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7)
본문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고 나인성으로 가던 중 죽은자를 메고 성에서 나오는 장사행열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살려 그 어머니에게 주니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가 큰 선지자가 아니냐 하므로 그 소문이 사방에 퍼진 사건이다.
1, 사망과 종교
12-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 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에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죽음이 없는 영원한 존재로 창조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이 금하신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사망에 이르기 되었다.
롬5;12-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 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를 짖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 죄의 문제와 내세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종교가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람의 존재니 내세에 대하여 정의도 못하고 해결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정신적 만족을 위한 신비주의 이성의 만족을 위한 철학주의 육체의 만족을 위한 종교의식이 전부인 것이다.
본문에 보니 불쌍한 과부가 등장한다.
일찍이 남편이 죽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지금은 아들이 죽어 장사지내려고 시신을 따라 나오니 그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생명이 없는 유대 종교는 과부의 남편이 죽었을 때도 교회예전을 따라 장례를 지내주었으며 여호와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고 아들이 죽은 지금도 같은 의식을 좇아 장례를 지내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생명이 없는 종교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바울도 세상종교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했다.
롬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듯 죽음이란 쉬지 않고 사람에게 절망의 고통을 주었으며 사람은 절망의 죽음을 이기려고 오늘까지도 쉬지 않고 싸워왔다.
2, 사망과 기독교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오사 그 관에 손을 대 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세상의 모든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사망과, 영생과 내세에 대하여 분명히 정의하고 있 으며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에 보니 죽은 자를 장사지내려고 성밖으로 나오는 유대교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행렬이 마주쳤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메고 나오는 시신에 손을 대고 장사의 행렬을 막았다.
14-가까이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과부의 죽은 아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이며 사탄의 권세이다.
실패한 사업 이루지 못한 꿈, 감당하기에 지친 시험, 인간을 괴롭히는 질병, 사람 사이에 있는 시기와 질투와 갈등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
기독교는 마귀의 역사로 이러한 일을 당하여 애통하며 절망하는 나인성 과부와 같은 자기 백성들을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생과, 사의 정면 대결이요, 형식적인 종교와 생명의 종교와의 정면대결이며 사탄과의 정면대결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세 기간동안 죽은 자를 살린 역사가 3번이다.
눅 8장-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다.
요11장-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인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다.
눅 7장-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청년을 살렸다.
기독교는 신비나 철학이나 의식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다.
요11;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빛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종교와 같이 사망 당한 자를 위로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종교의식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는 현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전도하려 보내시면서 분부하신 말씀을 보면 기독교의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마10;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좇아내되 너희가 거져받았으니 거져주어.
눅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간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예: 인도에 있는 엔소니 드멜로 신부가 있었다. 그는 예수회 영성회 신부인데 신학교를 나와 아프리카로 가는 젊은 신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된 자들에게 선교의 사명과 이를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는데 지금보 면 주님이 주신 그것은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것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 사명을
행하지 못한다면 신부의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단의 역사로 인하여 사망 당한 모든 이들에게 담대하게 맛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없다.
그것은 성령 받는 길이며 성령을 받는 길은 기도하는 길이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3,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변화
14-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은 생명인 그리스도가 그 본뜻을 잃고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고 의식을 따라 장사지내는 잠자는 종교가된것에 충돌하는 큰소리며 사망당한자가 살아나는 대변화의 역사이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과부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껴안은 것이 기독교이다.
과부는 생명과 같이 사랑하던 아들이 죽자 절망에 빠진다.
과부는 다시 살아난 그 아들을 끌어안은 순간 전율이 일어나듯 그의 영적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부는 죽은 아들을 끌어안았을 때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부는 자기가 사랑해야할 대상 자기의 생애를 다기우려 투자하고 쏟아 부어도 결코 후회하지 아니할 대상이 남편도 아니며 지금 살아난 아들도 아니라.
관에 손을 얹고 장사의 행렬을 가로막은 이분
사망 당한 아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일어서라고 외친 이분
살아난 아들을 자기에게 주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예수를 알게된 이것이 대변화인 것이다.
이 시간 우리도 이 말씀과 함께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37-38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마추고 향유를 부으니.
나인성 과부가 삶으리 방향을 바꾼 것 같이
죄인인 한 여자가 이 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 담은 옥합을 예수의 발에 붓는 것 같이 변화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 셨다 하고.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것이 교회의 부흥이다. )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을 살려 그 어머니에게 주니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가 큰 선지자가 아니냐 하므로 그 소문이 사방에 퍼진 사건이다.
