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부자 청년의 경우
본문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설교에 저의 생각을 집중했었습니다. 이 산상설교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으로 갈라섭니다. 첫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를 대표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산상설교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적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독일을 통일했던 비스마르크와 같은 현실정치가는 “산상 설교“를 통해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산상설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설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일상성을 말하고 있지 않고 일종의 비상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거기에서는 ‘이웃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사랑‘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왼 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도 내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산상설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비상성을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고, 특히 국가의 권력행사와 같은 상황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비상성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피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에 쓰여 있는 말씀이라 해도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말씀들 가운데 어느 것은 지키고 어느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산상설교에 나타난 이러한 비상성을 피해가도 좋은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비상성을 우리의 일상성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카톨릭은 이 말씀의 대상을 일반인들이 아닌 특수한 종교적 실천자들로 봄으로써 그것을 일반인들이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산상설교는 일반인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특수한 사람들 즉 승려들이나 사제들을 향해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산상설교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성서의 말씀은 모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특히 성서주의자들). 그러나 실제로 개신교인들도 이러한 산상설교의 비상한 말씀들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은유적으로 해석하면서 말씀 그대로는 따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원수 사랑의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대의 원수는 ‘이방인‘ 즉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는 구약성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뭔가 영적 존재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인 마귀나 사탄 같은 것으로 추상화하여 우리가 직접적으로 대항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성서내용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성서의 말씀을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겠다는 왜곡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성서주의자들처럼 성서의 중요성을 들고 나오지만 성서를 들고 나오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성서의 중요한 내용을 회피해 달아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톨릭은 성서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못 지킬 것은 못 지키겠다고 하는 점에서 좀더 솔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에 관한 말씀도 산상설교의 말씀과 같이 일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뭔가 비상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개신교인들이 영적인 해설을 통해서 피해 가는 말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직면했던 물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세기의 왈도파의 창시자 발데스가 그랬고 14세기의 성자 성 프랜시스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에 관한 글을 읽고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했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물음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교인이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다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리스도인 혹은 교인이 되는 것은 제도권 교회에 정기적으로 혹은 적당히 출석하고 또 교회가 요구하는 적당한 수준의 헌금을 내고 교리연구와 함께 세례를 받으면 됩니다. 좀더 열심인 사람은 집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을 맡아서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봉사를 하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일단 ‘교인‘(Church pers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제도권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 혹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위에서 말하는 ‘교인‘이 곧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한국의 개신교회의 일반적 인식은 ‘교인‘은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개개 교단들이나 정부의 통계에 올라가는 숫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개혁자 루터가 말하는 ‘가시적 교회‘ 혹은 ‘현세적 교회‘에 소속된 일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이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인들 모두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불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다고 했고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Calvin)은 예정론을 통해서 선택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즉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은 ‘불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교인‘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교회에 속한다고 곧 예수의 제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곧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설교 본문의 말씀은 교인과 예수의 제자를 나누는데 있어서 중요한 준거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교인이 되는 일은 일상적으로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이 와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그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가복음에 보면, 그 청년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청년은 나무랄 것이 없는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서는 사람이 율법 즉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유대교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청년은 유대교의 교인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도 오늘날의 우리 나라의 교인들처럼 제도권의 교회가 부과하는 적당한 수준의 ‘계명들‘을 지키는 교인들의 하나는 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으며, 도적질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자였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나라에서도 교인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계명들을 지켰으니 안식일을 지킨다든지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는 일, 즉 봉사하는 일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킨 청년,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의 청년을 왜 예수는 적극적으로 자기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정도의 청년이 교회에 나온다고 하는데 거부할 목사가 있을까요 또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면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청년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이 된다면 모범적 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인을 얻는다면 기뻐하지 않을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성의를 다해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직책을 부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그의 제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계명을 지키라고 했고 또 계명을 지킨 청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는 그를 그의 제자로 삼아 자기의 공동체의 일원을 삼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는 믿음도 좋고 재산도 많은 청년을 자기의 제자로 삼지 않았을까요 계명을 잘 지키는 건실한 청년, 돈도 있어서 교회에 도움이 되고 봉사도 할 수 있는 청년을 예수는 끝내 그의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예수는 어리석은 목회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면 예수는 이 부자 청년을 끝내 자기의 제자로 즉 그리스도인으로 삼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사의 수수께끼이면서 동시에 오늘날도 우리가 풀어야 할 의문점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청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충실한 유대교인이었던 것처럼 하나의 제도권 교회의 교인은 될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그는 예수님의 제자는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의 요구 즉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서 요청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그는 재물이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요구, 즉 예수의 혁명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요구 즉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전체적인 것이지 부분적인 것이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과 맘몬의 대립도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즉 이 청년은 유대교라 하는 제도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계명‘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예수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전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청년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부였습니다. 