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아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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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는 지난 1983년 제68회 총회에서 청년주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청년주일은 온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의 청년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며, 또한 청년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하며, 성년으로서의 책임을 새롭게 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는 남자 청년과 장년들의 모임을 청년 면려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임이 후에는 남선교회와 청년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1949년에 와서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조직되었으니 내년으로 희년인 제5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 청년 운동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 청년연합회를 줄여서 장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청에서 발표한 올해 청년 주일의 선언문을 보면 "거듭나는 선교 장청으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선교 장청, 섬김과 나눔이라는 말이 대단히 좋은 말입니다.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21세기는 여러분, 청년들의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느냐에 따라 좋은 세상도 될 수 있고, 불안한 세상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며, 나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나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는 지금 청년들의 꿈과 이상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되어야겠습니다.
청년들이 모여서 청소년들과 어른들을 섬기며, 그들 나름대로 사업을 구상하고, 사회를 섬길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와 모임은 교회의 청년회를 제외하고는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대학의 동아리들이 있어 훈련할 수 있지만, 동아리라는 말 자체가 같은 관심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몇 몇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사회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청년회는 교회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찾아보고, 가진 달란트를 활용하여 우리 사회의 불우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구석구석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는 청년의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어느 시대라고 중요하지 않은 때가 있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청년 때는 가장 가치 있어 귀하고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젊다고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따르고 여러분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문화에 빠져 들어갈 수 있는 위험이 따르고 있습니다. 청년의 시절은 이제 어른들의 간섭을 벗어나면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선택에 따르는 책임까지도 자기의 몫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좀 힘들고 어렵지만, 좁은 길을 가야하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년의 때에 믿어 구원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늙어서 힘이 없고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에도 물론 예수 믿어야 하지만,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만큼 크신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장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업에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 다윗은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라(시119:9)"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가치관을 소유하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불러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려고 만세 전에 예정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의 소명의식이 없다면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으며, 이 세상을 개척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상시키고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지금까지 이만큼이라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섭리와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의 때는 악에 물들기 쉬운 때입니다. 악은 달콤한 사탕과 같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와 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이 세상 가는 곳마다 죄악이 아닌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접하는 모든 세계가 다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소명의식과 기독교의 가치관이 아니라면 이겨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용하시려고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시한 일에 매달려 죄악의 종노릇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그 지글러 교수는 정상에서 만납시다에서 "계단을 따라 오른 자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계단은 정직, 고귀한 인격, 신념, 성실,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원설 박사가 쓰신 아침을 준비하는 자는 늘 깨어 있다는 칼럼 집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세대를 다니던 중에 중퇴하고 우리 장신대의 전신인 총회신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여 역사학 박사, 문학박사,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는 경희대 부총장과 한남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분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의 글 가운데 비전의 힘(The Power of Vision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잠29:18절의 말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는 명언입니다. "묵시"라고 했지만 '환상', '이상',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현 대통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 박사는 "비전이란 우리의 정신세계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분명한 미래에 대한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 "비전이란 잠재력을 바탕으로 하며, 통찰력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박사는 비전을 설명합니다.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비전은 결코 주어진 상황을 가만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저 너머에 존재하는 부분까지 확장해 나가기 위해 실제적으로 뻗어나가는 현실이다"라고 했습니다.
'63년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의 잔디밭에는 많은 학생들이 당시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잔디밭에 서 있었던 학생 중에 현재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올라와서 전혀 이름 없는 소년이 미국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과 악수를 한다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고 설렘이었습니다. 그 감격과 설렘이 비전을 주었고, 마침내 그 자리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클린턴은 그가 낳기도 전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어머니는 여러 번 재혼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한 불우한 환경도 그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레이 스미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비전은 사람들을 더 높은 목표로 향하게 하며 또한 그들의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은 감격과 희열이 있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듣고 과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쉐마' 교육을 통하여 어려서부터 선악을 분별하는 말씀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졌기 때문에 말씀이 평생 떠나지 않고 그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시작하는 신명기 6:4-9의 말씀이 '쉐마'입니다.
"들으라"라는 말에서 '쉐마'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자라는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은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미국 인구의 3% 미만인데 전국의 유명한 대학교 교수의 약 30%가 유태인이요, 세계 각국에서 선발되는 노벨상 수상자 중에 약 15%가 유태인이 차지하였습니다. 세계의 경제를 잡고 있는 로스차일드나 모우건 같은 다국적 기업이 유태인의 것입니다.
