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본문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여러 종류일 것이다.
하나는 깊이 잠든 사람. 이것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충분히 잔 후에는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심하게 병든 사람. 이 사람은 안쓰럽다.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날 힘이 없다. 일어나려 해도 기운이 없든지 움직여지지 않든지 일어나기엔 너무 아프든지 한 것이다.
하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 일어나야한다는 의식조차 불분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몸이 일어나는 것보다 의식이 깨는 것이 더 우선이다.
하나는 죽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어나려는 의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네가지 겨우 가운데 가장 불쌍한 것은 네 번째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것은 이 절망적인 네 번째 경우도 예수님을 만나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홍성제일교회의 정인숙 집사님은 첫 아이를 출산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손목, 발목, 마디마디마다 통증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신 관절로 퍼진 류머티즘 관절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고 쑤시니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좋다는 약은 다 써 봤는데도 도저히 고쳐지지가 않았다. 사지가 점점 줄어들어 몸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그는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하기 위해 다녀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그에게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그는 병만 낫는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제발 좀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새벽예배부터 철야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까지 예배시간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참석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에 갔다 오면 조금씩 몸이 펴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1년 만에 새우처럼 구부러졌던 몸이 완전히 펴지게 되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 건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신다고 간증하였다.
그가 아프다고 누워만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모든 예배 시간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쳤기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힘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어날 힘을 얻으시기 바란다. 일어나야 하는데 그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주님의 능력으로 의식도 회복하고 일어나기도 하시길 바란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주님의 능력으로 여러분 모두가 일어나시길 축원한다.
1. 우울한 나인성의 분위기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 본문은 처음에 우울한 나인성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시작이 된다.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세가지 면에서 나인성의 분위기는 절망적이다.
1) 장례행렬
첫째로 장례행렬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최고의 한계 상황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넘어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에녹과 엘리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 정도이다.
그외에는 다 죽고 말았다. 지금도 죽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것이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일종의 우울함이 있다. 호상이라고 하는 장례식에도 웃음과 기쁨이 충만하지는 못하다.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나는 죽음의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 참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옆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고민. 오직 믿음으로라는 성경적 진리에 이름.
전도서의 말씀.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장).
정몽헌씨의 죽음. 최정상의 자리라고 하는 것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주지 않는가 죽어라고 일만하면서 성공을 향해 달리는 이들에게 정몽헌씨의 죽음에 대한 묵상은 좋은 생각의 기회를 줄 수가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데서 생겨날 뿐이다.
하여튼 죽음이라는 문제는 사람에게 있어 우울한 문제이며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힘겨운 문제이다. 그 자체로도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2) 죽은 이는 과부의 외아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죽음이 누구의 죽음이냐 하는데서 절망감을 더 느끼게 한다. 죽은 이는 애꿎게도 과부의 외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박정수 집사 혀의 장례식이다. 그 장례를 집례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통곡을 하며 울던 그 어머니의 절규를 잊지 못한다. 자식의 죽음은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마 장례식 이후에도 오랜 동안 그 상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감사한 것은 그 어머니에게 착한 딸과 아들이 하나씩 더 남아 있다는 점이다. 비록 남편은 없지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과부는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남편은 없다. 사별했는지 헤어졌는지 알길이 없지만 아들 하나만 믿고 여지껏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이다.
그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고를 만나서 죽었는지
병에 걸려서 죽었는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그 정황이 나와있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병들어서 죽지 않았나 싶다. 교통사고는 확실히 아니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까.
이제 과부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일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가
외롭고 힘들 때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
가족이, 즉 혈육이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
나이가 더 늘어 몸 가눌 수 없게 되면 누가 그 할머니를 돌보아 줄까 그 당시는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사회복지가 되어있는 지금도 혼자만 남은 할머니는 찬밥신세 아닌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죽은 이는 청년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가지 요인이 더 있다.
죽은 이가 과부의 외아들일뿐만 아니라 그가 청년이라고 하는 점이다.
청년이란 어떤 존재인가 청년기란 가장 왕성하게 생명이 꿈틀대는 시기이다. 무한한 미래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품고 성장해가는 시기이다. 청년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에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청년이 어느 순간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 구태여 미래를 찾는다면 곧 땅에 묻힌 후 구더기의 밥이 되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사실 죽은 이가 과부의 외아들이라해도 그가 청년이 아니라면 상황은 덜 비극적이다. 예를 들어 과부가 85세이고 그 아들이 60세라고 하자. 그 아들의 죽음은 안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다. 아직 창창한 청년의 죽음이기에 더더욱 절망감이 드는 것이다.
