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5)
본문
어떤 교회 목사님이 모 성도가 소천하여 불가피하게 오늘 낮 예배는 장례예배로 드리겠습니다. 하 고 강단 앞에 큰 관을 갖다 얹어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고인을 모두 한사람씩 나와서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관을 들여다보고 나서 자리에 앉아 말없이 울기 시작합 니다. 모든 성도들은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 날 그 관을 바라보고 눈 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요, 지금까지 우리의 잘못된 습관, 그리고 비협조적인 활동, 세속적인 생각 모두 버려버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 태어나서 이제 덤으로 사는 우리의 생애가 헛되지 않게 삽시다. 하며 설교를 마쳤습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합시다. "새롭게 태어나 헛되지 않게 삽시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 의 구주 되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이스라 엘의 초라하고 조그마한 종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나라 이 백성은 지금 무덤 같은 어둠에서 고통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니 소망을 갖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이 나라를 새로운 조국으로, 우리의 캠퍼스를 비전 있는 캠퍼스로, 우리 가정을 꿈이 있는 가정으로 새롭게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장례행렬 속에서 생명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어느 과부 의 외동아들이요 청년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슬픔 과 절망과 두려움과 허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죽은 그를 살리사 청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 청년을 살리셨는지 말씀을 통해서 그 비밀을 깨닫고 영원한 청년의 삶을 우리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1-13) .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습니다(11). 그들은 성밖으로 나오는 한 행렬과 마주쳤는데 장례행렬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례행렬 은 숙연해 지고 슬픕니다. 사람들은 그 장례행렬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고자 술을 마시고 'go stop'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장례행렬 에는 슬픈 사연이 넘쳤습니다. 장례의 주인공은 과부의 외동아들이었고 청년이었습니다. 여 인에게 가장 슬픈 것은 남편을 잃는 것입니다. 속담에 '과부 사정은 과부밖에 모른다. '고 했 습니다. 이 과부는 외동아들 하나보고 꿋꿋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음 으로 그는 유일한 소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한과 아픔과 설움을 마음에 삼키며 살아 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과부의 외동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어쨌든 그는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야속한 봄비 때문에 떨어져야 하는 목련꽃처럼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현실로 맞게 된 어머니는 비록 숨은 쉬고 있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소망도 죽었고 생명력도 죽었고 기쁨도 죽었고 평안도 죽었습니다. 그 어미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 들조차도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슬프고 절망적인 장례행렬과 마주치신 것입니다. 이 마주침은 기쁨과 슬픔의 만남이요, 희망과 절망의 만남이요, 생명과 사망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13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엘레에오라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긴다. '는 것은 '창 자까지 뒤틀려지는 아픔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헬라어로(eleew엘레에오) 엘레에오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자유하 게 함, 그리고 치유의 사역과 함께 일어났다.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님은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다 아셨고 그녀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슬픔과 불행 앞에서 모른 척 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 고 그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몰아내 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보셨습니다. 들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목자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 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원동력입니다.
성경에는 아홉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문둥병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사 그 몸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막 1:4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기 죄로 인해 제 멋대로 사는 것을 보셨습니다. 한 주간 한 떼를 금식하지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온전한 금 식을 하루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도 제도로 한번 못해본 자들에게, 내 고집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바라볼 때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 혀 죽게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 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 받기 원해서 비겁한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 받기 위해 간절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인에 의존하여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구하는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관 심을 얻기 원합니다.