어떤 글을 읽다보니 "청년 시절엔 하루는 짧고 한 해는 길다. 노년 시절엔 하루는 길고 한 해는 짧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졌고 노인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졌다. 노인은 세월이 빠르다고 말하고 청년은 앞길이 창창하다고 말한다.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시간이나 세월에 대한 명언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시간은 만족과 기쁨을 주는 원천이라"고 합니다. 시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무엇인가 족적과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잘 사용하면 얼마든지 그가 구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쓰던 자기의 할 것이지만,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마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미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시간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강물이라고 함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흐르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의 단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을 논할 때는 대개 10 년을 단위로 말합니다. 10대, 20대, …50대... 70대 이런 말로 시간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간에 대한 속도감은 자기 연령의 배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50대가 되었다고 하면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시간의 단위를 1년으로, 어떤 분은 한 달로, 어떤 분은 1주일을 시간의 단위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많은 분들이 시간의 단위를 하루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하루를 소중하고 보람있게 보내자는 것입니다. 이 생각도 좋기는 하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의 시간 단위는 아닙니다. 시간이란 초침의 이동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 초 일초를 긴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감당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한 시간 단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한 시간을 낭비하면 엄청난 차질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하루 중에 한 시간만 더 길게 사용하자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시간이 더 여백이 남아있고,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느끼는지 모르지만, 헤프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은 10년 단위도 아닙니다. 일년 단위도 아니고, 한 달 단위나 일주일이나, 더욱 하루도 아닌 한 시간 단위로 아껴 사용해야 합니다. 하루를 길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 기도회를 참석하면 하루를 한 시간 더 길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잘 부르지 않지만, 우리 학생 때 왜 그렇게 구슬픈 노래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기러기 울어대는 하늘 구만리/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후렴이 정말 인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따뜻한 봄날에 서 있지만 바람이 싸늘 불어 깊은 가을이 오고 산천에 눈이 쌓여서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년의식을 간단히 거행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관례라는 의식처럼 예식화된 성년식이 있는가 하면, 학대를 가하는 민속적인 성년식도 있습니다. 학대를 가하는 성년의식이 더 원초적이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성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태평양에서 폴리네시아에서 채집된 성년식을 보면, 정말 가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벌겋게 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일정시간 동안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들고 있어야 한다든지, 코코넛의 가랑잎을 태워 불덩이 비를 내리는 가운데 벌거벗은 채 일정시간 서 있어야만 한다든지... 또 가시가 돋친 회초리로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피비린내에 굶주린 독개미 집 위에 세워두기도 하였습니다. 북미 인디언의 성년의식은 너무 가혹하여 강단에서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한 학대를 가했습니다. 어떤 부족은 등의 근육을 뚫고 나무에 매어 달기도 했습니다.
성년이 되는 연령에서 이처럼 시련을 가하는 이유는, 부모 슬하에서 나약하게 부모를 의존했던 생활을 벗어나 모든 일에 책임지는 고된 생활로 옮겨가는데 그 고통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련을 겪을 때 비로소 성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인 성에 외아들을 데리고 사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소망이요 기둥 같은 청년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생명의 행렬이었고, 그들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청년이었고,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성의 많은 사람들도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따라나오고 있었습니다.
죽은 청년은 여인의 독자였으니 남편을 잃은 후 가난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소망이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죽은 것입니다. 이제 한 참 일할 나이가 되었고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집안을 일으키고 효성을 다하려던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죽음이란 먼저 남편을 빼앗아가고 이제는 아들까지도 불러가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현실 앞에 모든 사람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무참히 한 여인의 소망을 짓밟아버리고, 인정 사정없이 그의 품에서 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에게 먼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절망 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의 위로가 되셨고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손을 쓸 수 없지만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의 행렬에 뛰어 들어오셨고,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말을 나눌 수 있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에 자던 영혼들을 다 불러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흙으로 만드신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던 청년을 살리셔서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죽은 시신을 돌려주기도 하고 부상당한 몸을 돌려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죽었던 아들을 살리셔서 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된 도리도 감당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 다시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기쁨에만 들떠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여러분의 생명을 마쳐야겠습니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겨우 나 자신 먹고 출세하고 놀다가 가는 불행한 지식인들이 되지 말고, 불쌍한 여인들, 불쌍히 마을 사람들, 죽음 앞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수많은 군중을 위하여 생명의 양식을 전하시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는 남자 청년과 장년들의 모임을 청년 면려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모임이 후에는 남선교회와 청년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1949년에 와서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조직되었으니 내년으로 희년인 제5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 청년 운동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 청년연합회를 줄여서 장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청에서 발표한 올해 청년 주일의 선언문을 보면 "거듭나는 선교 장청으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선교 장청, 섬김과 나눔이라는 말이 대단히 좋은 말입니다.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21세기는 여러분, 청년들의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느냐에 따라 좋은 세상도 될 수 있고, 불안한 세상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며, 나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나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는 지금 청년들의 꿈과 이상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되어야겠습니다.