그래서 12세기의 리용의 부자 상인의 아들이었던 Waldus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승려같이 살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왈덴시안이라고 합니다. 14세기 앗시시의 프란체스꼬 역시 부자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수도단체를 우리는 ‘적은 형제단‘ 혹은 ‘프란체스꼬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모두 재산 혹은 부라고 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들은 재산문제를 그냥 두고 ‘교인‘이 되고 장로가 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 14절에 “부자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 말을 저는 그대로 믿습니다. 이것은 요즘 떠들썩하다가 적당히 은폐하려고 하는 한보사건에서도 잘 입증이 됩니다. 사실상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도 재물이 가지고 있는 은폐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부자는 제도교회의 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재산 혹은 부만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를 사서 시험하는 일(부자의 일) 혹은 장가를 가는 일(세상적 기쁨) 혹은 장례 지내는 일(관습) 같은 것들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오늘날의 개념들을 빌어서 말하자면 재산이나 부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여 부자만 가지고 비판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부가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의 제자 되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는 교인은 될 수 있으나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인이 된다는 것과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단순히 교인의 차원을 넘어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인이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미 위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교인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카톨릭의 성자들처럼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승려가 되어야 할까요 이런 방법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하나의‘ 방법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도사 혹은 승려가 되어 검소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존중합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불교의 대승이었던 성철처럼 자기의 가족마저도 버리고 입산 수도한 승려의 생활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이와 같은 승려의 길을 택하는 비상성만을 통해서만 실천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일상성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사실상 예수는 그런 것을 지향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승들의 삶의 원래적 기원은 오히려 그리스의 금욕적 종교와 로마의 군사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수도원 운동과는 달리 우리의 일상성 가운데서 교인의 경지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본회퍼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혹은 피안의 종교성에서가 아니라 차안에서 즉 삶의 한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발견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그는 피안에서의 종교적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고 차안에서의 인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이 되려고 했습니다. 일상성 안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따라서 제도권 교회의 계명들을 지키는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일상성 안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삶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을 붙잡으신다. “ 이 말은 예를 들자면 주일날의 예배행사라고 하는 순수한 종교적 제의나 혹은 피안적 수도원으로의 도피를 통해서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특수한 날로서의 안식일과 일하는 날로서의 보통 날이 극복됩니다(안식일의 밀 이삭 자른 일).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축제의 날과 일상의 날이 사라집니다.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예배보는 일과 장사하는 일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이 하는 일(장사 등)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됩니다. 차안 즉 세속에서 하는 일과 피안에서 하는 거룩한 일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속된 모든 것이 거룩하며 거기에서 시간은 영원과 만납니다. 여기서는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됩니다.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는 사라집니다.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던 것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분명해집니다.
부자 청년은 이러한 일상성과 비상성의 변증법적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따라서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그리고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라고 하는 일상성과 그것을 버리는 비상성의 변증법을 그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성과 비상성, 혹은 차안에서의 피안성, 세속 속에서의 종교성이 가지는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부자 청년의 문제를 접근해 갈 때 제시되는 조건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일상성에서 비상성에로의 장애를 -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그것이 재산이든지 그밖에 어떤 것이든지 간에 -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만드는 경우 우리가 흔히 보는 ‘교인들‘의 탄생은 가능하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여기에 한국 개신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개신교의 부흥의 왜곡된 기반이 있습니다. 즉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교인들의 양산이 한국교회의 오늘날 딜레마입니다. 즉 부자 청년처럼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기꺼이 응하고 따를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가겠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일상성을 통해서 비상성을 와해시키는 개신교적 모델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또 피안을 향해서 종교적 인간이 되는 데서 그 제자 됨을 찾는 카톨릭의 모델도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삶의 한 가운데, 깊은 차안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기도와 노동이 만나는 삶입니다. 아니 노동이 기도를 향하고 보통 날들이 주일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한 가운데서 우리의 것이 주님의 것이 되고 또 주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삶 한가운데서 주님의 삶이 구체화되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은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가용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도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것은 비상성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191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에서 부자들이 재산을 다 내어놓는 것은 정말 비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재산을 국유화함으로써 재산을 소유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비상적인 것, 특수한 것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권력이 특수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집중되지 않고 부가 특수한 사람이나 집단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서 건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1997년을 맞이해서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제도권의 교인들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이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들 