짜리 수표는 돈이라고 믿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들의 생활 속에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그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믿음의 양과 질을 결정된다. 우리들이 이미 가진 지식이나 경험에만 의존하게 될 때,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똑같은 유치함을 벗어나기가 힘들 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넘겨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이 세종대왕이 그려진 10000원짜리 지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별 볼 일 없는 종이쪽으로 취급하거나 아예 가당치도 않은 일로 여기는 수가 많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증거가 될만한 수많은 진리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다 받아들여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자기 수준으로 재단하여 취사선택해서 믿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는데 최대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영생에 이르는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임의로 그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하다가는 알맹이는 다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게될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계21:18,19절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인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고 요주의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를 비롯한 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기록들 중에는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치병을 치료하신 기록이 있다.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게 해주신 기록이 있다. 본문처럼 죽은 자를 살리신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이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믿음을 북돋아주는 근거가 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런 기록들 때문에 더 못 믿겠다는 주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고, 사랑과 섬김과 낮아짐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 고통스런 질병을 치료하신 것까지는 좋은데,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을 살렸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고,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기적의 현장에 있지 않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신을 조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쉬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너무나 확실한 근거였기 때문에 믿음의 아주 좋은 증거로 남겨 놓았는데 오히려 불신을 조장하게 되었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제발 오늘 여러분들에게는 그 안타까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 죽음
본문은 참으로 슬픈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인성을 향해 들어가고 계셨다. 또 한 무리의 행렬이 이번에는 나인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다.
어느 장례 행렬이든 그렇듯이 침울하고 가눌 수 없는 흐느낌이 그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유독 더 서운하고 슬픈 이유는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가 그것도 과부인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독자가 죽어서 떠나는 행렬이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회복되지 못하는 절망이다. 죽음은 극복하지 못하는 고통이다. 죽음은 기약이 없는 이별이다. 그렇게 죽음은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것을 모두에게 다가오는 당연한 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기껏해야 다가오는 시기를 늦추어보자는 시도 이상을 하지 못한다.
무엇이든 원인을 분석하고 잘 따지고 답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들이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사람이니까 죽는 거라고 어설픈 단정을 한다. 죽음 앞에서는 항우장사도 포기하는 것이 상책인줄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어디에서 죽음이 오는지, 무엇에서 죽음을 극복하는지 알리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길을 얻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사람들의 착각이 너무 깊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영원히 살 길이 있다는데 외면한다. 차라리 "100년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고 했으면 엄청나게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영생을 이해하기는 인간의 수준이 너무 낮았을까?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밝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시한부 생명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사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넣어주셨다. 그런데 구태여 사람이 죽음의 독을 마셔버린 것이다. 그 독이 바로 '죄'다. 죄의 삯이 바로 사망이다. (롬6:23) 인류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되었다.
최초의 타락은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다. 생명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버렸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뿌리에서 잘려 버려진 가지가 어떻게 되는가? 죽음의 원인은 죄고, 죄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상태이다. 그 결과는 사망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창조의 질서가 아니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결과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 것이 정해진 바른 순서가 아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다. 가장 귀한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인 죄를 제거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가 나쁘다는 사실은 다 안다. 되도록 죄를 멀리 하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죄를 다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할 죄가 무엇이겠는가? 죄의 시작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그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가 하나도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어져버렸다. 그만큼 죄의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 불가능을 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람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주심으로 우리는 그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다. 죄인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믿는 자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예수님이 가져가셨다. ) 우리의 죽음은 어떻게 되었는가?(예수님이 가져가셨다. )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이 없어져버린 사람들이다. 더 이상 죽음이라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한다. 사망이라 하지 않고 召天이라고 한다.
2. 위로
예수님은 이렇게 매우 부자연스런 죽음에 처하는 사람들을 비통하게 보셨다. 더 살아서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힘이 되어주어야 할 청년의 죽음은 더 비통한 것이었다. 그 상황만이 비통한 것이 아니라 죄가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비통한 일이었다.