화장터에서 울부짖던 또 다른 사람을 기억한다. 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먼저 죽은 대학생 아들 때문이 거의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중얼거리는데 그 소리에 내 고막을 때렸다. “이 나쁜 놈아. 넌 배신자야. 어떻게 나보다 먼저 갈 수가 있어. 넌 나쁜 놈이야.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야 임마. 이 배신자야”. 똑같이 이어지는 말임에도 가슴을 저미는 목소리에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었다.
이 아버지가 장수하여 90살이고 그 아들이 65살이라도 그렇게 실성한 사람처럼 되었을까 그것을 보는 이의 가슴이 함께 무너져 내렸을까
장례행렬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
그가 청년이라고 하는 점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절망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연출하고 있다. 아직 공동묘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공동묘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차적인 이야기이지만 같이 맞붙어 살 가족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란다. 어렵고 힘든 일이야 없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부딪혀 나갈 배우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자녀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란다)
2. 예수님의 등장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 참으로 절망적인 분위기라고 말씀을 드렸다. 누구의 위로도 귀에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이젠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 누구의 정겨운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1) 무리와 함께 나인성에 오심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나인성에 오신 것이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
다음으로 허다한 무리들이다. 이미 예수님의 지명도는 대단히 높아졌다. 그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간 것이다. 무리들은 말씀도 듣고 병고침도 받고자 하여 예수님께 모여들었으며 그 행렬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아마도 같은 무리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많은 무리가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당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신의 가족과 생업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뒤따랐던 것은 늘 새로운 무리가 그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임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님이 당신이 직접 부르신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대동하고 나인성에 들어오신 것이고 그때는 마침 절망감을 가득 담은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때였다.
2)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먼저 주님은 과부를 보신다. 과부의 처지가 어떠한지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 과부는 지금 울고 있다. 참으려고 해도 참으려고 해도 복받쳐 나오는 통곡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신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본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다. 그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이시다. 그에게는 우주도 작은 피조 세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지구, 지구 안에서 지극히 작은 팔레스틴, 팔레스틴 안에서 지극히 작은 나인성, 그 성 안에서 별 영향력도, 재력도, 지명도도 없는 과부를 보시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을 기울이시는 것이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복음서에서 대할 때 마다 나는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긍휼을 느끼곤 한다. ‘그래 주님은 작고 초라한 나 한 사람의 모습도 보시는 분이지. 남몰래 숨죽이며 울고 있을 때 그런 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여호와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긍휼도 안다. 주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이라면 왜 그래 하며 따져들기 전에 참 힘들겠구나 참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목회자도 성도들도 이 주님의 긍휼을 배울 수 있다면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 나갈 것이다. 참사랑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축원한다
3) 청년아 일어나라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말라고 하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먼저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신다.
이것은 몇가지 면에서 조금은 충격적인 일이다.
우선 상주의 입장에서 볼 때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다.
또한 율법적인 면에서 볼 때 부정해지는 행위이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지시는 이가 주님이시기에 극복이 된다. 부정한 것이 예수님을 부정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이런 예는 혈루증 여인과의 만남 소에서도 나타난다. 혈루증 여인의 부정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정결케 한 것이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멘 사람들이 멈추어 선다. 그때 예수님은 이제 확실히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치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주님은 죽은 시체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명령이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명령을 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시기에 그 명령은 시행이 된다.
-풍랑아 잔잔하라. 말도 안되는 명령.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장).
나사로야 나오너라. 역시 말도 안됨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장).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38년병자에게. 역시 말도 안됨.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 5장).
오늘 본문에서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이 명령에 청년은 어떻게 되는가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주님의 말씀은 죽음을 물리치고 청년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능력이다.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 1911~1966)는 한국전쟁 때 참여한 종군기자 300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서 이 때 쓴 기사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져 미군과 우리 국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그는 미 해병 중대의 한 병사가 추운 겨울 쪼그리고 앉아 통조림을 먹고 있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마거리트 히긴스는 전쟁으로 인해 머나먼 이국땅까지 와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위협에서 떨고 있는 그 병사에게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나에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 그 미국 병사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Give me tomorrow. ). 그 병사에게는 내일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병사와의 대화를 기사화하여 신문에 실었고 그 기사를 통해 퓰리처상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내일을 주는 것, 그것은 어느 누구도 못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신다.
