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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농촌 청년 엘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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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약의 엘리사가 농장에서 일하던 중에 엘리야를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가 그의 제자가 되는 장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 구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 시대라면 모세시대, 엘리야와 엘리사시대, 그리고 예수님과 열 두 제자와 사도 바울의 시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율법을 받아 전함으로 구약의 터전을 마련했고, 예수님은 구약의 배경 아래 오신 메시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였습니다. 그 중간에 엘리야와 엘리사는 구약의 종교가 바알 등의 우상 숭배로 인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립한 시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전환기에는 특별한 인물을 통해 특별한 이적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농촌 청년 엘리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사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보낸 시므온 지파의 대표인 사밧의 아들(민 13:5)입니다. 그는 요단강 북쪽 아벨므홀라라는 한 촌락에 살고 있던 농촌 청년입니다. 엘리야의 제자로 선지자 직분을 맡은 이래 여로보암과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에 57년간 선지로 역사한 분이십니다.
 엘리사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에 의해 이미 입증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구원이시라는 뜻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행한 16종의 행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을 증명했고, 엘리사가 죽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은 그에게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왕하 13:14).

2. 엘리사의 근로(19절)
 그는 청년으로서 사업에 근검하였는데, 자기 부모의 직업을 도와서 일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소 12겨리를 모아서 경전한다고 했는데, 그 정도라면 부호한 농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인 농민의 아들들은 보통 흙냄새를 맡으며 농장에서 종들과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부모의 산업이 많다고 하여 놀고먹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엘리사를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로 부르셨습니다.
 옛날 다윗 왕도 산곡에서 양을 치다가 부름을 입었고, 기드온 대장도 농촌 보리타작 마당에서 부름을 입었고, 아모스 같은 선지도 드고아 목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기독 청년들도 경제적 독립생활을 하며 남을 의지 말고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3. 엘리사의 열려 있는 마음의 자세
 엘리사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주의 부르심에 대해 열려 있었습니다. 계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비록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만, 그의 마음은 주의 부르심에 대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야의 작은 동작에도 그는 곧 응답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리는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물욕이나 명예나 향락에 열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허무감과 후회감과 불안감뿐 일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분주한 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열려 있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아람의 군대의 장관 나아만이 찾아왔을 때의 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아만이 나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아람 왕은 그를 이스라엘로 보내어 병 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를 엘리사에게 보내었으나,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고 깨끗함을 받으라"고만 했습니다. 엘리사가 친히 나타나 안수기도라도 해 줄 것을 기대했던 나아만은 실망하였고, 노하여서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종들의 권함을 받아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고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놀라고 감격하여 후한 예물을 엘리사에게 드렸으나 엘리사는 이를 마다했고,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서 여호와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자기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가서 은과 옷을 취하여 감추어 두고 엘리사 앞에 나왔습니다. 그 때 엘리사의 말이 왕하 6:26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고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의도는 그의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물과 땅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신념을 적국 아람의 장관의 마음에 넣어 주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오직 물질에 눈이 어두워 엘리사의 의도를 수포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엘리사의 마음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또 그의 민족에 대해 열려 있었습니다.

4. 엘리사의 결단적 행동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엘리야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원컨데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얼마나 민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입니다.
 이에 엘리야는 엘리사의 소명에 대한 응답이 너무 예민하여 빨리 응답하므로 엘리사의 요청을 허락하여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허락을 얻자 곧 소 한 겨리를 잡고 농기구로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일어나 엘리야의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의 일하던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엘리야를 따라 갔습니다. 그것은 그의 결단성을 말합니다.
 엘리사가 소를 잡아 백성들과 나누어 먹은 것은 이별연이라 하겠습니다. 이별연이란 자신의 결심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단호한 결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령 신앙의 조상이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의 경우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고향을 떠나 갈 바를 모르면서 나선 것은 결단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신앙의 절정이라 볼 수 있는 것으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친 것과 같은 결단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표시된 아브라함의 신앙은 순종과 단념과 결단이었습니다. 순종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명에 의한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단념이란 드디어 아들을 결박하여 잡기까지 다른 수가 생겨 아들을 죽이지 않는 길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한 단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단이란 최후에 칼을 아들의 목에 대는 그 동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동작에서 그의 위대한 신앙은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약의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배와 그물, 그리고 잡은 고기를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그의 집에 모셨을 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았습니다.
 인생이란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결단의 연속입니다. 이 결단들이 잘 이루어질 때 인생은 성공적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 없이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있어서 그의 열렸던 마음자세는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는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그 진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단에서 그 일은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칼라일의 말에 고목이 넘어질 때는 요란한 소리가 나지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작은 씨앗은 땅에 떨어질 때 조용하나 미구에 거기에서 움이 트고 자라서 다시 나무가 되며 결실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농장의 구도자 엘리사처럼 화려한 장면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도 소리 없이 떨어지는 복음의 씨앗을 감지하시기 바랍니다. 종의 부르심에 대한 엘리사의 열린 마음자세와 예민한 감각과 결단적 행동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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