때로는 일시적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면 그런 대로 잘 나가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등져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어제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이 어떤 권사님 앞에서 짤막한 간증합니다. "나도 때로는 큰돈도 만졌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그 물질을 더 사랑했고 그 물질을 더 쫓 았던 것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물질 모두 헛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을 알아 나의 생 애가 100% 달라졌습니다. 이제 내가 어떤 물질을 주실는지 모르나 나는 여전히 예수님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이제 일어나라 (14-17).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울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 들이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같이 울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모 든 이들에게 슬픔을 줍니다. 죽음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제각기 다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현대 의학의 공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연장되어 가고 있으나,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래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단 하나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이다. 요즘 게놈 프로젝트나, 인간복제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은 길어져가고 있는지 몰라도, 사망률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인류의 사망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어디 정확하게 아는 분 있는가
사망률 100% 인간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도, 아니 0. 0000000001%도 줄이지 못했다. 만일에 이 퍼센테지를 백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 아니 억만 분의 일만이라도 줄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인류의 영원한 영웅이 될 것이고, 그는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사망률은 인류 역사 이래로 perfect하게 100%를 도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 또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누구도 인류의 사망률을 억만 분의 일도 줄일 수 없는데, 그런데 여기 확실하게 죽음의 문제를 100% 해결하신 분이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100% 보장하고 계시다. 그분이 누구인가 2천년 전,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시다. 그분은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우리들도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망률이 100퍼센트가 아니라 0퍼센트임을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것으로 심고 죽지 않을 것으로 거두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어지지 않을 것으로 거두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무덤도 예수의 무덤처럼 빈 무덤이 될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장례행렬 속으로 가까이 가셔 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은 그 관에 누워 있는 청년에게 말씀하 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울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죽음문제입 니다. 인간이 슬프고 허무하고 절망 스러운 것은 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삶의 끈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성취했는가, 어느 시점에 있는 가에 관계없이 항상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죽음 문 제를 터부시하며 토론이나 생각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건강한 자세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한 인간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Platon 이래 희랍철학은 영혼 불멸론을 가르쳤는데, 죽음은 인간의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 로 미화했습니다. 즉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이 땅의 삶이요 그 감옥에 서 해방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독배를 자신있게 마셨 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죄로 인한 형벌이 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영원하고 무서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심판은 상소도 없는 단심제요, 한 번 형량이 선고되면 감형이나 특사 도 없는 절체 절명의 형인 영원한 형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끼고 절망을 느끼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누구 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관속에서 살리신 것은 바로 이 약속을 우리에게 실감있게 하고자 하시는 싸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 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삶을 힘차게 합니다.
초등학생 5학년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은 슬픔에 사로잡혔습 니다. 그때 초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엄마 이젠 그만 울어요. 하늘 나라에 가면 아빠를 만날 수 있잖아요. 하늘나라는 참 좋은 곳이라고 하셨지요. 그곳에는 슬픔도 걱정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가장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슬퍼하세요 여기서 우리가 슬피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아빠의 마음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러 갔던 많은 조문객들은 오히려 이 어린 학생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어린이는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기보다는 죽음을 받 아들이고 이제 어떻게 뜻깊은 나날을 살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립던 얼굴들을 대할까 라는 삶의 방법과 소망이 그를 힘있게 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충실한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 듯이 충실한 일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청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미 빛 볼, 붉은 입술, 강 인한 육신을 뜻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하나니,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의 집착을 초월하는 모 험심, 청춘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살의 청년보다 예순살의 노인이 더 청춘 일 수 있네.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세 월은 살결의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상실할 때 영혼은 주름지고, 근심 두려움 자신감 상실은 기백 을 죽이고 정신을 타락시키네… 그대가 기개를 잃고 정신이 냉소주의의 눈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일 때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네. 그러나 그대가 낙관주의의 파도를 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 로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네. "
이런 시를 들으면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끌어 오릅니다. 그런데 원치 않게 우리 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청년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 는 것입니까 죽음권세와 죄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또 죄 가 들어오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정욕의 죄가 무섭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는 청년으로서 조국을 구원 하기 위해 헌신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더니 힘도 빼앗겨 버리고 사명도 빼앗겨 버리고 비전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으로부터 청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육신적 쾌락은 젊은이의 가 장 큰 원수입니다.