죽은 청년에게 내일을 주는 것, 어느 누구도 못한다. 오직 주님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일어나게 하셔서 내일을 주신 것이다.
그 능력의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도 일으키시기를 축원한다.
3. 완전히 달라진 나인성의 분위기
1) 두려워하는 무리들
“16a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기서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님
누미노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의 두려움.
경외의 의미에서 나타나는 두려움.
너희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2)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16b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 메시야의 의미도 가지고 있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400년간의 선지자의 침묵으로 인해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3) 소망을 되찾은 과부
누구에게 돌려주는가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이 여인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소망을 되찾았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짐.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결론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으키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믿으시는가
강원도 화천군의 윤금례 성도님은 19세에 시집을 갔는데, 가서 보니 시아버지가 점을 치는 점쟁이였다. 그래서 그 집은 매일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고되어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음식만 먹으면 구토를 하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몸은 아픈데 정확한 병명도 모르니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는 결혼한 딸이 있었는데, 그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기도원에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딸에게 아픈데 왜 기도원을 가야 하는지 물어봤고, 딸은 기도원에 가면 아프게 하는 귀신이 쫓겨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딸에게 기도원에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어봤고 10일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기도원을 처음 가봤기에 성전에 앉아 그저 몸이 아파 울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 성전 앞에 커다랗게 놓여 있는 십자가가 보이면서 옆 사람의 기도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옆 사람의 기도를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는 것만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10일 째 되는 날,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 자신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부터 눈이 잘 보이고 귀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몸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 뿐 아니라 남편도 귀신이 들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에게 “나랑 같이 살려면 금식해서 술 귀신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이 승낙을 하자 그날로 남편과 함께 다시 기도원으로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술 마귀를 쫓아내어 남편이 술을 끊게 되었다. 남편은 술을 끊고 자신은 병을 고침 받았으니 “여호와 하나님, 우리 가정에 건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하고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 가정을 일으키신 것이다. 고망이 없는 그 가정에 소망을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육신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가정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인간관계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그러나 주님께는 가능함.
과부로 하여금 소망을 되찾게 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는 깊이 잠든 사람. 이것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충분히 잔 후에는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심하게 병든 사람. 이 사람은 안쓰럽다.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날 힘이 없다. 일어나려 해도 기운이 없든지 움직여지지 않든지 일어나기엔 너무 아프든지 한 것이다.
하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 일어나야한다는 의식조차 불분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몸이 일어나는 것보다 의식이 깨는 것이 더 우선이다.
하나는 죽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어나려는 의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네가지 겨우 가운데 가장 불쌍한 것은 네 번째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것은 이 절망적인 네 번째 경우도 예수님을 만나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홍성제일교회의 정인숙 집사님은 첫 아이를 출산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손목, 발목, 마디마디마다 통증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신 관절로 퍼진 류머티즘 관절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고 쑤시니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좋다는 약은 다 써 봤는데도 도저히 고쳐지지가 않았다. 사지가 점점 줄어들어 몸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그는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하기 위해 다녀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그에게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그는 병만 낫는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제발 좀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새벽예배부터 철야예배, 수요예배, 주일예배까지 예배시간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참석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에 갔다 오면 조금씩 몸이 펴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1년 만에 새우처럼 구부러졌던 몸이 완전히 펴지게 되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 건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신다고 간증하였다.
그가 아프다고 누워만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모든 예배 시간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쳤기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힘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어날 힘을 얻으시기 바란다. 일어나야 하는데 그에 대한 의식조차 없다면 주님의 능력으로 의식도 회복하고 일어나기도 하시길 바란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주님의 능력으로 여러분 모두가 일어나시길 축원한다.
1. 우울한 나인성의 분위기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 본문은 처음에 우울한 나인성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시작이 된다.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세가지 면에서 나인성의 분위기는 절망적이다.
1) 장례행렬
첫째로 장례행렬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최고의 한계 상황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넘어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에녹과 엘리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 정도이다.
그외에는 다 죽고 말았다. 지금도 죽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것이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일종의 우울함이 있다. 호상이라고 하는 장례식에도 웃음과 기쁨이 충만하지는 못하다.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나는 죽음의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 참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옆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고민. 오직 믿음으로라는 성경적 진리에 이름.
전도서의 말씀.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장).