특히 그 어머니의 가누지 못하는 아픈 가슴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다가가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 " 깊은 위로의 말씀이다. 인사치레나 혹은 심정을 달래주기 위한 동정의 말씀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울지 말라. "고 하셨을 때에는 울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만드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으로는 원하고 말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실천할 수는 없는 일들이 많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그들을 자립하도록 도울 수 있는 여력을 가지지 못한다. 병든 사람들이 다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병을 고쳐줄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에 한계가 없는 분이시다. 말씀하시면 무엇이나 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광야에서 사람들은 5000명이 넘게 모였는데 먹을 양식이라고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 뿐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빈털터리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고 말씀하셨다.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에게는 5000명의 사람들을 먹일 방법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날 모든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염려하지 말라. "시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분의 능력으로 넉넉히 해결하신다. 그 분이 "두려워 말라. "시면 더는 떨 필요가 없다. 그 분이 이미 승리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들을 잃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 "고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감지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 말씀의 능력을 예측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시는 음성을 주의 기울여 듣는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누구라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여러분이 슬픔을 아신다. 주님은 여러분의 고민을 아신다. 주님은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아신다. 그러시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부르시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약속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발걸음이 왜 나인성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아는가? 왜 그 시간에 성문 밖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아는가? 주님이 이미 큰 슬픔을 아셨고, 주님이 아니고서는 위로 받지 못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3. 소망
어머니를 향해서 "울지 말라. "고 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죽은 아들의 관을 향해 다가가셨다. 왜 다가가시는가? 사람들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무엇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드디어 예수님의 입이 열렸다.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14)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아마 제정신이라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니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셔야 한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 "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심지어 산들을 향해서도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강아지에게 명령) 풍랑이 높이 일던 바다가 그의 명령을 들으면 숨을 죽이고 잔잔해졌다. 무화과나무가 그의 말씀을 듣고 말라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과는 얼마나 다르고 여호와 하나님과는 얼마나 가까운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예수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들이다. 그 예수님이 죽은 자를 향해서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어떻게 되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16절.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
그 어머니가 이제는 울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아마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동일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정도가 아니다. 그 큰 능력 앞에 두려움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본문은 앞선 백부장의 경험과 비교해 보자. 백부장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먼저 예수님을 찾았다. 병치료를 그가 먼저 구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믿음이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찾거나 무엇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시고,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이루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은 자를 당장 살리는 일은 도무지 소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라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두고 무슨 요청이며, 부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후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요11:21)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가시고, 부탁이 없고 소망하지 않아도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여기에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진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우리가 아무리 큰 것을 소망 삼아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구하지 못한 것도 채워주신다. 우리가 구한 것에 지나도록 응답하신다. 우리가 도무지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계획하시고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우리 속에 넉넉히 이루신다.
오늘 죽은 자도 일으키신 주님을 보라. 그 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깨달아 그 분은 주님으로 모셔 온갖 은혜와 풍성함을 체험하기 바란다.
옛날에는 호랑이 온다면 울던 아이도 홍시 감을 준다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요즈음의 아이들에게는 홍시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돈을 주겠다는 제안이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런데 그 제안도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액수를 달리해야 지혜롭다. 2-3살 아이라면 지폐보다 동전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5-6살 유치원생쯤 되면 동전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2-3살 아이에게 "100만원을 주마. " 해보아야 "100원 주마. "보다 더 못한 약속이다. 그 나이또래 아이들은 만원이라는 단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냥 종이에 불과하다. 그것이 100원짜리 100개와 같다는 사실을 아직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100원짜리 동전은 돈이라고 믿지만, 100만원 짜리 수표는 돈이라고 믿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들의 생활 속에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그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믿음의 양과 질을 결정된다. 우리들이 이미 가진 지식이나 경험에만 의존하게 될 때,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똑같은 유치함을 벗어나기가 힘들 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넘겨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이 세종대왕이 그려진 10000원짜리 지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별 볼 일 없는 종이쪽으로 취급하거나 아예 가당치도 않은 일로 여기는 수가 많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증거가 될만한 수많은 진리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다 받아들여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자기 수준으로 재단하여 취사선택해서 믿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는데 최대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영생에 이르는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임의로 그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하다가는 알맹이는 다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게될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계21:18,19절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인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고 요주의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를 비롯한 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기록들 중에는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치병을 치료하신 기록이 있다.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게 해주신 기록이 있다. 본문처럼 죽은 자를 살리신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이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믿음을 북돋아주는 근거가 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런 기록들 때문에 더 못 믿겠다는 주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고, 사랑과 섬김과 낮아짐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 고통스런 질병을 치료하신 것까지는 좋은데,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을 살렸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고,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기적의 현장에 있지 않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신을 조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쉬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너무나 확실한 근거였기 때문에 믿음의 아주 좋은 증거로 남겨 놓았는데 오히려 불신을 조장하게 되었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제발 오늘 여러분들에게는 그 안타까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 죽음
본문은 참으로 슬픈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인성을 향해 들어가고 계셨다. 또 한 무리의 행렬이 이번에는 나인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다.
어느 장례 행렬이든 그렇듯이 침울하고 가눌 수 없는 흐느낌이 그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유독 더 서운하고 슬픈 이유는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가 그것도 과부인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독자가 죽어서 떠나는 행렬이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회복되지 못하는 절망이다. 죽음은 극복하지 못하는 고통이다. 죽음은 기약이 없는 이별이다. 그렇게 죽음은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것을 모두에게 다가오는 당연한 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기껏해야 다가오는 시기를 늦추어보자는 시도 이상을 하지 못한다.
