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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청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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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누가 12 : 28)
아무런 대책 없이 사회의 최말단에서, 강제 철거와 만성적 실업, 소외와 가난의 굴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줄 알고 그들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 갈 준비가 되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나는 곳, 사업을 통해 나와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축적하는 곳.
나는 날마다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그 지겹고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날마다 울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낱같지만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자리에 있다.
여기가 내가 선 삶의 자리이다. 이 곳은 참으로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대부분이 여성가장인 내가 맡은 사업의 주민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데 바로 오늘이다.
오늘 모임에서는 꼭 하고 싶은 소원 100가지를 적어보시라고, 돈과 시간과 인적자원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시고 마음껏 적어보라고 주문을 했다.
그런데 거의 다 10가지 이상을 넘기지 못했다. 1번 집사기, 2번 적금 많이 들기 3번 김치냉장고, 4번 온가족 건강하기 5번 해외여행 호주 6번 미국 7번 일본….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고 다시 한 번 적어보시라고 다시 말씀드렸다. 웃으시면서 돈이 중요하지 뭐~라고 하신다. 그리고 끝이었다. 언제나 앉으나 서나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을 이루고 나면 정작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돈을 버는 것인지에 대한 공부를 할 생각은 왜 없을까 인간으로서 가치로운 것들에 대한 생각은 왜 접어버리게 되었을까 날마다 돈타령만하는 사람들의 자녀는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라게 될까 돈 벌기를 원하긴 하는데 그것을 통해 얻고 싶은 그 진짜는 무엇일까’라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돈이 없으니까 돈에 집중하게 되고 진짜가 묻혀 버리고 만 것 같다. 돈을 버는 방법들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그렇다면 그 진짜는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 이 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진짜는 무엇일까.
“돈“이 아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진리, 즉 자유케 되리라는 그것의 진실은 적은 돈으로도 살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일일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곧 인간의 일일 것이다. 나 혼자만 잘사는 일이 아닐 것이다. 온 생명과 전 지구적인 거시적인 안목과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모습을 다 아우르는 그것 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예수도인의 모습일까
경제 때문에 저 유유히 흐르는 강의 물길을 바꾸고, 돈 때문에 안전한 먹거리를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무섭고 끔찍한 가치관과 맞서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젠가 곰 한 마리를 사육하면서 그 쓸개를 뽑아내는데 세상에 사탕을 하나 물리면 그 곰은 그 아픔을 잊고 사탕을 빨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사탕하나에 쓸개를 잃어버리는 곰과 같은 엉망이 된 가치관 말이다. 하여간 이건 아니다.
30대 초반의 청년 예수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예수는 스스로 가난해진 분이었다. 그가 일으킨 혁명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꿔주는 일이었다. 땅의 것만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었다.
예수가 찾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뿌리가 아니었다. 예수가 살아 냈던 혁명의 삶이란 내가 변화되어 내 이웃을 조금씩 변화시켜 가는 것이었다. 헌신적 열정, 도전과 실험, 창조 정신,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 기다릴 줄 알고, 열려 있는 사람, 조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감동을 창조해 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스스로 자립하여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혁명 말이다. 조금 거창한 것 같다.
작은 바람이라면 그분들이 돈 때문에 결코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최소한의 문화생활만큼은 누리고 사셨으면 좋겠다.
다음에 100가지 소원을 쓰는 설문조사에서는 집사기, 냉장고사기 이런 거 말고 내 이름으로 된 수필집 하나 내보기, 시나리오 작가 되어보기, 생명평화운동 관련회원 되기 등 돈은 별로 안 들고 있어는 보이는 꿈을 하나쯤 발표해 주시길 기대해 본다.
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 : 3)
우선 이렇게 헌신예배라는 시간을 통해 짧지만 말씀을 드릴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강원도 홍천의 시골 조그마한 보건지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레이스가 달린 고급 챙모자를 쓰고 알록달록한 원피스, 점박이 무늬가 바로 눈에 띄는 구두를 신은 하이얀 백발의 할머니께서 진료실에 들어섰습니다. 도시보다 지방의 노령화는 더 심각해서 대부분의 환자들이 60세 이상의 노인입니다. 하지만 그런 차림새의 노인분들은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유난히 그 할머니에게 눈이 갔습니다. 하지만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할머니의 인지능력이었습니다. 자신이 처방받은 약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에 관한 질문도 하셨습니다. 왠만한 젊은이도 모르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나 저를 제일 당황시킨 것은 컴퓨터 진료기록에 쓰인 할머니의 연세였습니다. ‘94세’ 만으로 94세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생일이 지나면 95세가 넘으셨지요. 그러나 참 젊게 사시는 할머니셨던 기억이 납니다.
문득 그 할머니를 기억하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젊음-한 번 가고 안 온다는 그 젊음, 여기 앞에 계신분들이 한 번씩은 다 지나셨을 그 젊음,
그 젊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열정’이었습니다.
