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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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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분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이 그리 깊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장성한 믿음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의 신앙의 스타일만 앞세워서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비판하는 것도 문제이고

 또 먼저 믿는 사람들을 자기의 수준에서 평가하는 것도 퍽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에 어떤 일은 누가 봐도 옳고 그름을 명백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는 13장까지로 복음에 관한 중요한 문제는 모두 다 설명되었습니다. 개인은 어떻게 구원 얻을 수 있으며 인류는 어떻게 구원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행위들에 관해서 충분히 해답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부터는 비교적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문제라고 해서 절대로 소홀히 다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에 실패하면 결국 큰 것까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진리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서는 위대한 신학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구원과 인류의 구원과 실천도덕에 관한 완전한 교리의 골격입니다. 이 이상의 신학서가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로마서 이전에 로마서 없고 로마서 이후에 로마서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책이 그저 신학의 제시로만 끝나버렸다면 아마도 우리들에게는 로마서가 너무나도 장엄, 고상, 엄숙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교리쯤으로 이해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와 뒷부분 14장, 15장, 16장은 로마교회 성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뒷부분에서는 사도 바울의 인간미의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4장 이하는 이런 의미에서 귀중한 부분임과 동시에 그 내용으로 봐서도 오늘의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귀중한 메시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14장 이후에 전개되는 성경에 금하거나 명령하지 않은 어떤 의식적인 행사를 신자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3가지 큰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곧 남을 판단하지 말 것이며(14:1-12), 또 남을 시험하지도 말 것이며,(13-23)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를 본받아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15:1-13절). 그래서 오늘은 그 첫 부분을 본문으로 해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선, 믿음이 약한 자의 행위를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4:1절에 이르기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절의 말씀은 14장의 정신(精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문제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고라도 진리를 지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심의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용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른 성도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하여도 그것으로 무안을 주거나 낙심되도록 몰아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고 그를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제각기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피차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그 자유를 허용하고 관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별별 유형의 사람이 다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 말이나 행동이 참으로 어린애기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이는 많아도 신앙연령이 어려서 어쩔 수 없이 유치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령 우리 믿음이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할 터인데 가만히 들어 보면, 아직도 이런 저런 세상의 잡동사니 사상가들의 말을 중심으로 성경을 의심하고 있다든지,

 또는 세례를 받고 직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점을 보러 다닌다든지 혹은 꿈에 무엇을 보았다든지 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흑 어떤 분은 나쁜 습관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볼 때 함부로 자기 입장에서 판단해서 어린 신앙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고요히 기도하고 가르쳐 주고 받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도전을

 하거나 이단을 말할 때는 우리는 싸워서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문제 습관의 차이나 생각의 차이 정도를 가지고 연약한 자를 비판(批判)해서 일어서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2절에서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의 배경을 잘 이해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당시의 성도들 가운데는 육식하는 자도 있고 이것을 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육식을 피한 것은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건강을 위해서 채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헬라, 로마 등의 도시에는 우상의 제단에 바쳤던 고기를 장사꾼에게 불하하고 장사꾼은

 이것을 다른 고기와 섞어서 거리에 파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육식을 하는 경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고기까지 먹을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당시의 성도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른바 믿음이 강한 자는 고기 먹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마15:16-18절)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매이지 않는 강한 믿음과 강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고기 먹는 것을 신앙적으로 불순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즉 고기든 채소든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이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예민한 양심과 한결, 같이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는 마음을 오히려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는 날을 지키고 안 지키는 문제로도 서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5절에 보면 "혹은 이 날은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대해서 묵은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들을 안 지키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동일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다소 주관적이지만 믿음이 강한 신자도 있고 약한 신자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숙한 성도와 어린 성도가 함께 있는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마치 온 가족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손 주가 한 집에서 살아가듯 아무 문제(問題)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곤란한 것은 그 관계(關係)에서 사랑이 없어지면 깨어져 버립니다. 예컨대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우습게보고,

 소심한 자라고 비웃으며 심술궂게 먹고, 반대로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불경건하고 불성실하다고 해서 함께 동행(同行)하기를 부끄러워하고 그 둘 사이가 벌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대처는 이 사소한 문제의 불일치를 문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일치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피차 판단하지 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며, 작은 문제이므로 피차 양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교훈하십니다. 특히 믿음이 강한 자에게 따끔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사실 고기는 먹어도 좋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일으키고,

 자기주장을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21절의 말씀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으로 "주를 위하여"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6절에는 이 말이 세 번 나와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감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 8절에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를 위하여 란, 말씀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 란 뜻입니다.

 퍽 중요한 핵심단어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따라서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사실 교회 생활을 해 가는 중에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격의 차이나 취향의 차이도 있을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가령 등산을 가는데 어떤 사람은 도봉산으로 가자하고 어떤 사람은 관악산으로 가자 한다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 회 회비를 내는데 어떤 이는 만원으로 하자하고, 어떤 이는 천원으로 하자고 한다고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습니다.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모두 그 목적이 주를 위한 것이면, 꼭 자기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르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 주 안에서 이해하고 용납할 줄 아는 것이 크리스찬의 멋입니다.

 서로 의견과 견해가 다르다고 해도 상대방을 향해서 그런 생각도 있구나 하면서 받아야 합니다. 아, 저분도 주를 위해서 살려는 열심이 있구나 하면서 서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0:31절의 말씀처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기준이 내가 좋은 것이면 선한 것이고 내가 싫으면 나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선입견이 우리의 판단(判斷)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合理化)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있겠습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일이 정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겠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와 원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았고, 그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삶의 방식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판단 기준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의 모습은 다를 바가 없고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의 신앙의 문제도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우리로서 지체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견해와 다른 양심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를 비난하지 마시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마음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주에게로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해서 주위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신앙의 형식이 다르더라도 용납하고 서로 사랑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도 작은 배려가 우선되어야합니다. 작은 배려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받게 합니다. 교회생활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다른 사람을 교회로 안내하게 됩니다.

 처음 나온 사람이 먼저 신앙생활 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게 되면 교회 전도의 문은 닫혀버리고 맙니다. 나의 작은 배려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하게 넓혀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을 저와 여러분이 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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