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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예배] 헌신인가 낭비인가

본문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건을 놓고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의 반응은 예수님의 반응이고 다른 하나의 반응은 가룟 유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유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잘했다,좋은 일을 했다는 것이었고 가룟 유다의 반응은 쓸데없이 비싼 돈을 낭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한 가지 사건을 앞에 놓고 이렇게 상반된 견해와 반응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본래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가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베다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동네에 경사가 겹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과 어울려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을 초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잔치 자리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데나리온 어치가 되는 것이니까,그 당시로서는 장정 1년분의 임금이 되는 액수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장정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행위를 둘러싼 두 가지 견해와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가룟 유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4-5절을 부목해 봅시다. “제자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 얼핏보면 가룟 유다야말로 굉장한 인도주의자 같기도 하고 인간애,인류애가 넘치는 그런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절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중 회계 책임자였습니다. 그의 흑심은 돈 주머니에 돈이 많이 들어와야 횡령도 하고 유용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향유도 물건으로 헌납하면 팔아서 돈으로 바꾸고 그런 후에 그 돈도 작당한 적용으로 유용하고 횡령하겠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에게 몇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1)마리아의 숭고한 사랑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유다는 그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고 평가햤습니다. 마리아로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려는 사랑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동기가 불손합니다. 마리아의 행위를 반대한 것은 간나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3)언행이 맞질 않습니다. 만일 그토록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애틋한 정을 지녔다면 뭔가 한 일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거나 도와 준 일이 없습니다. 제것은 아끼고 남더러먄 구제 안한다고 떠벌린 사람입니다.
한국 교회 1년 예산이 4400역이나 되는데 그 돈을 다 무엇에 쓰느냐,그 돈이 다 어떻게 낭비되었냐는 등 비판과 힐난의 소리가 최근 도하 각 매스컴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우선 4400억의 출처는 교인들이 술 담배 안 먹고 음란 방탕하지 않고 아꼬고 모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인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4400억을 낭비되는 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한국 사람이 1년에 마셔서 없애는 술값이 1조 7천역이라고 합시다. 교회 예산보다 4배가 많습니다. 한 여인이 주무르고 없앤 돈이 7천억이었다고 합니다. 전국 교회의 거의 배에 가까운 돈이 한 사람의 농간에 놀아났습니다. 우리 분명히 기억합시다. 문제는 4400억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를 30억,50억,100억 드려서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쪽에다 화살을 겨누고 과녁으로 삼는 사회 풍토 그 배후가 문제입니다. 나는 그 세력을 교회의 전도를 막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불의와 불법의 세력,나아가서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해인사엘 다녀왔습니다. 웅장한 해인사 안에 20여 개의 대형 암자 비슷한 것들이 건축되어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집 한채의 값이 수억짜리였다는 것입니다. 단청 자체가 천연 색소들어어서 값이 비싸다는 것입니다. 문화재 보호라는 명목으로 산중에다가 수십 억짜리 집을ㄹ 짓고 꾸미는 쪽에 화살이 가질 않습니다. 호텔이나 술집은 줄을 대고 들어사도 그러나 보다라고 넘겨버리는 사람들이 교회 문제만 나오면 핏대를 올리는 까닭!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낭비했습니까? 저는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 현대 교회 안에자리잡고 있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의 입장과 위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이해할 것을 부탁합니다.
첫째,교회는 이 사회의 부패와 죄악을 막는ㄴ 보루입니다. 본래 영국을 위시한 유럽 선진 국가들의 조상은 바이킹족,즉 해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었을 때 선진국가가 됐습니다. 세계 200여 국가들 가운데 신진국 대열에 끼는 나라는 30여국에 달합니다. 그들 30여국은 거의가 다 기독교 국가라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고 자원없는 나라에 교회마저 없었더라면 이나라 꼴이 뭐가 됐겠습니까?
둘째,교회는 민주주의의 요람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외국인이나 한국 교포들이 한국에 자유가 있느냐? 김일성의 나라와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대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무엇으로 한국에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줄 아십니까? 교회가 있다,교회가 성장한다,교회에 와 보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교회의 자유와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민주화를 막자는 것밖에 안 됩니다.
세째,공산당을 이기는 절대 세력이 교회입니다. 유물론과 유신론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때 그때 그 노선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또 사상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자유당이나 공화당때 충성하던 사람들이 민정당 정권에도 충성하는 것을 보면 이념이라든지 노선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럴 수 없습니다. 즉 공산당도 좋고 예수도 좋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최후의 일각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없다는 유물론 공산당과 싸울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인 것입니다.
네째,가장 강력한 애국 단체가 교회입니다. 전국 교회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잘되길 기도하고 있고,정치를 잘하길 기도하고 있고,사회가 안정되길 기도하고 있으며,남북이 통일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숨 걸고 나라를 사랑하는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북한이 공산화가 되자 내노라는 애국 지사들은 다 남으로 내려왔지만 기독교인과 목사님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남아서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늬 유혹을 물리칩시다.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구제비로 쓰자”는 유혹 때문에 교회에 돌을 던져서는 안됩니다.
2. 예수님의 입장을 살펴봅시다. 7-8절을 주목해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가룟 유다는 낭비로 보았지만 당사자이신 예수님은 “저의 행위를 나무라지 말라 나의 죽음을 위해 부은 향기로운 기름이니라”고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간단히 드러났습니다. 누구의 견해를 따르느냐,누구의 입장을 지지하느냐 입니다. 그룟 유다의 노선을 따르느냐 예수의 노선을 따르느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생각하기로 말하면 모든 것이 다 낭비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노선을 따른다면 헌신 행위이며 모든 것이 거룩한 봉사로 보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값비싼 물질을 바쳤고,정성을 바쳤고,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헌신의 행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3절 마지막을 보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마드리쉬(Midrash)는 “좋은 향수 냄새는 침실에서 식당으로 퍼져 가고 좋은 이름은 세상 이끝에서 저끝으로 전하여 간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돈의 가치,즉 물량적 가치보다는 그 뜻,그 의미에 있어서 더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부은 향유 냄새는 기독교 2000년 역사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향기롭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리아의 행위는 낭비였습니까? 헌신어었습니까? 가룟 유다와 같은 인생관이나 신앙관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낭비중의 낭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를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눈의로 본다면 그것은 거룩한 헌신이로 보일 것입니다. 나를 키우느라 일생을ㄹ 다바치신 내 어머님의 생애! 자신을 주의 종으로 만들겠다고 일생 기도하시고 지금도 기도하시는 나의 어머님의 그 정성을 누가 낭비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누가 어머님의 갸륵하고 숭고한 희생과 사랑을 낭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행위는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리아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낭비라고 혀를 놀리고 돌을 던져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헌신! 바로 내가 배우고 따라야 할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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