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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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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유년기를 과천에서 보냈습니다. 당시의 과천은 개발되지 못한 시골이었습니다. 서울을 지척에 두고 있는 동네였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벼농사는 물론 요즘 한창인 포도와 수박, 참외, 복숭아, 토마토 등의 과일밭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과천의 배는 그 당도가 아주 높아 인기가 있는 과일이었습니다. 마을 주변은 여기저기 원두막이 서있고 관악산을 뒤로 둔 마을의 모습은 아름다운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에 가끔씩 사람들의 무리가 신작로를 따라 길게 지나가곤 했습니다. 어떤 행렬에는 수십개의 만장을 휘날리며 수백명의 사람이 뒤따르는 장엄한 모습이기도 했고 어떤 모습은 그저 몇몇 사람만이 슬픔에 젖어 손수레의 뒤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아서 인지 저는 어릴 적에 자주 죽음과 장례 행렬의 그 슬프고도 두려운 꿈을 자주 꾸며 가위눌려 왔습니다. 그 기억은 성인이 된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 마음 속엔 지금도 죽음의 어두운 기억과 장례행렬의 비통함이 스며 있습니다.
이런 기억이 비단 제게만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 곁에 있습니다. 순간순간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 죽음의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드리워져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겪었고 친구의 죽음에 허탈해 합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죽습니다. 권력의 꼭대기에 섯던 사람도 죽습니다. 명예와 인기의 정상을 밟았던 사람도 반드시 죽습니다.
9월 2일자 신문을 보니 7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 코미디언인 곽규석 목사의 죽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기가 절정일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다가 70이 넘어 은퇴한 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한 청년의 죽음이 행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손에 들려 운구되는 관의 무게보다 그 행렬의 비통함이 더 무거워 보입니다.
이 죽은 청년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 천하를 얻어 보고 싶은 기개도 있었을 것입니다. 청년의 팔과 다리는 세상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절친한 친구의 애타는 심정도 이 청년의 생명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죽은 자를 장사지낼 뿐, 그 누구도 이 청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행렬의 슬픔과 절망과 비통함은 온 길가를 뒤덮고 있습니다.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외로운 여인의 통곡이 산을 울리고 쏟아지는 눈물이 길을 적십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행렬을 멈춰 세우는 또 다른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 그 반대편에서 어쩌면 죽은 청년과 동년배일지도 모를 30대의 한 청년을 앞세우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일행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망을 부수고 힘차게 솟구치는 기쁨과 희망과 환희의 소리가 죽음 저편 반대편의 길을 덮고 있습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마주친 것입니다. 슬픔의 곡소리와 기쁨의 찬양소리가 마주친 것입니다. 탄식의 도가니가 소망과 환희의 물결을 만난 것입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과 함께있지 않은 절망과 비극의 무리였습니다. 한 무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있어 생명과 부활에 참예한 무리입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요 5:24) 무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너무나 다른 극단의 무리가 나인성 밖 한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플러스 전극과 마이너스 전극이 만나면 전기가 통하고 불꽃이 튀듯이 이 첨예한 대립의 길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길에 생명을 구원하는 생명줄이 내려졌습니다.
롬 5:17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 (딤후 1:10) 오늘의 본문이 그 예수님을 명확하게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님 밖에 죽음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1. 예수와 함께 있지 않은 것
예수님 없는 청년의 가정에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찾아 왔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죽을 수 밖에 없고 물가에 심겨지지 않은 나무가 말라 죽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영생의 양식을, 영생하는 물을 얻지 못하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으로 배부르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권세를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런 모습을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과 사람사는 맛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높은 지위나 명예나 인기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유해보기도 했고 가난해보기도 했고 무소불위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권세를 누려보기도 했고 예수 때문에 매질도 당하고 옥에 갖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족함을 배웠노라"
여러분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생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늘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육신의 생각이, 죽음의 그림자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율법의 정죄가 내 몸을 다스립니다. 그 율법의 정죄가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 8:6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3. 율법에 묶여 자유하지 못한 것
여러분 프랑스 혁명 때의 구호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늘 율법에 매여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법은 규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법은 "~를 하지 말라. ~를 하면 무슨 무슨 벌을 받는다" 라는 금지명령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최고의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7:10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찾지 않고 율법만을 뒤적인다면 그 사람 또한 죽은 사람입니다.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하였음"(롬 8:2)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예수와 만나 예수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와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믿는 다는 것은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 이 복음의 핵심 케리그마를 '나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속에 계십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때에 비록 거친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이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생명을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했던 바울 사도는 그 기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예수와 함께 있으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날마다 주를 기리고 주안에 항상 살면서 딴길로 가지 맙시다. "
2.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어 자유케 된 사람은 육신의 일을 버리고 영의 일을 합니다. 영의 생각을 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롬 8:6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는 영의 생각이란 "위엣 것을 찾는" 생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 육신의 생각은 내 마음이고 영의 생각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1 3:14
3. 율법의 정죄를 물리치고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유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어린 아이는 아빠, 엄마의 그늘에 있을 때 자유롭고, 즐겁고, 긍정적입니다. 부모의 곁을 떠나면 불안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이 되고 자유롭게 뛰놀지도 못합니다. 자꾸 의심합니다. 늘 초조와 근심으로 두리번 거립니다. (예화 : 잃어버렸던 용훈이가 길에 서있던 모습) 기쁨이 없습니다.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율법의 그늘에서 벗어나십시오. 죄를 지으면 언제나 죄책의 굴레에 잡혀 있게 됩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말과 마음과 행동을 버리면 죄책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이 이 땅에 하나도 없으며 의를 행할 능력도 우리에게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 진리이신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아래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을 믿고 받아 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짐을 벗으면 기뻐 뛰는 것입니다. 무거운 올무가 벗겨 졌으니 외양간의 고삐 뿔린 소가 뛰듯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의 멍에에 종노릇하게 합니다. 정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언제나 울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자유케 된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맛보아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믿음,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적극적입니다. 긍정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심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주 이신 예수님께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조문에 얽매여 살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살리고 더나아가 율법의 정죄에 놓였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생명을 나눠주셨습니다.
죽음의 행렬 앞에 서신 예수님은 땅 속에 뭍혀야 될 청년의 주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오늘!
말씀이 없어 병들고 기갈한 이 사회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정의 온갖 문제로 시름에 잠겨있는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인생의 장벽과 시련 앞에서 좌절하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수고와 열심은 식어지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앞에서, 아직도 율법의 정죄와 땅의 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들에게, 잠자는 주님의 교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 "청년아 벌떡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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