때 그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내 ‘멍에‘는 가볍다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상성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일상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산상설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일상성을 말하고 있지 않고 일종의 비상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거기에서는 ‘이웃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사랑‘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왼 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도 내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산상설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비상성을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고, 특히 국가의 권력행사와 같은 상황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비상성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피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에 쓰여 있는 말씀이라 해도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말씀들 가운데 어느 것은 지키고 어느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산상설교에 나타난 이러한 비상성을 피해가도 좋은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비상성을 우리의 일상성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카톨릭은 이 말씀의 대상을 일반인들이 아닌 특수한 종교적 실천자들로 봄으로써 그것을 일반인들이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산상설교는 일반인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특수한 사람들 즉 승려들이나 사제들을 향해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산상설교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성서의 말씀은 모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특히 성서주의자들). 그러나 실제로 개신교인들도 이러한 산상설교의 비상한 말씀들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은유적으로 해석하면서 말씀 그대로는 따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원수 사랑의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시대의 원수는 ‘이방인‘ 즉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는 구약성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뭔가 영적 존재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인 마귀나 사탄 같은 것으로 추상화하여 우리가 직접적으로 대항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성서내용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성서의 말씀을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겠다는 왜곡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성서주의자들처럼 성서의 중요성을 들고 나오지만 성서를 들고 나오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성서의 중요한 내용을 회피해 달아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톨릭은 성서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못 지킬 것은 못 지키겠다고 하는 점에서 좀더 솔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에 관한 말씀도 산상설교의 말씀과 같이 일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뭔가 비상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개신교인들이 영적인 해설을 통해서 피해 가는 말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각하게 직면했던 물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세기의 왈도파의 창시자 발데스가 그랬고 14세기의 성자 성 프랜시스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에 관한 글을 읽고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했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물음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교인이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다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리스도인 혹은 교인이 되는 것은 제도권 교회에 정기적으로 혹은 적당히 출석하고 또 교회가 요구하는 적당한 수준의 헌금을 내고 교리연구와 함께 세례를 받으면 됩니다. 좀더 열심인 사람은 집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을 맡아서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봉사를 하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일단 ‘교인‘(Church pers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제도권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 혹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위에서 말하는 ‘교인‘이 곧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한국의 개신교회의 일반적 인식은 ‘교인‘은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개개 교단들이나 정부의 통계에 올라가는 숫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개혁자 루터가 말하는 ‘가시적 교회‘ 혹은 ‘현세적 교회‘에 소속된 일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이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인들 모두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불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다고 했고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Calvin)은 예정론을 통해서 선택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즉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은 ‘불 가시적 교회‘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교인‘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교회에 속한다고 곧 예수의 제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곧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설교 본문의 말씀은 교인과 예수의 제자를 나누는데 있어서 중요한 준거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교인이 되는 일은 일상적으로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이 와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그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가복음에 보면, 그 청년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청년은 나무랄 것이 없는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서는 사람이 율법 즉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유대교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청년은 유대교의 교인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도 오늘날의 우리 나라의 교인들처럼 제도권의 교회가 부과하는 적당한 수준의 ‘계명들‘을 지키는 교인들의 하나는 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으며, 도적질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자였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나라에서도 교인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계명들을 지켰으니 안식일을 지킨다든지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는 일, 즉 봉사하는 일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킨 청년,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의 청년을 왜 예수는 적극적으로 자기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정도의 청년이 교회에 나온다고 하는데 거부할 목사가 있을까요 또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면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청년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이 된다면 모범적 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인을 얻는다면 기뻐하지 않을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성의를 다해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직책을 부여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그의 제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계명을 지키라고 했고 또 계명을 지킨 청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는 그를 그의 제자로 삼아 자기의 공동체의 일원을 삼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는 믿음도 좋고 재산도 많은 청년을 자기의 제자로 삼지 않았을까요 계명을 잘 지키는 건실한 청년, 돈도 있어서 교회에 도움이 되고 봉사도 할 수 있는 청년을 예수는 끝내 그의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예수는 어리석은 목회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면 예수는 이 부자 청년을 끝내 자기의 제자로 즉 그리스도인으로 삼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사의 수수께끼이면서 동시에 오늘날도 우리가 풀어야 할 의문점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청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충실한 유대교인이었던 것처럼 하나의 제도권 교회의 교인은 될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그는 예수님의 제자는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의 요구 즉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서 요청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즉 그는 재물이 많아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요구, 즉 예수의 혁명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요구 즉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전체적인 것이지 부분적인 것이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과 맘몬의 대립도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즉 이 청년은 유대교라 하는 제도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계명‘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예수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전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청년에게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부였습니다. 