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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헛기침이 힘 있는 가정

본문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희망이 있는 가정에는 세 가지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희망이 있고 다복한 가정은 먼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후사를 보면 그 가정이 희망이 있는 가정입니다.
가난하게 사느냐 부자로 사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가정에 대를 잇는 자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대가 끈기면 멸문하는 집안입니다.
그러기에 저 먹을 것 제가 갖고 태어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으니
살 것 걱정 말고 주시는 대로 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른들의 이런 말씀이 틀렸습니다.
한 사람이 저 먹을 것을 제가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온 식구들이 먹을 것과 온 나라의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같고 태어 납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식구가 10명이 되면 걱정이 없으며
국가도 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1억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쿠웨이트 싱가폴, 스위스)
그런데 요새는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희 동네에서 어린이 하나가 태어나 20년만에 경사가 나답니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한 번도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늘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쁘게 보입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울음 소리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들리지 않으니 이것 참 걱정입니다.
두 번째는 젊은이의 글 읽는 소리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하고 입신양명을 하면 그 가정이 활짝 피게 됩니다.
그래서 글 읽는 소리는 그 가정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계임하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이것 참 큰일입니다.
세 번째는 노인의 헛기침 소리입니다.
즉 가정에는 노인 어른이 있는 것 이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며 희망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고령화되어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노인이 가정에는 없고 경로당에만 있습니다.
노인들은 기침을 자주 하시게 됩니다.
목이나 기관지에서 나오는 기침이 아니라 헛기침을 하셔야 합니다.
이 헛기침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어른의 존재를 알려주는 사인입니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헛기침 한번만 하면 가정에 기강이 확 잡혔습니다.
뛰어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조용하구요.
부부가 언쟁을 하다가도 어른이 헛기침 한번 하면 깜짝 놀래서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혹시 삼촌이 밖에서 한잔하고 흔들거리며 들어오다가도 안에서 들리는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뜻 낫습니다.
확실히 그때는 가정이든 사회이든 어른의 시대였습니다.
어른이 그 집안의 중심이었고 모든 일을 어른 위주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아이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마다 아이를 하나나 둘을 낳아 놓고 그 아이들을 집안의 어른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TV 채널 선택권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아이들이 크니 지금은 청소년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을 가만히 보면 청소년들이 왕입니다.
노인은 더 이상 집안의 어른이 아닙니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이제 노인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늘어나는데 그 어른들은 이제 골방 신세가 되어 갑니다.
헛기침을 하여 가정의 기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저 조용히 있어야
눈치 안먹고 밥 한술 얻어먹는 안타가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간간히
이런 신문기사 제목들이 우리를 허탈하게 하고 있습니다.
“반찬 투정 꾸짖는 아버지 살해한 20대 긴급체포”,
“중풍 칠순 노모 살해한 50대 아들 영장”,
“꾸중들은 손자 할머니 살해”,
“치매 걸린 아버지 구타 살인”,
“고부갈등 고민 아들 치매 80대 노모 강변에 고려장”,
“용돈 거절당하자 어머니 폭행”,
“집 팔게 인감 달라며 아버지 폭행 30대 영장”,
“장가 보내주지 않는다며 아버지 폭행”
문제는 이런 존속 상해 및 살인 사건, 노 부모 유기 사건이나 노인 학대 사건 사례들이
극히 일부 불효자들의 반 인륜적 패륜행위로 행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인 학대가 사회에서 아주 빈번하고 보편적으로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른 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는 것이 두려운 시대가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말 행복한 가정을 지키려면
오늘 읽은 5계명을 우리 가정들이 지켜야 합니다.
자 그러면 십계명을 분석하면서
우리 가정에서 5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본래 십계명을 두개의 돌 판에 나뉘어 새겨서 모세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첫 돌판에 1-4계명이, 둘째 돌판에 5-10계명이 쓰여졌 던 것입니다.
 첫째 돌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들(대신 윤리)을
기록하고 있다면 둘째 돌판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계명들(대인 윤리)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5계명이 인간 대 인간이 지켜야할 6개의 계명 중에서
제일 중요한 첫째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할까요
부부의 도리, 친구와의 우정, 사제지간의 윤리, 직장 동료애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윤리도 많고 나누어야 할 정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이 땅에서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경은 무엇일가요
공경은 환경을 고쳐 드리는 것이 아니고 부모에 대한 바른 자세와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일까요
부모 공경하려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게 한집에서 24시간 모시고 살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섬기는 것이 꼭 그것만이 최선은 아닙니다.
형편에 따라 정말 부모님을 모시기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 일을 담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도 꼭 한집에서 모시고 살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에베소서의 6장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경하는 자세입니다.
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공경은 히브리어에서 '카베드'(kabhed)라는 단어로
쓰여졌는데 "무겁다", "무게를 둔다'는 뜻으로 부모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윤리 수준을 넘어서는 마음으로
부모를 귀하고 정말 소중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까요
하는 일도 없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지 못해서 온 가족이 달려들어야
모실 수 있는 부모님인데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까요
공경이란 말의 카베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큼 소중하게, 여호와 하나님만큼 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큼 위엄 있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의 헛기침에 힘을 실려 드려야 하고 위엄을 갖추어 드려야 합니다.
왜 이렇게 귀하고 소중하고 위엄있게 부모님을 대하여야 할까요
이유가 없습니다.
엡6:1에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이 옳다”는 말은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이것이 왜 옳습니까
설명의 이유가 없습니다.