1, 사망과 종교
12-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 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에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죽음이 없는 영원한 존재로 창조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이 금하신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사망에 이르기 되었다.
롬5;12-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 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를 짖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 죄의 문제와 내세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 종교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종교가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람의 존재니 내세에 대하여 정의도 못하고 해결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정신적 만족을 위한 신비주의 이성의 만족을 위한 철학주의 육체의 만족을 위한 종교의식이 전부인 것이다.
본문에 보니 불쌍한 과부가 등장한다.
일찍이 남편이 죽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지금은 아들이 죽어 장사지내려고 시신을 따라 나오니 그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생명이 없는 유대 종교는 과부의 남편이 죽었을 때도 교회예전을 따라 장례를 지내주었으며 여호와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고 아들이 죽은 지금도 같은 의식을 좇아 장례를 지내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생명이 없는 종교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바울도 세상종교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했다.
롬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듯 죽음이란 쉬지 않고 사람에게 절망의 고통을 주었으며 사람은 절망의 죽음을 이기려고 오늘까지도 쉬지 않고 싸워왔다.
2, 사망과 기독교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오사 그 관에 손을 대 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세상의 모든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사망과, 영생과 내세에 대하여 분명히 정의하고 있 으며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에 보니 죽은 자를 장사지내려고 성밖으로 나오는 유대교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행렬이 마주쳤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메고 나오는 시신에 손을 대고 장사의 행렬을 막았다.
14-가까이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과부의 죽은 아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망이며 사탄의 권세이다.
실패한 사업 이루지 못한 꿈, 감당하기에 지친 시험, 인간을 괴롭히는 질병, 사람 사이에 있는 시기와 질투와 갈등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
기독교는 마귀의 역사로 이러한 일을 당하여 애통하며 절망하는 나인성 과부와 같은 자기 백성들을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생과, 사의 정면 대결이요, 형식적인 종교와 생명의 종교와의 정면대결이며 사탄과의 정면대결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세 기간동안 죽은 자를 살린 역사가 3번이다.
눅 8장-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다.
요11장-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인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다.
눅 7장-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청년을 살렸다.
기독교는 신비나 철학이나 의식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다.
요11;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빛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종교와 같이 사망 당한 자를 위로하고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종교의식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는 현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전도하려 보내시면서 분부하신 말씀을 보면 기독교의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마10;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좇아내되 너희가 거져받았으니 거져주어.
눅10;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간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예: 인도에 있는 엔소니 드멜로 신부가 있었다. 그는 예수회 영성회 신부인데 신학교를 나와 아프리카로 가는 젊은 신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된 자들에게 선교의 사명과 이를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는데 지금보 면 주님이 주신 그것은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것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 사명을
행하지 못한다면 신부의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단의 역사로 인하여 사망 당한 모든 이들에게 담대하게 맛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없다.
그것은 성령 받는 길이며 성령을 받는 길은 기도하는 길이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3,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변화
14-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은 생명인 그리스도가 그 본뜻을 잃고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고 의식을 따라 장사지내는 잠자는 종교가된것에 충돌하는 큰소리며 사망당한자가 살아나는 대변화의 역사이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과부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껴안은 것이 기독교이다.
과부는 생명과 같이 사랑하던 아들이 죽자 절망에 빠진다.
과부는 다시 살아난 그 아들을 끌어안은 순간 전율이 일어나듯 그의 영적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부는 죽은 아들을 끌어안았을 때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부는 자기가 사랑해야할 대상 자기의 생애를 다기우려 투자하고 쏟아 부어도 결코 후회하지 아니할 대상이 남편도 아니며 지금 살아난 아들도 아니라.
관에 손을 얹고 장사의 행렬을 가로막은 이분
사망 당한 아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일어서라고 외친 이분
살아난 아들을 자기에게 주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예수를 알게된 이것이 대변화인 것이다.
이 시간 우리도 이 말씀과 함께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37-38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마추고 향유를 부으니.
나인성 과부가 삶으리 방향을 바꾼 것 같이
죄인인 한 여자가 이 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 담은 옥합을 예수의 발에 붓는 것 같이 변화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 셨다 하고.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것이 교회의 부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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