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3)
본문
‘일소일소 일노일노’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웃을 때마다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낼때마다 한번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미국 메릴랜드대학 연구팀에서 “심장병 예방에는 웃음이 보약”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어떤 불편한 상황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웃는 사람보다 심장질환에 시달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팀의 마이클 밀러 박사는 심장병을 예방하는 방법에는 적당한 운동과 저지방질의 음식으로 식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 웃음을 하나 더 첨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일 별로 웃을 일이 없는 그런 생활환경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코미디 비디오테이프라도 틀어놓고 웃어야 한다고 권유했습니다.
연구팀이 이런 결과를 내 놓은 것은 과거 심장병을 앓고 심장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150명과 이들과 같은 연령대에 있는 정상적인 사람 150명을 대조해서 실험해 본 결과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연구팀은 이렇게 실험대상이 된 300명을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에 들어가게 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파티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고르라고 하든지 웨이터가 자신에게 물컵을 떨어뜨려 옷을 더럽혔을 때 어떠한 반응이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심장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는 증상이 정상적인 사람보다 훨씬 심하게 나타났고 또 아무리 웃기는 상황에서도 별로 웃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밀러박사는 웃음이 어떻게 심장병과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몸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 스트레스가 인도씰리움의 손상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인도씰리움이란 혈관의 내벽을 말하는데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 내벽이 쉽게 손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으면 그 웃음이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따라서 혈관손상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밀러박사는 이 사실을 최근 뉴올리언즈에서 열린 미국 심장병협회 강연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옛날에 코미디 프로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특별히 가정의 행복과 건강의 복이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며 웃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매사에 부정적으로 살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할 때에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찬송을 부를 때 큰 소리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할 때에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따라하라고 할 때에는 유치원생처럼 큰 소리로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세미나에 가면 따라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유치원생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유치하게 뭘 그런것을 시키느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리라”고 하였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내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까
점잖은 사람들은 대체로 은혜받기가 힘듭니다.
체면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쉽게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아가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옆사람과 활짝 웃으면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열받읍시다. ”
애나라고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아이가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오빠가 병에 걸려 죽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애완견을 땅에 파 묻고 있었습니다.
그때 애나의 할머니가 그를 할머니 방으로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그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창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그 소녀가 정성스럽게 가꾼 장미덤불 사이로 막 피어나려고 하는 아름다운 장미 두 송이였습니다.
소녀는 눈물을 닦고 그 꽃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하여 할머니와 함께 1층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 꽃을 보면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지금까지 내다 보지 말아야 할 창문을 내다 본 거란다. ”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떠한 창문으로 우리의 인생을 내다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슬픔의 창문은 사람을 힘이 없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의 창문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 연민에 가득찬 창문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해서 길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은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모습을 펼쳐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가 어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어느날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주님이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기 위하여 메고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한 여인이 통곡하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이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은 아들의 뒤를 따라오면서 애절하게 울고 있는 이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뭉클하고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과부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메고 가는 관에 손을 대시면서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속에 들어있는 죽은 아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때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 아들을 다시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서 이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주님은 우리를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디에서 일으켜 주십니까
죽은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이 청년은 이미 죽은 청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어버리려고 메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서 이미 중단되어버린 그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와같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가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믿음으로 걸어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며 물속에 빠져갈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주님이 그에게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고 그를 물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풍파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풍파속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손을 놓으며 자기 인생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실망한 우리 곁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풍파속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 물속에서 건져 주십니다.
사업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질병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낙심과 좌절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불행의 늪속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못다한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준 사건이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이 가정은 희망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오셔서 그 등불에 기름을 다시 채워 주시고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 과부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리고 애통하게 울고 있는 그 울움소리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주님은 차마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시고 그를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리고 지방에는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소리내어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주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머무시는 곳에 은혜가 임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여 은혜받는 신자 되시기 바랍니다.
이 과부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 과부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나아가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과부였습니다.
과부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말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는 아들 하나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하게 생각하셔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생하는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그 딸을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게 외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때 이 여인이 소리높여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그 말 한마디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도 이와같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과부는 주님이 가까이 하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찾아가시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병의 노예가 되어 고생하는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찾아가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까
야고보 선생님은 야고보서 4:8에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살아서 주님의 은혜받는 신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동족들의 행렬을 보면서 머잖아 자기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노동 시간입니다.
그는 땅을 파다가 흙속에 파묻힌 유리병 조각을 하나 주워서 몰래 바지 주머니에 숨겨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매일 그 유리병 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동족들이 차츰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동안 그는 독백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그는 죽음의 극한 상황속에서 아침과 저녁 두번씩 꼭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유대인들을 일렬로 세우고 그 중에서 그날 처형할 자들을 골라냈습니다.