부모이기에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나며 부모는 자기의 젖을 먹여 키웁니다.
부모는 모든 정성과 모든 것을 을 다하여 자식을 키웁니다.
왜 그렇게 하나요
왜 부모는 굶어가면서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일을 해야 하나요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한 이유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데 꼭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것은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창조는 바로 질서를 만드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를 성경은 모든 것이 혼돈하였다고 합니다.
혼돈이란 질서가 없는 것, 무질서를 말합니다.
그러나 창조하셨다는 그 창조는 질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가 없는 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육체에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살았다는 것은 육체의 모든 지체와 가장 작은 세포까지도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세포에 질서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회사가 망했다는 것은 회사에 질서가 없어진 것입니다.
나라가 통치력을 상실하여 공권력이 무너지고 질서가 없이 혼란에 빠지면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그 가정은 망한 것입니다.
부모와 남편와 아내와 자식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살아가면
그 가정은 생동적이고 희망이 있는데 그 위치를 상실하고 다 각기 자기들 마음대로
질서 없이 살아가면 그 가정은 행복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고 망한 것입니다.
부모의 헛기침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위엄이 세워져야 합니다.
집안에 어른이 있어서 모든 가족들이 자기 자리를 못하여야 합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지 못하고 아내가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못하고
아이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살아있는 희망의 가정이 되며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모시고 살아야 무엇합니까
어른을 똥치던 막대기로 취급을 하면 그것은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정말 다복하고 사람이 사는 것 같은 그런 가정을 이루기 위해
부모님을 공경하여 헛기침에도 힘이 있고 위엄을 실어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땅에서 잘 되기 위해서
엡6:2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약속이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에는 약속이 없는데 유일하게 이 오 계명에만 부연된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출20:12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엡6:3에 의하면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이 땅에서 잘되고 잘사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악속하신 약속입니다.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목숨이 아깝거든 부모를 잘 공경 하십시오)
부모를 잘 공경하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 유익하고 행복이 있습니다.
부모가 집에 계신 것 그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말씀이 있지요
인생에는 양과 질이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 양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는 것 이것은 질입니다.
바로 살고 거룩하게 살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는 이 질이 없으면
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사는 것이 없으면 오래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내 머리에 불덩이 만 더 쌓아놓은 꼴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고 사는 사람은 질이 다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말씀 드렸지요.
교회 사모가 고관절을 수술하였때입니다.
큰 형수와 막내 제수씨가 내려와서 사모가 병원에 있는 동안
어머님을 잠시라도 모시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저의 심정은 얼마 사실지도 모르는데
이 어머님을 모시는 행복을 빼앗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절대 모셔가지 못합니다.
부모의 헛기침에 위엄과 힘이 있는 가정 그 집 잘되는 가정입니다.
그 가족은 벌써 삶의 질이 다른 사람을 살고 있습니다.
부모를 개떡 같이 여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부모님을 하늘 같이 공경하며 사는 사람과는 삶의 질이 다릅니다.
행복의 질이 다릅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하여 삶의 질이 다른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노인 학대의 이야기을 언급했습니다만
부모 학대는 욕하고 구타하고 살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잘못된 일을 보라는 듯이 하고 사는 것, 이것이 부모학대입니다.
가장 잔인한 부모 학대, 노인 학대는 부모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부모의 가슴을 찢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모의 피를 말리는 일이 이것보다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한동안 따뜻한 책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이 철환씨의 책 “연탄길”에 보면
"먼 불빛"이라는 제목의 실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현태란 이름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사고치고 친구들과 패싸움하고 심지어 절도까지-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아들, 언제 교도소로 들어갈지 모르는 위태 위태한
자식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루하루 가슴이 터지고 피가 마르는 삶을 삽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충격 요법으로 아들이 교도소에 가기 전
자신이 먼저 교도소에 가서라도 자식의 교도소 행을 막아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귀금속 가게에 들어가 마음에 없는 도적질을 하는 체 하고
쉽게 붙잡혀 교도소 가게 되었고 교도소에 간 아버지를 아들이 면회를 옵니다.
“아들아, 이 아버지를 용서해라. 사는게 너무 힘들어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이 모양이니 넌들 바른 길을 갈수가 있었겠니.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너는 꿈에라도 이런 곳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교도소는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곳이란다. ”
이런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들 현태를 붙잡고
통곡으로 절규하면서 폭탄 선언을 합니다.
“현태야, 할 말이 있다. 네 아버진 도둑질 같은 거 할 분이 아니시다. 정말이다.
이 엄마가 네 아버지를 안다.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 하실 분이 아니다.
너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거야. 교도소가 사람 있을 곳 아니라는 걸 너에게 보여 주려고-생떼 같은 네 놈, 거기서 네 젊은 시절 다 보낼까봐서-네가 갈 그 곳에 미리 가셔서 네가 오는 걸 막아 보시려고”
현태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충격, 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아들 현태는 이 날부터
마음 고쳐먹고 다시 태어나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검정고시 치르고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새 인생의 길을 걷습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의 끝을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빛을 거부했던 아들의 어둠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말 그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 주었다. 어둔 밤바다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 두고 바라 볼 먼 불빛, 아버지, 아버지-. ”
이 실화는 어느 아주 특별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압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모습이며 간절한 염원입니다.
아들이 갈수 있는 불행한 길을 막기 위해 교도소로 먼저 들어간 아버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입니다.
이 아버지 어머니를 세상에서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헛기침에도 힘을 실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제 5계명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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