어떻게 청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입 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장래 두려움으로 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절망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어떤 장군이 전쟁에서 계속 패해자 절망감에 빠져 깊은 산속으로 숨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가 거미 줄을 치는 것을 보다가 심술이 나서 거미줄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거미는 끊으면 계속해서 줄을 쳤 습니다. 그러다가는 여덟 번씩이나 끊었는데도 거미는 계속 지칠줄 모르고 줄을 쳤습니다. 그때 그 에게 칠전팔기의 소망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 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 24:16). 이것이 살아있는 부활신앙입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복음을 들고 제물포 항에 내린 1885년 4월 5일은 부 활주일이었습니다. 미국을 출발한 지 5개 월여만에 제물포 항에 도착한 그들은 감격에 겨워 땅에 엎드려 입맞춘 후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 활하신 주님, 이 백성을 옭아매고 있는 어둠의 결박을 풀어주소서! 이 민족에게 자유와 빛을 비쳐 주소서!" 이들은 수많은 아픔과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 이 땅에는 부활의 생명과 영광의 역사가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 나님께서는 생명역사를 이루십니다. 시대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프랑스 시락크 대통령은 실업자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해외에서 직장을 찾 으십시오. 그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 그런데 아무나 해외에서 직업을 찾지는 못합니다. 우리 속 에 부활신앙이 임해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 만이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향하 여 도전할 수 있습니다.
3. 부활의 소문을 널리 퍼쳐야 합니다. (16-17).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종교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결과인 무덤이 있습니다.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가 예수만이 위대한 성인이신가 예수님만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가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감동과 감화를 줄 수 있는가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도들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들도 모두 다 석가모니를 통해 감동을 받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 할 것이다. 어디 석가모니 뿐인가 이슬람 교도들도 마찬가지 대답을 할 것이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큰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변화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다른 종교를 믿고 얼마든지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결코 기독교만을 통해서 변화받고 새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종교를 통해서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이 하나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부활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는다. 죄사함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이 아닌가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죄사함이나 심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무덤이 있음. 부처. 무덤이 있음. 공자. 무덤이 있음. 모하메드. 무덤이 있음. 예수, 무덤이 비어있음. 바로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헛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고집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만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세상에 나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부활의 교회를 채워가는 교 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이 나라는 이제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서 새로운 효성교회로 거듭나 야 하겠습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합시다. "새롭게 태어나 헛되지 않게 삽시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 의 구주 되심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이스라 엘의 초라하고 조그마한 종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나라 이 백성은 지금 무덤 같은 어둠에서 고통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니 소망을 갖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이 나라를 새로운 조국으로, 우리의 캠퍼스를 비전 있는 캠퍼스로, 우리 가정을 꿈이 있는 가정으로 새롭게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장례행렬 속에서 생명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어느 과부 의 외동아들이요 청년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슬픔 과 절망과 두려움과 허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죽은 그를 살리사 청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 청년을 살리셨는지 말씀을 통해서 그 비밀을 깨닫고 영원한 청년의 삶을 우리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1-13) .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습니다(11). 그들은 성밖으로 나오는 한 행렬과 마주쳤는데 장례행렬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례행렬 은 숙연해 지고 슬픕니다. 사람들은 그 장례행렬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고자 술을 마시고 'go stop'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장례행렬 에는 슬픈 사연이 넘쳤습니다. 장례의 주인공은 과부의 외동아들이었고 청년이었습니다. 여 인에게 가장 슬픈 것은 남편을 잃는 것입니다. 속담에 '과부 사정은 과부밖에 모른다. '고 했 습니다. 이 과부는 외동아들 하나보고 꿋꿋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음 으로 그는 유일한 소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한과 아픔과 설움을 마음에 삼키며 살아 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과부의 외동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어쨌든 그는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야속한 봄비 때문에 떨어져야 하는 목련꽃처럼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현실로 맞게 된 어머니는 비록 숨은 쉬고 있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소망도 죽었고 생명력도 죽었고 기쁨도 죽었고 평안도 죽었습니다. 그 어미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 들조차도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슬프고 절망적인 장례행렬과 마주치신 것입니다. 이 마주침은 기쁨과 슬픔의 만남이요, 희망과 절망의 만남이요, 생명과 사망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13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엘레에오라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긴다. '는 것은 '창 자까지 뒤틀려지는 아픔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헬라어로(eleew엘레에오) 엘레에오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자유하 게 함, 그리고 치유의 사역과 함께 일어났다.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님은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다 아셨고 그녀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슬픔과 불행 앞에서 모른 척 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 고 그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몰아내 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보셨습니다. 들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목자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 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원동력입니다.