하지만 유리조각으로 피가 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를 한 외과의사는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 때문에 삶의 의지가 넘치게 보였고 아직도 건강해서 쓸모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동족들이 가스실로 보내질때마다 그는 자신의 비망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고통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리 서두를 것이 못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
그는 그렇게 해서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서 아우슈비츠를 떠날 때 그는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가스실로 떠난 동족들은 한번 죽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하여 매일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절망이 있습니까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이 과부는 절망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그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웃을 때마다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낼때마다 한번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미국 메릴랜드대학 연구팀에서 “심장병 예방에는 웃음이 보약”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어떤 불편한 상황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웃는 사람보다 심장질환에 시달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팀의 마이클 밀러 박사는 심장병을 예방하는 방법에는 적당한 운동과 저지방질의 음식으로 식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 웃음을 하나 더 첨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일 별로 웃을 일이 없는 그런 생활환경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코미디 비디오테이프라도 틀어놓고 웃어야 한다고 권유했습니다.
연구팀이 이런 결과를 내 놓은 것은 과거 심장병을 앓고 심장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150명과 이들과 같은 연령대에 있는 정상적인 사람 150명을 대조해서 실험해 본 결과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연구팀은 이렇게 실험대상이 된 300명을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에 들어가게 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파티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고르라고 하든지 웨이터가 자신에게 물컵을 떨어뜨려 옷을 더럽혔을 때 어떠한 반응이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심장병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는 증상이 정상적인 사람보다 훨씬 심하게 나타났고 또 아무리 웃기는 상황에서도 별로 웃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밀러박사는 웃음이 어떻게 심장병과 관계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몸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 스트레스가 인도씰리움의 손상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인도씰리움이란 혈관의 내벽을 말하는데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 내벽이 쉽게 손상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으면 그 웃음이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따라서 혈관손상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밀러박사는 이 사실을 최근 뉴올리언즈에서 열린 미국 심장병협회 강연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옛날에 코미디 프로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옵니다.
특별히 가정의 행복과 건강의 복이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며 웃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매사에 부정적으로 살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할 때에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찬송을 부를 때 큰 소리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할 때에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따라하라고 할 때에는 유치원생처럼 큰 소리로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세미나에 가면 따라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유치원생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유치하게 뭘 그런것을 시키느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리라”고 하였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내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까
점잖은 사람들은 대체로 은혜받기가 힘듭니다.
체면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쉽게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아가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옆사람과 활짝 웃으면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열받읍시다. ”
애나라고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이 아이가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오빠가 병에 걸려 죽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애완견을 땅에 파 묻고 있었습니다.
그때 애나의 할머니가 그를 할머니 방으로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그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창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그 소녀가 정성스럽게 가꾼 장미덤불 사이로 막 피어나려고 하는 아름다운 장미 두 송이였습니다.
소녀는 눈물을 닦고 그 꽃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하여 할머니와 함께 1층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 꽃을 보면서 할머니는 손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지금까지 내다 보지 말아야 할 창문을 내다 본 거란다. ”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떠한 창문으로 우리의 인생을 내다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슬픔의 창문은 사람을 힘이 없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의 창문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기 연민에 가득찬 창문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해서 길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은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모습을 펼쳐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가 어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어느날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주님이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기 위하여 메고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한 여인이 통곡하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이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은 아들의 뒤를 따라오면서 애절하게 울고 있는 이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뭉클하고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과부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메고 가는 관에 손을 대시면서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속에 들어있는 죽은 아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때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 아들을 다시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서 이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주님은 우리를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디에서 일으켜 주십니까
죽은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이 청년은 이미 죽은 청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어버리려고 메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서 이미 중단되어버린 그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와같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가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믿음으로 걸어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며 물속에 빠져갈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주님이 그에게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고 그를 물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풍파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풍파속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손을 놓으며 자기 인생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실망한 우리 곁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풍파속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 물속에서 건져 주십니다.
사업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질병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낙심과 좌절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불행의 늪속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못다한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준 사건이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이 가정은 희망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오셔서 그 등불에 기름을 다시 채워 주시고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 과부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리고 애통하게 울고 있는 그 울움소리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주님은 차마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시고 그를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리고 지방에는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소리내어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주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머무시는 곳에 은혜가 임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여 은혜받는 신자 되시기 바랍니다.
이 과부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 과부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나아가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과부였습니다.
과부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을 말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는 아들 하나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하게 생각하셔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생하는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그 딸을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게 외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때 이 여인이 소리높여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그 말 한마디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도 이와같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과부는 주님이 가까이 하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찾아가시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병의 노예가 되어 고생하는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찾아가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까
야고보 선생님은 야고보서 4:8에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살아서 주님의 은혜받는 신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동족들의 행렬을 보면서 머잖아 자기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노동 시간입니다.
그는 땅을 파다가 흙속에 파묻힌 유리병 조각을 하나 주워서 몰래 바지 주머니에 숨겨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매일 그 유리병 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동족들이 차츰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동안 그는 독백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그는 죽음의 극한 상황속에서 아침과 저녁 두번씩 꼭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유대인들을 일렬로 세우고 그 중에서 그날 처형할 자들을 골라냈습니다.
하지만 유리조각으로 피가 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를 한 외과의사는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 때문에 삶의 의지가 넘치게 보였고 아직도 건강해서 쓸모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동족들이 가스실로 보내질때마다 그는 자신의 비망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고통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리 서두를 것이 못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
그는 그렇게 해서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서 아우슈비츠를 떠날 때 그는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가스실로 떠난 동족들은 한번 죽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하여 매일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절망이 있습니까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신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이 과부는 절망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그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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