정몽헌씨의 죽음. 최정상의 자리라고 하는 것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주지 않는가 죽어라고 일만하면서 성공을 향해 달리는 이들에게 정몽헌씨의 죽음에 대한 묵상은 좋은 생각의 기회를 줄 수가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데서 생겨날 뿐이다.
하여튼 죽음이라는 문제는 사람에게 있어 우울한 문제이며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힘겨운 문제이다. 그 자체로도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2) 죽은 이는 과부의 외아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죽음이 누구의 죽음이냐 하는데서 절망감을 더 느끼게 한다. 죽은 이는 애꿎게도 과부의 외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박정수 집사 혀의 장례식이다. 그 장례를 집례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통곡을 하며 울던 그 어머니의 절규를 잊지 못한다. 자식의 죽음은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마 장례식 이후에도 오랜 동안 그 상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감사한 것은 그 어머니에게 착한 딸과 아들이 하나씩 더 남아 있다는 점이다. 비록 남편은 없지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과부는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남편은 없다. 사별했는지 헤어졌는지 알길이 없지만 아들 하나만 믿고 여지껏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이다.
그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고를 만나서 죽었는지
병에 걸려서 죽었는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그 정황이 나와있지 않다. 내 생각으로는 병들어서 죽지 않았나 싶다. 교통사고는 확실히 아니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까.
이제 과부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일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가
외롭고 힘들 때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
가족이, 즉 혈육이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
나이가 더 늘어 몸 가눌 수 없게 되면 누가 그 할머니를 돌보아 줄까 그 당시는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사회복지가 되어있는 지금도 혼자만 남은 할머니는 찬밥신세 아닌가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죽은 이는 청년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가지 요인이 더 있다.
죽은 이가 과부의 외아들일뿐만 아니라 그가 청년이라고 하는 점이다.
청년이란 어떤 존재인가 청년기란 가장 왕성하게 생명이 꿈틀대는 시기이다. 무한한 미래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품고 성장해가는 시기이다. 청년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이루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에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청년이 어느 순간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 구태여 미래를 찾는다면 곧 땅에 묻힌 후 구더기의 밥이 되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사실 죽은 이가 과부의 외아들이라해도 그가 청년이 아니라면 상황은 덜 비극적이다. 예를 들어 과부가 85세이고 그 아들이 60세라고 하자. 그 아들의 죽음은 안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다. 아직 창창한 청년의 죽음이기에 더더욱 절망감이 드는 것이다.
화장터에서 울부짖던 또 다른 사람을 기억한다. 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먼저 죽은 대학생 아들 때문이 거의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중얼거리는데 그 소리에 내 고막을 때렸다. “이 나쁜 놈아. 넌 배신자야. 어떻게 나보다 먼저 갈 수가 있어. 넌 나쁜 놈이야.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야 임마. 이 배신자야”. 똑같이 이어지는 말임에도 가슴을 저미는 목소리에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었다.
이 아버지가 장수하여 90살이고 그 아들이 65살이라도 그렇게 실성한 사람처럼 되었을까 그것을 보는 이의 가슴이 함께 무너져 내렸을까
장례행렬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
그가 청년이라고 하는 점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절망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연출하고 있다. 아직 공동묘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공동묘지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차적인 이야기이지만 같이 맞붙어 살 가족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란다. 어렵고 힘든 일이야 없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부딪혀 나갈 배우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자녀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란다)
2. 예수님의 등장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 참으로 절망적인 분위기라고 말씀을 드렸다. 누구의 위로도 귀에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이젠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 누구의 정겨운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1) 무리와 함께 나인성에 오심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나인성에 오신 것이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
다음으로 허다한 무리들이다. 이미 예수님의 지명도는 대단히 높아졌다. 그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간 것이다. 무리들은 말씀도 듣고 병고침도 받고자 하여 예수님께 모여들었으며 그 행렬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아마도 같은 무리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많은 무리가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당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신의 가족과 생업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뒤따랐던 것은 늘 새로운 무리가 그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임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님이 당신이 직접 부르신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대동하고 나인성에 들어오신 것이고 그때는 마침 절망감을 가득 담은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때였다.
