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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가정, 그 안식의 터전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허락하신 첫 번째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이라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식일은 그의 첫 번째 날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여섯째날 창조되었고, 그 인간이 눈을 뜨고 호흡을 하면서 맞이한 첫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가장 먼저 '안식'을 선물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안식을 누리면서 즐거워하였던 가장 첫 번째 장소는 바로 그의 가정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가정에서 안식을 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안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하면 무엇보다 먼저 '쉴 수 있는 곳' '안식의 장소'를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절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는 이 모압의 여인 며느리 룻이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인 자신을 따라 이곳 베들레헴으로 온 것을 참으로 기특하게 여기면서, 동시에 같은 여자로서 이 며느리의 인생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며느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결과, '안식할 곳' 즉 "안정된 가정"을 이루게 해 주는 일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3장 18절에도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기 '앉아 있으라. '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그 말에 '쉰다. '는 단순하고도 표면적인 의미 이상의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안식이라는 말을 "메누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이것이 삶의 근거"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합시다. 면, 가정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이것이 일체의 다른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동력' '근본 에너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가정의 나오미와 룻은 둘 다 무너진 가정, 상처투성이의 가정을 살아온 여인들입니다. 나오미는 자신과 자신의 며느리를 위해서 이 가정을 다시 세우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새로운 가정을 세워가는 과정이 본문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진정 행복한 가정에 필요한 필수적인 요건이 무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 보십시오. 먼저 행복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기심을 포기한 사람, 이기심을 극복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 나오미의 성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나오미는 자신의 필요보다는 다른 이의 필요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된 입장에서는 며느리 룻이나 시어머니 나오미나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마음자세는 자신이 아닌 며느리를 위하는 자세가 더 강력한 것을 봅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시어머니는 자신의 중요한 사명중의 하나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며느리를 위해서 가정을 이루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호칭으로만 보아도 이 시어머니는 불쌍한 그 이방 며느리를 "내 딸아"하고 부르면서 진정 자기의 딸로 여기고 있습니다. 언젠가 심야기도회 시간에 예화로 들려드린 말씀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미국에 사는 아들과 딸네 집을 방문하려고 미국 땅을 밞았습니다.
아들네 집에 가서 맛있는 고기를 굽고 식사를 대접받는데, 이 어머니의 밥상에 마주앉은 사람은 며느리였고, 아들은 손자 분유를 먹이고 있느라고 여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할머니가 마음속으로 한 말이 "고약한 것, 저 아들을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아기 분유나 먹이게 하고 자기는 식탁에 뻔뻔하게 앉아 시어머니하고 겸상을 한단 말이냐"였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해서 다음날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역시 딸네 가정에서도 어머니를 위해서 고기를 굽고 식탁을 마련했는데, 그 어머니 식사 자리에 마주 앉은 것은 자기 딸이었고, 사위는 외손자 분유 타 먹이느라고 저만치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역시 내가 사위하나는 정말 잘 얻었다니까. 우리 딸을 저렇게 위해 주고 얼마나 가정적이야, 지금 세상은 남자들이 여자를 좀 도와줄 줄 알아야 해"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분명, 딸을 대하는 마음과 며느리를 대하는 마음이 같을래야 같을 수 없는 법이 아닙니까 그런데 나오미는 진정으로 자기 며느리를 "딸"로 여긴다. 여기 나오미의 자상함과 배려심이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위기를 만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기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자기 입장"만을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자기만 위해주길 바라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순간에 오직 당신 자신만을 생각했더라면 오늘 우리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행복한 가정이 회복되는 첫 번째 단계는 가족 모두가 "나만 위해 달라"거나 "내 말만 들어 달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서로를 위해 주고 이해해 주려는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아다니면서 탈선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 집에는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 주고 사랑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길에서 방황하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우십니까 아니면 무거우십니까 "안식"이 있는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 가족을 위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소유하고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기심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이 실천될 때, 우리 가정은 쉼이 있고, 안식이 있는 가정의 본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문에서 '나오니'의 마음 씀씀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은 교훈입니다. 또 한 가지,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순종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가정이 안식과 쉼의 자리로서의 본연의 몫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룻의 성품은 본문을 통해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단연 "순종하는 여인"이었습니다.
4-5절 "그가 누울 때에는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 이다 하니라"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고대 중동지역의 관습을 좀 알아야 합니다. 팔레스틴 지방의 관습에는 '친절을 베푼 남자가 자기의 배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다면 여자가 먼저 다가가서 프러포즈를 해야만 결혼에 이를 수 있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지금 이 지방의 결혼 풍습을 알지 못하는 이방 모압여인입니다. 게다가 룻은 지극히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2장22-23을 보면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다른 외부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행동을 했고, 3장11절을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네가 현숙한 여인이라는 것을 이 성읍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룻이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6절 "그가 타작마당으로 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여러분, 현숙한 여인이었던 룻이 시어머니가 지시하는 대로 다 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씀이야'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뢰관계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문화가 다른 곳에 와서, 모압의 풍습과 상식으로 용납이 되질 않는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을 존중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원인은 불신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들이 그 분의 죽음이 바로 나 자신으로 인함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새사람이 되어서 용서받고 거듭날 때, 내가 어떤 종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일군으로 일할 수 있는가 하는 그 가능성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신뢰합니다. ' 바로 그 십자가에 감격하고 우리가 비로소 "나는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모로서 네가 어디에 있든지 누굴 만나든지 너를 믿는다. ' '나는 당신의 배우자로서 누가 뭐래도 당신을 믿습니다. ' 이러한 신뢰가 회복되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가정의 안식은 신뢰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룻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속더라도 또 다시 믿어봅시다. 사람이 한번 두 번 속은 경험이 있으면 다시 사람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믿어주시고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시고 내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신뢰를 통해서 안식의 가정을 되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안식의 가정을 세워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지는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보아스는 책임 있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책임 있는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룻이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다. 이런 일을 당하였을 때 남성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인다.
자기의 발치에 걸린 사람이 여인임을 알고, 그 여인을 대책 없이 품어 버리던가 아니면 기겁을 하고 놀라, 소리치고 이 여인을 망신주어서 내 쫓아 버리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살펴보라. 우선 그는 룻의 이러한 행동이 자신을 향한 프러포즈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12-13절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그 밤에 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15절을 보면, 그는 룻에게 보리곡식을 여섯 되를 룻에게 주어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윤리적으로 최선의 덕을 베풀면서 합법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참으로 사랑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온 천지가 다 물인데 막상 마실 물이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는 사랑이 너무 흔하기에 진정한 사랑을 보기가 힘든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책임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정욕을 해결하고,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인스턴스 사랑은 난무하지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고,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랑을 고갈되어있습니다. 보아스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그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책임질 줄 아는 남편입니까 나는 책임질 줄 아는 아내입니까 나는 책임 질 줄 아는 부모입니까 나는 책임질 줄 아는 자녀입니까 늘 스스로 돌아봐야할 덕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다음에도 성령으로 날마다 책임 있는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주는 내 맘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 새롭게 세우시네. "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10:28-29)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고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고 나를 붙드시되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시는 든든하신 나의 아버지. 그 분은 구원이후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식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격,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랑으로 세워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질서와 덕을 세울 때, 여기서 가정의 신뢰가 싹 트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곳이 진정한 "보금자리"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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