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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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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우리 곁에 있다’(A walk to Rememb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Do you believe the Miraele(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우리는 사실 많은 기적을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어려움에 빠지면 기적을 바랍니다. 여기 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죽음 젊은이입니다. ‘우리 곁에 기적이 있다’는 영화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제이미 라는 소녀 입니다. 그는 목사님의 딸입니다. 불치의 백혈병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커다란 안경을 끼고 다닙니다. 친그들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외롭습니다.
항상 외톨박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 만은 너무도 깨끗합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기전에 꼭 이것만은 해 보고 싶었습니다. 남들처럼 스티커 문신을 해보는 것.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싶었습니다.
때에 한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랜든이란 소년입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슴이 멍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늘 어둡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와 백혈병을 앓은 소녀가 믿음 안에서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고맙니다. 제이미는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게 제게 랜든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그는 숨을 거둡니다.
그가 죽은 지 2년 뒤 랜든은 제이미가 그렇게도 되고 싶었던 의사가 되어 제이미의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그때 그는 딸을 잃은 아버지에게 “제이미에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았을텐데요. ”하며 위로 했습니다. 때에 그의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랜든군, 모르겠는가 바로 자네가 기적일세”(중앙일보에서)
그렇습니다. 여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젊은이가 죽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그에겐 아들이 그의 꿈이고 보람이었습니다. 아들이자 곧 남편이었습니다. 그의 모두였습니다. 남편 잃은 슬픔의 위로였습니다. 이 아들만 보면 힘이 솟았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다 허사 였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기절인들 어찌 한두번이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절망들이 다 있습니다. 우린들 죽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다. 삶이 지겹고 구토가 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좌절, 포기가 있습니다. 돈, 배신, 실패, 무엇입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 우리를 짓누를 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인성 과부만이야 하겠습니까 사람이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남편이나 아내가 죽을 때랍니다. 그 다음은 자식의 죽음이랍니다.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을 잃고 나니 부끄러워서 밖을 나오기 싫었답니다. 사람을 보기가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항상 이런 절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을 넘어선 광명한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빛을 보기 전에는 절망입니다. 꼭 절망은 이런 것만 아닙니다. 외로움, 늙음 다 고통입니다. 평균수명은 길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고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점점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도 신부, 수녀들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Good Bye, Good Men에서) 독신은 잘못되었다는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성애자가 많아지고 있답니다. (신학교에서)이를 본 학생들이 환멸을 느끼고 신학교를 떠난답니다. 동성애자들이 신부 서품을 받고 있습니다. 이젠 신부가 될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답니다. 그래서 수녀가 운영하는 교회가 늘고 있답니다. 지금 신부님들 중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300명이 된답니다. (조선일보 200
2. 6. 29일자)
이제 사람은 마지막 골목에 다달은 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상황을 나는 안 맞는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이 집에 이런 불행이 올 줄 알았습니까 온 동네 사람ㄷ르도 장지로 떠나는 상여를 보고 울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가엾은 모습에 다 울었습니다. 우리가 그래요. 우리도 불행을 맞습니다. 우리도 죽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 가정의 비극이 결코 남이 일만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갑작스런 죽음도 한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절망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죽음 앞에 우셨습니다. 죽음은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의 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항상 여호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오늘일이 아니면 언제일른지 모습니다. 우리의 끝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여의 관에다 손을 대시니 상여가 멈춥니다.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왠 사람이 장례길을 멈추다니. 또 누구도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도 외국에서는 장례행열이 지나면 차를 멈추어 줍니다. 또 그 어머니에게는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저 인사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단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은 다들 놀랬습니다. 이것은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이는 이런 기적만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기적의 책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서 부활사건까지가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문제아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소망의 불씨가 조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병이 낫았다 죽은 살마이 살았다. 이건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들만 바라고 있습니다.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기적을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자연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일을 하실 수는 있으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시대에 일어난 그런 기적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 받은 은혜를 감하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철학을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불교 철학도 나옵니다. 거기 중이 되는데는 이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맨 먼저 머리를 깎습니다. 깎을 때는 중 세사람과 일곱 증인 앞에서 한답니다. 그들은 그로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지켜야 할 10계가 있습니다.
1)살생하지 말라.
2)도둑질하지 말라.
3)음행하지 말라.
4)망언하지 말라
5)술을 마시지 말라.
6)몸치장을 하지 말라(그래서 늘 염색한 옷을 입는다)
7)가무를 하지도 듣지도 말라.
8) 안락한 자리에 앉지도 말라.
9)때 아닌 밥을 먹지 말라.
10)재물을 모으지 말라.
이렇게 하여 그들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도 미래와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여기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주변이 야단이 났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놀랐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삽니까 돈, 명예,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국세청에 신고한 200년도 평균수입에 1인당 평균 변호사 2억9천4백30만원, 의사 2억4천5백43만원, 변리사 51,764만원 법무사 9,744만원 회계사 21,250만원 세무사 17,719만원 관세사 7,923만원 건축사7,923만원 평가사 11,340만원 이었답니다. (2002. 9. 17 조선일보)
그런데 그들이 생명이나 행복지수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생명군동(전도)하신 대상들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사람 젊은 청년을 살리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살리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석 명절 민족의 대이동을 봅니다. 수천만명이 고향으로 가고오곤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보다 더 좋은 고향이 있습니다. 거기는 눈물이 없습니다. 아픔과 쓰림이 없습니다. 평화만 있습니다. 여기 젊은이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장사 지냈을 것입니다. 으 어머니와 동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새 세계를 본 것입니다.
맺은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이런 말씀을 하심은 정말 대단한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잠자는 자가 깨거나 그저 누워 있는 사람(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죽은 자, 상여에 실려 장사 지내기 위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한 일을 하실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이상하게 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 이런 일에 무례하다. 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사건이지요. 누구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물론이고 울며 위로하던 동네 사람들도 다 기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가정에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집과 온 동네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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