성경에는 아홉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문둥병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사 그 몸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막 1:4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기 죄로 인해 제 멋대로 사는 것을 보셨습니다. 한 주간 한 떼를 금식하지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온전한 금 식을 하루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도 제도로 한번 못해본 자들에게, 내 고집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바라볼 때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 혀 죽게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 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 받기 원해서 비겁한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 받기 위해 간절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인에 의존하여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구하는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관 심을 얻기 원합니다.
때로는 일시적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면 그런 대로 잘 나가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등져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어제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이 어떤 권사님 앞에서 짤막한 간증합니다. "나도 때로는 큰돈도 만졌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그 물질을 더 사랑했고 그 물질을 더 쫓 았던 것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물질 모두 헛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을 알아 나의 생 애가 100% 달라졌습니다. 이제 내가 어떤 물질을 주실는지 모르나 나는 여전히 예수님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이제 일어나라 (14-17).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울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 들이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같이 울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모 든 이들에게 슬픔을 줍니다. 죽음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제각기 다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현대 의학의 공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명은 점점 더 연장되어 가고 있으나,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래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단 하나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이다. 요즘 게놈 프로젝트나, 인간복제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은 길어져가고 있는지 몰라도, 사망률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인류의 사망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어디 정확하게 아는 분 있는가
사망률 100% 인간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도, 아니 0. 0000000001%도 줄이지 못했다. 만일에 이 퍼센테지를 백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 아니 억만 분의 일만이라도 줄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인류의 영원한 영웅이 될 것이고, 그는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사망률은 인류 역사 이래로 perfect하게 100%를 도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 또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누구도 인류의 사망률을 억만 분의 일도 줄일 수 없는데, 그런데 여기 확실하게 죽음의 문제를 100% 해결하신 분이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100% 보장하고 계시다. 그분이 누구인가 2천년 전,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시다. 그분은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우리들도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망률이 100퍼센트가 아니라 0퍼센트임을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것으로 심고 죽지 않을 것으로 거두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어지지 않을 것으로 거두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무덤도 예수의 무덤처럼 빈 무덤이 될 줄로 믿는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장례행렬 속으로 가까이 가셔 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은 그 관에 누워 있는 청년에게 말씀하 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울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죽음문제입 니다. 인간이 슬프고 허무하고 절망 스러운 것은 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삶의 끈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성취했는가, 어느 시점에 있는 가에 관계없이 항상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죽음 문 제를 터부시하며 토론이나 생각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건강한 자세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한 인간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Platon 이래 희랍철학은 영혼 불멸론을 가르쳤는데, 죽음은 인간의 영혼이 해방되는 것으 로 미화했습니다. 즉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이 땅의 삶이요 그 감옥에 서 해방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독배를 자신있게 마셨 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죄로 인한 형벌이 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영원하고 무서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심판은 상소도 없는 단심제요, 한 번 형량이 선고되면 감형이나 특사 도 없는 절체 절명의 형인 영원한 형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끼고 절망을 느끼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누구 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관속에서 살리신 것은 바로 이 약속을 우리에게 실감있게 하고자 하시는 싸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 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삶을 힘차게 합니다.