2)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먼저 주님은 과부를 보신다. 과부의 처지가 어떠한지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 과부는 지금 울고 있다. 참으려고 해도 참으려고 해도 복받쳐 나오는 통곡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신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본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시다. 그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이시다. 그에게는 우주도 작은 피조 세계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지구, 지구 안에서 지극히 작은 팔레스틴, 팔레스틴 안에서 지극히 작은 나인성, 그 성 안에서 별 영향력도, 재력도, 지명도도 없는 과부를 보시는 것이다.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을 기울이시는 것이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복음서에서 대할 때 마다 나는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긍휼을 느끼곤 한다. ‘그래 주님은 작고 초라한 나 한 사람의 모습도 보시는 분이지. 남몰래 숨죽이며 울고 있을 때 그런 나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여호와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긍휼도 안다. 주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이라면 왜 그래 하며 따져들기 전에 참 힘들겠구나 참 불쌍하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목회자도 성도들도 이 주님의 긍휼을 배울 수 있다면 교회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 나갈 것이다. 참사랑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축원한다
3) 청년아 일어나라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말라고 하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먼저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신다.
이것은 몇가지 면에서 조금은 충격적인 일이다.
우선 상주의 입장에서 볼 때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다.
또한 율법적인 면에서 볼 때 부정해지는 행위이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지시는 이가 주님이시기에 극복이 된다. 부정한 것이 예수님을 부정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이런 예는 혈루증 여인과의 만남 소에서도 나타난다. 혈루증 여인의 부정이 예수님을 부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정결케 한 것이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멘 사람들이 멈추어 선다. 그때 예수님은 이제 확실히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치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주님은 죽은 시체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명령이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명령을 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시기에 그 명령은 시행이 된다.
-풍랑아 잔잔하라. 말도 안되는 명령.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장).
나사로야 나오너라. 역시 말도 안됨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장).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38년병자에게. 역시 말도 안됨.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 5장).
오늘 본문에서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이 명령에 청년은 어떻게 되는가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주님의 말씀은 죽음을 물리치고 청년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능력이다.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 1911~1966)는 한국전쟁 때 참여한 종군기자 300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서 이 때 쓴 기사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져 미군과 우리 국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그는 미 해병 중대의 한 병사가 추운 겨울 쪼그리고 앉아 통조림을 먹고 있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마거리트 히긴스는 전쟁으로 인해 머나먼 이국땅까지 와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위협에서 떨고 있는 그 병사에게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나에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 그 미국 병사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Give me tomorrow. ). 그 병사에게는 내일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병사와의 대화를 기사화하여 신문에 실었고 그 기사를 통해 퓰리처상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내일을 주는 것, 그것은 어느 누구도 못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신다.
죽은 청년에게 내일을 주는 것, 어느 누구도 못한다. 오직 주님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일어나게 하셔서 내일을 주신 것이다.
그 능력의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도 일으키시기를 축원한다.
3. 완전히 달라진 나인성의 분위기
1) 두려워하는 무리들
“16a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기서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님
누미노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의 두려움.
경외의 의미에서 나타나는 두려움.
너희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2)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16b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 메시야의 의미도 가지고 있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400년간의 선지자의 침묵으로 인해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3) 소망을 되찾은 과부
누구에게 돌려주는가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이 여인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소망을 되찾았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짐.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결론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으키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믿으시는가
강원도 화천군의 윤금례 성도님은 19세에 시집을 갔는데, 가서 보니 시아버지가 점을 치는 점쟁이였다. 그래서 그 집은 매일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 너무 힘들고 고되어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음식만 먹으면 구토를 하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몸은 아픈데 정확한 병명도 모르니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는 결혼한 딸이 있었는데, 그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기도원에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딸에게 아픈데 왜 기도원을 가야 하는지 물어봤고, 딸은 기도원에 가면 아프게 하는 귀신이 쫓겨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딸에게 기도원에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어봤고 10일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기도원을 처음 가봤기에 성전에 앉아 그저 몸이 아파 울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 성전 앞에 커다랗게 놓여 있는 십자가가 보이면서 옆 사람의 기도소리가 들렸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옆 사람의 기도를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는 것만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10일 째 되는 날,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 자신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부터 눈이 잘 보이고 귀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몸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 뿐 아니라 남편도 귀신이 들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에게 “나랑 같이 살려면 금식해서 술 귀신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이 승낙을 하자 그날로 남편과 함께 다시 기도원으로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술 마귀를 쫓아내어 남편이 술을 끊게 되었다. 남편은 술을 끊고 자신은 병을 고침 받았으니 “여호와 하나님, 우리 가정에 건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하고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 가정을 일으키신 것이다. 고망이 없는 그 가정에 소망을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육신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가정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인간관계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는가
그러나 주님께는 가능함.
과부로 하여금 소망을 되찾게 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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