무엇이든 원인을 분석하고 잘 따지고 답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들이 사람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사람이니까 죽는 거라고 어설픈 단정을 한다. 죽음 앞에서는 항우장사도 포기하는 것이 상책인줄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어디에서 죽음이 오는지, 무엇에서 죽음을 극복하는지 알리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길을 얻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사람들의 착각이 너무 깊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영원히 살 길이 있다는데 외면한다. 차라리 "100년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고 했으면 엄청나게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영생을 이해하기는 인간의 수준이 너무 낮았을까?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밝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시한부 생명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사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넣어주셨다. 그런데 구태여 사람이 죽음의 독을 마셔버린 것이다. 그 독이 바로 '죄'다. 죄의 삯이 바로 사망이다. (롬6:23) 인류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되었다.
최초의 타락은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다. 생명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버렸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뿌리에서 잘려 버려진 가지가 어떻게 되는가? 죽음의 원인은 죄고, 죄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상태이다. 그 결과는 사망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창조의 질서가 아니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결과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 것이 정해진 바른 순서가 아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다. 가장 귀한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인 죄를 제거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가 나쁘다는 사실은 다 안다. 되도록 죄를 멀리 하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죄를 다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할 죄가 무엇이겠는가? 죄의 시작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그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가 하나도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어져버렸다. 그만큼 죄의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 불가능을 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람을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주심으로 우리는 그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다. 죄인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믿는 자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예수님이 가져가셨다. ) 우리의 죽음은 어떻게 되었는가?(예수님이 가져가셨다. )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이 없어져버린 사람들이다. 더 이상 죽음이라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한다. 사망이라 하지 않고 召天이라고 한다.
2. 위로
예수님은 이렇게 매우 부자연스런 죽음에 처하는 사람들을 비통하게 보셨다. 더 살아서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힘이 되어주어야 할 청년의 죽음은 더 비통한 것이었다. 그 상황만이 비통한 것이 아니라 죄가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비통한 일이었다.
특히 그 어머니의 가누지 못하는 아픈 가슴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다가가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 " 깊은 위로의 말씀이다. 인사치레나 혹은 심정을 달래주기 위한 동정의 말씀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울지 말라. "고 하셨을 때에는 울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만드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으로는 원하고 말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실천할 수는 없는 일들이 많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그들을 자립하도록 도울 수 있는 여력을 가지지 못한다. 병든 사람들이 다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병을 고쳐줄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에 한계가 없는 분이시다. 말씀하시면 무엇이나 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광야에서 사람들은 5000명이 넘게 모였는데 먹을 양식이라고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 뿐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빈털터리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고 말씀하셨다.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에게는 5000명의 사람들을 먹일 방법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날 모든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염려하지 말라. "시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분의 능력으로 넉넉히 해결하신다. 그 분이 "두려워 말라. "시면 더는 떨 필요가 없다. 그 분이 이미 승리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들을 잃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 "고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감지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 말씀의 능력을 예측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시는 음성을 주의 기울여 듣는 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누구라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여러분이 슬픔을 아신다. 주님은 여러분의 고민을 아신다. 주님은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아신다. 그러시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부르시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약속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발걸음이 왜 나인성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아는가? 왜 그 시간에 성문 밖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아는가? 주님이 이미 큰 슬픔을 아셨고, 주님이 아니고서는 위로 받지 못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3. 소망
어머니를 향해서 "울지 말라. "고 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죽은 아들의 관을 향해 다가가셨다. 왜 다가가시는가? 사람들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무엇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드디어 예수님의 입이 열렸다.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14)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아마 제정신이라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니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셔야 한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 "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심지어 산들을 향해서도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강아지에게 명령) 풍랑이 높이 일던 바다가 그의 명령을 들으면 숨을 죽이고 잔잔해졌다. 무화과나무가 그의 말씀을 듣고 말라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과는 얼마나 다르고 여호와 하나님과는 얼마나 가까운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예수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들이다. 그 예수님이 죽은 자를 향해서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어떻게 되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16절.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
그 어머니가 이제는 울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아마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동일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정도가 아니다. 그 큰 능력 앞에 두려움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본문은 앞선 백부장의 경험과 비교해 보자. 백부장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먼저 예수님을 찾았다. 병치료를 그가 먼저 구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믿음이 발견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찾거나 무엇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시고,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이루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은 자를 당장 살리는 일은 도무지 소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라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두고 무슨 요청이며, 부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후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너무 늦게 오신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요11:21)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가시고, 부탁이 없고 소망하지 않아도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여기에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진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우리가 아무리 큰 것을 소망 삼아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구하지 못한 것도 채워주신다. 우리가 구한 것에 지나도록 응답하신다. 우리가 도무지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계획하시고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우리 속에 넉넉히 이루신다.
오늘 죽은 자도 일으키신 주님을 보라. 그 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깨달아 그 분은 주님으로 모셔 온갖 은혜와 풍성함을 체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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