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신 팔지 말자
본문
1. 똘똘이는 출장을 갔다 돌아온 아버지에게서 선물로 게임기를 받았습니다. 신바람이 난 똘똘이는 아버지에게, “고맙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엄마, 우리 아빠 최고죠. 멋지죠. ” 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게임기를 가지고 노느라 정신 팔린 날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도 사랑도 그만큼 더 잊어버렸습니다. 게임기를 선물한 아버지의 뜻인 성장을 위한 공부도 점점 더 소훌히 했습니다. 똘똘이의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게임을 더 잘 할 수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층은 한동안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주어진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느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율법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더 강해지는 바람에 영적 해석이 아닌 문자적 해석에 치우쳐 율법주의에 빠져버렸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율법을 우상처럼 신봉하는 지도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한 서기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의 도전을 받으신 예수님이 기막히게 논박하신 것을 들은바 부활을 믿는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율법 박사 격인 랍비들은 율법에는 248가지의 적극적인 계명과 365가지의 소극적인 계명을 합해서 모두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들 중에서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랍비들이 토론하고 있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는 대원칙 또는 으뜸가는 계명을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런 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게 힐렐(Hillel)의 말입니다. 주전 약 40년부터 주후 약 10년까지 산 힐렐은 이방인에게서,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 ”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전 율법이고, 나머지 율법은 그것에 대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키바(Akiba)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율법의 본질이다. ”라고 하였고, 의인 시몬(Simon)은 “세 가지, 즉 율법과 예배와 봉사 위에 세계는 성립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그 모든 계명을 다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자유로운 힐렐과 쌍벽을 이룬 엄격한 샴마이(Shammai)는 율법을 하나의 최고의 계명으로 총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모든 계명이 다 중요하니 계명이란 계명은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은 “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신명기 6:4 이하를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6:4은 기도문이자 유일신 신앙고백인 쉐마(Schema)의 중심 부분을 이루는 구절입니다. 히브리의 예전(禮典)에서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이 쉐마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쉐마의 기본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과 여호와 하나님과 유대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쉐마를 암송하면서 회당 예배를 시작하는 고대의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쉐마의 세 개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작은 가죽 상자인 성구함에 넣고는 아침 기도 때에 이마와 왼팔에 동여매어 율법 준수를 잊지 않는 징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쉐마를 옮겨 적은 양피지를 금속이나 나무로 만든 작은 원통형 상자인 메주자에 넣고는 메주자를 대문과 방문에 붙여 두어 드나들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조석으로 기도문이요 신앙 고백인 쉐마를 낭송해야 했고, 그때마다 선민임을 감사한 심정으로 상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요지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첫째, 온갖 것에 마음을 쓰고 남은 일부가 아닌 온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 웹사이트인 kmcweb의 자유게시판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면서 침략국인 일본에 충성한 이들의 명단과 죄상이 실렸습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인 목사이면서 대량 살인과 엄청난 문화재 약탈과 집단 강간 등 온갖 흉악한 범죄의 집합체인 침략국 일본에 충성한 이들의 명단과 죄상도 실렸습니다. 처절하게 울며 회개해야 할 그들 중에는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린 이들도 있었고, 교단장이 되어 거들먹거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해방된 나라를 위해 충성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호와 하나님과 마귀의 하수인인 침략자들을 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라고 했습니다.
둘째, 목숨을 아끼지 말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위한 순교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을 보면,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보혈로 구원하신 주님 안에서 교인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자랑은, 큰 교회도 예배당 건물 평수도 유명해지는 것도 유력한 사람을 아는 것도 종교적 감투를 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자랑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생활이었습니다.
셋째, 뜻을 분산시키지 말고, 뜻을 다하여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뜻”의 헬라어 디아노이아스(διανο?α?)는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생각’, ‘기질’을 의미합니다. 좌나 우나 중도, 어떤 사상이나 이념, 어떤 감투나 어떤 사람 등에 정신 팔리지 말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정신 팔리는 사람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넷째, 힘을 분산시키지 말고, 힘을 다하여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힘”의 헬라어 이스퀴오스(?σχ?ο?)는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영혼의 전체적인 힘을 나타내는 심리학적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한 시간의 예배조차도 온 영혼을 다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숨을 얻었고, 그 사랑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은 우리는 우리의 일부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전 존재를 쏟아 붓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부부생활이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 생업이나 사업, 일하는 것이나 공부하는 것 등 모든 생활이 자기애나 가족애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 사랑으로 일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고, 영적인 힘을 다하여”라고 네 번씩이나 ‘다하여’를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과 우리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일환으로서 자연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사랑,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섭리의 대상인 자연과 일, 특히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인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연결하여, “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둘째 부분인 인간에 대한 계명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계명을 처음으로 결합하신 것은 이웃 사랑을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 주석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공산 독재자에 대한 사랑이 악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 주고, 따라서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케 하면 올바른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칭찬이나 상급이 사랑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망이나 징벌이 사랑인 사람도 있습니다.
