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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자신의 행실을 통한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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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를 믿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장 많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 뭐냐 하면 우리의 인격의 변화입니다. 교육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30세가 넘어서는 자기 성격을 고치기 힘든다고 합니다. 교육학자들의 말마따나 타고난 성격을 고치기도 힘든데 그것이 굳어질대로 굳어진 30년이후의 인격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지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보편적인 원리의 차원에서 이것은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다시 테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격의 변화를 의미하며 인격의 변화란 그리스도인 된 새 사람됨의 외적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은 가장 객관적인 결실은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최대의 변화가 아니라 기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테어난다는 것은 자기의 인격은 그대로 있고 단순히 영적인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를 통한 전반적인 인간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런 예는 성서의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새로 주신 땅을 분배할 때 자기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골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땅을 놓고 롯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쫏을 택하겠다. (창 13:9) 아마 한국의 크리스챤들이 이 아브라함의 이런 인격적인 변화를 부동산투기와 연결하여 진지하게 읽고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을 한다면 적어도 기독교인들로 인한 투기는 그만큼 감소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왕과 귀족들을 친구로 둔 소위 예루살렘의 저명인사였습니다.
요즈음 우리 한국정계로 말하면 TK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난 후 그는 과거에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주저하지 않고 전했습니다. 이사야는 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회정황을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판단하는 정의의 인격의 소유자다 되었습니다. 신약에도 이런 인격의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삭게오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영적으로 변한 뒤에 자기가 토색한 것을 4배가 다시 갚아내는 인격의 구체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저는 아직 부자가 예수믿고 자기가 번 많은 재산을 4배로 사회에 환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두 번 재산이 토색하지 않은 것이면 문제는 없겠으나 어떤 분의 말을 들으니까 부자가 된다는 것은 정당하게 벌어서는 결코 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을 하던데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격의 변화를 보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우선 자기 이름을 가장 큰 자란 뜻을 가진 사울이란 이름을 가장 작은 자란 뜻의 바울로 바꾸고 그 오만한 정통유대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유대인이 발에 때만도 안 여기던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고 자기의 학문, 사회적 신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정도로 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만큼 가문으로나 학벌로나 출신성분으로나 실력으로나 재산으로나 외국어실력으로나 어느 것 하나 남한테 뒤지는 것이 없었고 뽐낸다면 엄청나게 뽐낼수 있는 사람인데도 지극히 자기를 겸손하게 낯추고 남의 노예였던 사람과 깊히 사귀는 정도까지 그 사람의 인격이 변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신앙인이 된 이후에도 그 인격이 따라서 변하지 않는 사람의 비극도 보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수를 믿었지만 그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변하지 않아서 자기 재산을 판돈을 다 헌금하기로 되어있는데 몰래 빼돌렸다가 벌을 받아서 죽은 예도 있습니다. 이 인격의 변화가 오늘 말씀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로 기이한 질문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예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해라" 하고 아버지가 말씀을 하시니까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을 했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둘째 아들에게 똑 같은 부탁을 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만 하고 실제 일하러 가지는 않았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은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맏아들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받아서 예수님은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체적으로 참회하고 그 인격이 변하였습니다. 세리도 그렇고 창녀로 지낸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많은 소위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믿지 않는, 즉 그 행동에서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님은 이 비유로 비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미 교회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명목상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자기의 죄악된 삶을 뉘우치고 그리스도앞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헌신의 삶이 없는 사람보다는 우리가 밖에 죄악된 삶속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진실로 참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서 이 인격의 변화, 즉 구체적인 사람의 변화와 관련시켜서 생각해 볼 때 그 두 아들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는 사실을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실제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행동을 인격의 변화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 행하는 증언이라고 간주해 본다면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우리가 연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했는데 나중에는 뉘우치고 가서 일을 했다고 했읍니다. 이것은 마치 교인은 아니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 즉 의롭고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고, 정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일들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 앞에서는 잘 듣지만 실제 일은 하러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은혜를 받고 뭐 남 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 같은데 그가 사회속에 들어가면 전혀 여호와 하나님의 부탁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쫓아 사는 그런 사람으로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옳겠느냐?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보시기에 누가 더 아름다우냐 하면 맏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2천년전에 당신의 제자들을 놓고 말씀하신 비유에 지나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교회와 사회안에서는 비유가 아닌 사실로 나타나는 예가 허다하다는데 우리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위의 예수님의 비유를 근간으로 해서 기독교인과 관계하여 네 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구분해 볼 수 있겠습니다.
1. 첫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2. 둘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3. 셋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4. 넷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볼 때 가장 나쁜 인간상이 어떤 것입니까?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까? 위의 예수님의 비유에 비춰보면 둘 째 인간상인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의 경우에는 그는 진지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란 이름은 가졌으되 그 내용은 아닌,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읍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이런 결론이 있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정말 세상속에서, 직장속에서, 사회속에서 등경위에 놓인 등불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아도 예수믿는 사람, 그것도 독실하게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의 잘못은 그렇게 잘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등불이 등경위에 얹혀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나 직장의 잘 보이는 자리에 놓여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그것이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부가 됩니다. 우리가 정의롭게 행동하면 그로써 세상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하고 앙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의하게 행동하면 그로써 세상사람들은 우리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가리우는 일을 할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전도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기독교인답지 않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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