앞에 젊게 사시는 할머니를 말씀드린 바대로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만으로 과연 젊음을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개인의 삶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유수한 역사 속에서 지금 저희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에 대한 무수한 젊은이들의 노력과 헌신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또 젊음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개인의 삶’을 넘어선 다른 이와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한 기존 고정관념을 깨는 날카로운 비판과 원칙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국의 사상가 노신이 ‘청년들이여 나를 밟고가라’ 라고 말한 것 처럼 청년들은 이 시대의
기존가치를 냉정하게 분석한 다음 새로운 시대의 기치에 맞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번의 소고기 사태 때 이러한 날카로운 비판과 행동의 ‘젊음’이 나타났지요. 그럼으로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행동하는 사람은 ‘젊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문득
이러한 젊음의 정의는 흔들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젊음은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지위나 안정적 기반에 처하면 또 다른 기존의 고정관념에 흡수되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또한 타인, 사회에 대한 엄격한 잣대와는 달리 자기 스스로의 잣대는 다른 기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젊은 예수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네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다른 이와 사회를 비판하는 그 원칙과 잣대를 먼저 자신에게 들이대어 보라고 역설합니다. ’젊음‘의 또 다른 정의입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그것이 ‘젊음’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의 정의가 아닐까합니다. 그 젊음은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배우고 익힌 문화와 교육 속에서 생긴 ‘원칙’을 타인과 사회에 적용하기 앞서 스스로에게 적용시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그 ‘하기 싫은 것들을 감내하는 용기와 결단력‘이 현실적인 젊음의 참뜻이 아닌지요. 타성에 젖고 편한 것만 하는 것은 이미 늙고 병든 것입니다. 사회에서 진보든 보수든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간에 ‘젊음’을 간직하려면 다른 이에게 들이댄 원칙을 먼저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젊음’의 정의를 새길 교회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을 보고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유아세례의 의미는 충분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제들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와 결단의 의미겠죠. 그 유아세례를 하신 부모님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라는 종교적 절차가 저희 교회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묻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적용되었던 원칙을 스스로에게는 적용시키지 않는 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유아세례보다 그 시간을‘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의 선서’라는 형식으로 바꾸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배도 잘 안 나오는 잘 모르는 젊은 놈이 별말을 다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공식예배시간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저희 새길 교회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제 말도 건설적인 비판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의 젊음의 탐구와 새길 교회의 젊음의 노력이 함께 하길 바라며 이만 말씀을 마칩니다.
3.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 (마가 9 : 50)
청년 예수. 오늘은 이 청년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겠습니다.
청년이란 무엇일까요 푸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하루하루 해가 떠서 해가지는 걸 바라보며, 제게 주어진 시간들을 받아들이며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고민합니다.
난 오늘, 푸르게 살았는가
꿈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었던 제 지난 젊은 날을 얘기해볼게요.
저는 군대를 장교로 갔습니다. 이번 달에 전역을 앞두고 있습니다. 군대 가기 전, 참 망설였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살인 기술, 총 쏘기, 칼 휘두르기 같은 걸 해야만 하는가
저는 두려웠습니다. 병역 거부를 할 때 빤하게 벌어질 사태들, 저는 양심의 눈을 감았습니다. 군복무는 이회창씨를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시킬 만큼 한국에서 민감하게 작용하는 사안이고 커다란 힘이 있어서 현실에 잠시 몸을 접었습니다. 그러면서 얄팍한 위로를 했습니다.
'당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한다. 그 경험을 같이 한다는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군대를 가서 체험을 해서 분단의 슬픔, 군대의 고통을 느끼고 더 성장해서 세상에 얘기하자. '
그렇게 간 군대였습니다. 조금 더 자유롭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장교를 선택했지만 실제로 소위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더라고요. 일반 생활에서 키워오고 지켜왔던 가치관과 신념들이 군대, 특수한 환경이라는 논리에서 훼손되고 흔들립니다. 사람의 묘한 심리상 흔히 갈군다, 소리치고 억압하고 옥죄면 어느 정도 순간 효과는 나타납니다. 성과를 중시하는 군대에서 갈구는 건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멀리 보고 싶었습니다. 갈궈서 한다면 그 친구는 갈궈야지만 하는 사람이 될거다.
믿어주고 스스로 해야 하는 걸 느끼고 하도록 기다려주자,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그게 진정한 리더고 더 큰 효율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윗분들은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부대원에게 잘만 대해주는 제 모습이 무척 못마땅했나봅니다. 호출이 잦아지고, 뒷짐 지고 욕을 먹는 나날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늘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놀던 나날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산골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까만 밤 하늘. 그때는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더 슬펐던 건 전국의 다른 부대로 간 친구들과 만났을 때입니다.
강직하고 순수했던 친구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가슴으로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착하고 조용했던 친구가 권위주의와 냉정함으로 자신을 무장한 것에 얼마나 아팠는지.
피로와 짜증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군 시절 친구들을 떠올리면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부대원들이 처음에 이런 얘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처음 간부들이 오면 다들 잘해주지만 시간 지나면 다 변한다고, 너무 잘해주지 말라고. 변하면 슬플 거라고.
저는 처음 소대장으로 갔을 때 2년 6개월 뒤 2008년 8월 15일에 우리 소대원들은 전부 건강하게 보는거다.
우린 서로를 믿고 챙긴다. 이렇게 못을 박고 시작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많이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 친구들이 연락와서 2008년 8월 15일을 잊지 않고 전부 보고 싶다고 얘기하네요. 곧 8. 15가 다가옵니다.
청년이란, 처음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처음처럼 소주만 좋아하시지 마시고
늘 처음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예수는 세상에 온 이유와 사람을 향한 사랑을 지킨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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