그래서 12세기의 리용의 부자 상인의 아들이었던 Waldus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승려같이 살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왈덴시안이라고 합니다. 14세기 앗시시의 프란체스꼬 역시 부자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수도단체를 우리는 ‘적은 형제단‘ 혹은 ‘프란체스꼬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모두 재산 혹은 부라고 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들은 재산문제를 그냥 두고 ‘교인‘이 되고 장로가 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 14절에 “부자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 말을 저는 그대로 믿습니다. 이것은 요즘 떠들썩하다가 적당히 은폐하려고 하는 한보사건에서도 잘 입증이 됩니다. 사실상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도 재물이 가지고 있는 은폐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부자는 제도교회의 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재산 혹은 부만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를 사서 시험하는 일(부자의 일) 혹은 장가를 가는 일(세상적 기쁨) 혹은 장례 지내는 일(관습) 같은 것들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오늘날의 개념들을 빌어서 말하자면 재산이나 부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여 부자만 가지고 비판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부가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의 제자 되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는 교인은 될 수 있으나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인이 된다는 것과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단순히 교인의 차원을 넘어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인이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미 위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교인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카톨릭의 성자들처럼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승려가 되어야 할까요 이런 방법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하나의‘ 방법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도사 혹은 승려가 되어 검소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존중합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불교의 대승이었던 성철처럼 자기의 가족마저도 버리고 입산 수도한 승려의 생활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이와 같은 승려의 길을 택하는 비상성만을 통해서만 실천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일상성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사실상 예수는 그런 것을 지향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승들의 삶의 원래적 기원은 오히려 그리스의 금욕적 종교와 로마의 군사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수도원 운동과는 달리 우리의 일상성 가운데서 교인의 경지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본회퍼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혹은 피안의 종교성에서가 아니라 차안에서 즉 삶의 한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발견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그는 피안에서의 종교적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고 차안에서의 인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이 되려고 했습니다. 일상성 안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따라서 제도권 교회의 계명들을 지키는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일상성 안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삶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을 붙잡으신다. “ 이 말은 예를 들자면 주일날의 예배행사라고 하는 순수한 종교적 제의나 혹은 피안적 수도원으로의 도피를 통해서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특수한 날로서의 안식일과 일하는 날로서의 보통 날이 극복됩니다(안식일의 밀 이삭 자른 일).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축제의 날과 일상의 날이 사라집니다. 예수의 제자의 길에서는 예배보는 일과 장사하는 일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이 하는 일(장사 등)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됩니다. 차안 즉 세속에서 하는 일과 피안에서 하는 거룩한 일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속된 모든 것이 거룩하며 거기에서 시간은 영원과 만납니다. 여기서는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됩니다.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는 사라집니다.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던 것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분명해집니다.
부자 청년은 이러한 일상성과 비상성의 변증법적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따라서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그리고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라고 하는 일상성과 그것을 버리는 비상성의 변증법을 그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성과 비상성, 혹은 차안에서의 피안성, 세속 속에서의 종교성이 가지는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부자 청년의 문제를 접근해 갈 때 제시되는 조건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일상성에서 비상성에로의 장애를 -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그것이 재산이든지 그밖에 어떤 것이든지 간에 -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상성을 비상성으로 만드는 경우 우리가 흔히 보는 ‘교인들‘의 탄생은 가능하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여기에 한국 개신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개신교의 부흥의 왜곡된 기반이 있습니다. 즉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교인들의 양산이 한국교회의 오늘날 딜레마입니다. 즉 부자 청년처럼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기꺼이 응하고 따를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가겠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일상성을 통해서 비상성을 와해시키는 개신교적 모델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또 피안을 향해서 종교적 인간이 되는 데서 그 제자 됨을 찾는 카톨릭의 모델도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삶의 한 가운데, 깊은 차안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기도와 노동이 만나는 삶입니다. 아니 노동이 기도를 향하고 보통 날들이 주일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한 가운데서 우리의 것이 주님의 것이 되고 또 주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일상적 삶 한가운데서 주님의 삶이 구체화되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은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가용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도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것은 비상성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191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에서 부자들이 재산을 다 내어놓는 것은 정말 비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재산을 국유화함으로써 재산을 소유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비상적인 것, 특수한 것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권력이 특수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집중되지 않고 부가 특수한 사람이나 집단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서 건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1997년을 맞이해서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제도권의 교인들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이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비상성을 일상성으로 만들 때 그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내 ‘멍에‘는 가볍다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상성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일상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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