초등학생 5학년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은 슬픔에 사로잡혔습 니다. 그때 초등학생이 자기 엄마를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엄마 이젠 그만 울어요. 하늘 나라에 가면 아빠를 만날 수 있잖아요. 하늘나라는 참 좋은 곳이라고 하셨지요. 그곳에는 슬픔도 걱정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가장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슬퍼하세요 여기서 우리가 슬피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아빠의 마음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러 갔던 많은 조문객들은 오히려 이 어린 학생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어린이는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기보다는 죽음을 받 아들이고 이제 어떻게 뜻깊은 나날을 살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립던 얼굴들을 대할까 라는 삶의 방법과 소망이 그를 힘있게 한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충실한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 듯이 충실한 일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청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미 빛 볼, 붉은 입술, 강 인한 육신을 뜻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하나니,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의 집착을 초월하는 모 험심, 청춘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살의 청년보다 예순살의 노인이 더 청춘 일 수 있네.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세 월은 살결의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상실할 때 영혼은 주름지고, 근심 두려움 자신감 상실은 기백 을 죽이고 정신을 타락시키네… 그대가 기개를 잃고 정신이 냉소주의의 눈과 비관주의의 얼음으로 덮일 때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네. 그러나 그대가 낙관주의의 파도를 잡고 있는 한 그대는 여든 살 로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네. "
이런 시를 들으면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끌어 오릅니다. 그런데 원치 않게 우리 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청년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 는 것입니까 죽음권세와 죄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또 죄 가 들어오면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정욕의 죄가 무섭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는 청년으로서 조국을 구원 하기 위해 헌신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더니 힘도 빼앗겨 버리고 사명도 빼앗겨 버리고 비전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으로부터 청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육신적 쾌락은 젊은이의 가 장 큰 원수입니다.
어떻게 청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입 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장래 두려움으로 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절망을 몰아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어떤 장군이 전쟁에서 계속 패해자 절망감에 빠져 깊은 산속으로 숨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가 거미 줄을 치는 것을 보다가 심술이 나서 거미줄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거미는 끊으면 계속해서 줄을 쳤 습니다. 그러다가는 여덟 번씩이나 끊었는데도 거미는 계속 지칠줄 모르고 줄을 쳤습니다. 그때 그 에게 칠전팔기의 소망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 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 24:16). 이것이 살아있는 부활신앙입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복음을 들고 제물포 항에 내린 1885년 4월 5일은 부 활주일이었습니다. 미국을 출발한 지 5개 월여만에 제물포 항에 도착한 그들은 감격에 겨워 땅에 엎드려 입맞춘 후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 활하신 주님, 이 백성을 옭아매고 있는 어둠의 결박을 풀어주소서! 이 민족에게 자유와 빛을 비쳐 주소서!" 이들은 수많은 아픔과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 이 땅에는 부활의 생명과 영광의 역사가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 나님께서는 생명역사를 이루십니다. 시대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프랑스 시락크 대통령은 실업자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해외에서 직장을 찾 으십시오. 그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 그런데 아무나 해외에서 직업을 찾지는 못합니다. 우리 속 에 부활신앙이 임해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 만이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향하 여 도전할 수 있습니다.
3. 부활의 소문을 널리 퍼쳐야 합니다. (16-17).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종교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의 결과인 무덤이 있습니다.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가 예수만이 위대한 성인이신가 예수님만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가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감동과 감화를 줄 수 있는가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도들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들도 모두 다 석가모니를 통해 감동을 받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 할 것이다. 어디 석가모니 뿐인가 이슬람 교도들도 마찬가지 대답을 할 것이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큰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변화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다른 종교를 믿고 얼마든지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결코 기독교만을 통해서 변화받고 새사람이 되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종교를 통해서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이 하나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부활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는다. 죄사함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이 아닌가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죄사함이나 심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무덤이 있음. 부처. 무덤이 있음. 공자. 무덤이 있음. 모하메드. 무덤이 있음. 예수, 무덤이 비어있음. 바로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헛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고집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만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세상에 나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부활의 교회를 채워가는 교 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이 나라는 이제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서 새로운 효성교회로 거듭나 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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