4. 맺음말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로 세상에 살게 되었고, 독생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고, 영적인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우리의 삶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일관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일환인 이웃 사랑은 모든 제물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층은 한동안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주어진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느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율법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더 강해지는 바람에 영적 해석이 아닌 문자적 해석에 치우쳐 율법주의에 빠져버렸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율법을 우상처럼 신봉하는 지도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2.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한 서기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의 도전을 받으신 예수님이 기막히게 논박하신 것을 들은바 부활을 믿는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율법 박사 격인 랍비들은 율법에는 248가지의 적극적인 계명과 365가지의 소극적인 계명을 합해서 모두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들 중에서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랍비들이 토론하고 있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는 대원칙 또는 으뜸가는 계명을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런 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게 힐렐(Hillel)의 말입니다. 주전 약 40년부터 주후 약 10년까지 산 힐렐은 이방인에게서,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 ”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전 율법이고, 나머지 율법은 그것에 대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키바(Akiba)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율법의 본질이다. ”라고 하였고, 의인 시몬(Simon)은 “세 가지, 즉 율법과 예배와 봉사 위에 세계는 성립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그 모든 계명을 다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자유로운 힐렐과 쌍벽을 이룬 엄격한 샴마이(Shammai)는 율법을 하나의 최고의 계명으로 총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모든 계명이 다 중요하니 계명이란 계명은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은 “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신명기 6:4 이하를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6:4은 기도문이자 유일신 신앙고백인 쉐마(Schema)의 중심 부분을 이루는 구절입니다. 히브리의 예전(禮典)에서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이 쉐마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쉐마의 기본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과 여호와 하나님과 유대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쉐마를 암송하면서 회당 예배를 시작하는 고대의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쉐마의 세 개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작은 가죽 상자인 성구함에 넣고는 아침 기도 때에 이마와 왼팔에 동여매어 율법 준수를 잊지 않는 징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쉐마를 옮겨 적은 양피지를 금속이나 나무로 만든 작은 원통형 상자인 메주자에 넣고는 메주자를 대문과 방문에 붙여 두어 드나들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조석으로 기도문이요 신앙 고백인 쉐마를 낭송해야 했고, 그때마다 선민임을 감사한 심정으로 상기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요지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첫째, 온갖 것에 마음을 쓰고 남은 일부가 아닌 온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 웹사이트인 kmcweb의 자유게시판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면서 침략국인 일본에 충성한 이들의 명단과 죄상이 실렸습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인 목사이면서 대량 살인과 엄청난 문화재 약탈과 집단 강간 등 온갖 흉악한 범죄의 집합체인 침략국 일본에 충성한 이들의 명단과 죄상도 실렸습니다. 처절하게 울며 회개해야 할 그들 중에는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들먹거린 이들도 있었고, 교단장이 되어 거들먹거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해방된 나라를 위해 충성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여호와 하나님과 마귀의 하수인인 침략자들을 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8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라고 했습니다.
둘째, 목숨을 아끼지 말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위한 순교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1을 보면,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보혈로 구원하신 주님 안에서 교인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자랑은, 큰 교회도 예배당 건물 평수도 유명해지는 것도 유력한 사람을 아는 것도 종교적 감투를 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자랑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복음을 위해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생활이었습니다.
셋째, 뜻을 분산시키지 말고, 뜻을 다하여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뜻”의 헬라어 디아노이아스(διανο?α?)는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생각’, ‘기질’을 의미합니다. 좌나 우나 중도, 어떤 사상이나 이념, 어떤 감투나 어떤 사람 등에 정신 팔리지 말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정신 팔리는 사람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넷째, 힘을 분산시키지 말고, 힘을 다하여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힘”의 헬라어 이스퀴오스(?σχ?ο?)는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영혼의 전체적인 힘을 나타내는 심리학적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한 시간의 예배조차도 온 영혼을 다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절대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숨을 얻었고, 그 사랑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은 우리는 우리의 일부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전 존재를 쏟아 붓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부부생활이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 생업이나 사업, 일하는 것이나 공부하는 것 등 모든 생활이 자기애나 가족애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 사랑으로 일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고, 영적인 힘을 다하여”라고 네 번씩이나 ‘다하여’를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과 우리 것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일환으로서 자연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사랑,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섭리의 대상인 자연과 일, 특히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인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연결하여, “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둘째 부분인 인간에 대한 계명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계명을 처음으로 결합하신 것은 이웃 사랑을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 주석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공산 독재자에 대한 사랑이 악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 주고, 따라서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케 하면 올바른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칭찬이나 상급이 사랑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망이나 징벌이 사랑인 사람도 있습니다.
4. 맺음말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로 세상에 살게 되었고, 독생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적인 것을 다하고, 영적인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우리의 삶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일관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일환인 이웃 사랑은 모든 제물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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