청년들이 모여서 청소년들과 어른들을 섬기며, 그들 나름대로 사업을 구상하고, 사회를 섬길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와 모임은 교회의 청년회를 제외하고는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대학의 동아리들이 있어 훈련할 수 있지만, 동아리라는 말 자체가 같은 관심과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몇 몇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사회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청년회는 교회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찾아보고, 가진 달란트를 활용하여 우리 사회의 불우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구석구석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는 청년의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어느 시대라고 중요하지 않은 때가 있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청년 때는 가장 가치 있어 귀하고 아름다운 시절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젊다고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따르고 여러분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문화에 빠져 들어갈 수 있는 위험이 따르고 있습니다. 청년의 시절은 이제 어른들의 간섭을 벗어나면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선택에 따르는 책임까지도 자기의 몫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좀 힘들고 어렵지만, 좁은 길을 가야하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년의 때에 믿어 구원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늙어서 힘이 없고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에도 물론 예수 믿어야 하지만,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만큼 크신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장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업에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 다윗은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라(시119:9)"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가치관을 소유하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불러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려고 만세 전에 예정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의 소명의식이 없다면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으며, 이 세상을 개척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상시키고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지금까지 이만큼이라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섭리와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의 때는 악에 물들기 쉬운 때입니다. 악은 달콤한 사탕과 같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와 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죄악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이 세상 가는 곳마다 죄악이 아닌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접하는 모든 세계가 다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소명의식과 기독교의 가치관이 아니라면 이겨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용하시려고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시한 일에 매달려 죄악의 종노릇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그 지글러 교수는 정상에서 만납시다에서 "계단을 따라 오른 자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계단은 정직, 고귀한 인격, 신념, 성실,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원설 박사가 쓰신 아침을 준비하는 자는 늘 깨어 있다는 칼럼 집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세대를 다니던 중에 중퇴하고 우리 장신대의 전신인 총회신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여 역사학 박사, 문학박사,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는 경희대 부총장과 한남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분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의 글 가운데 비전의 힘(The Power of Vision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잠29:18절의 말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는 명언입니다. "묵시"라고 했지만 '환상', '이상',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현 대통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 박사는 "비전이란 우리의 정신세계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분명한 미래에 대한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 "비전이란 잠재력을 바탕으로 하며, 통찰력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박사는 비전을 설명합니다.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비전은 결코 주어진 상황을 가만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저 너머에 존재하는 부분까지 확장해 나가기 위해 실제적으로 뻗어나가는 현실이다"라고 했습니다.
'63년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의 잔디밭에는 많은 학생들이 당시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잔디밭에 서 있었던 학생 중에 현재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올라와서 전혀 이름 없는 소년이 미국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과 악수를 한다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고 설렘이었습니다. 그 감격과 설렘이 비전을 주었고, 마침내 그 자리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클린턴은 그가 낳기도 전에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어머니는 여러 번 재혼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한 불우한 환경도 그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레이 스미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비전은 사람들을 더 높은 목표로 향하게 하며 또한 그들의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은 감격과 희열이 있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듣고 과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쉐마' 교육을 통하여 어려서부터 선악을 분별하는 말씀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졌기 때문에 말씀이 평생 떠나지 않고 그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시작하는 신명기 6:4-9의 말씀이 '쉐마'입니다.
"들으라"라는 말에서 '쉐마'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자라는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은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미국 인구의 3% 미만인데 전국의 유명한 대학교 교수의 약 30%가 유태인이요, 세계 각국에서 선발되는 노벨상 수상자 중에 약 15%가 유태인이 차지하였습니다. 세계의 경제를 잡고 있는 로스차일드나 모우건 같은 다국적 기업이 유태인의 것입니다.
어떤 글을 읽다보니 "청년 시절엔 하루는 짧고 한 해는 길다. 노년 시절엔 하루는 길고 한 해는 짧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졌고 노인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졌다. 노인은 세월이 빠르다고 말하고 청년은 앞길이 창창하다고 말한다.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시간이나 세월에 대한 명언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시간은 만족과 기쁨을 주는 원천이라"고 합니다. 시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무엇인가 족적과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잘 사용하면 얼마든지 그가 구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쓰던 자기의 할 것이지만,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마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미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시간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였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강물이라고 함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흐르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의 단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을 논할 때는 대개 10 년을 단위로 말합니다. 10대, 20대, …50대... 70대 이런 말로 시간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간에 대한 속도감은 자기 연령의 배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50대가 되었다고 하면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시간의 단위를 1년으로, 어떤 분은 한 달로, 어떤 분은 1주일을 시간의 단위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많은 분들이 시간의 단위를 하루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하루를 소중하고 보람있게 보내자는 것입니다. 이 생각도 좋기는 하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의 시간 단위는 아닙니다. 시간이란 초침의 이동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 초 일초를 긴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감당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한 시간 단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한 시간을 낭비하면 엄청난 차질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하루 중에 한 시간만 더 길게 사용하자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시간이 더 여백이 남아있고,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느끼는지 모르지만, 헤프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은 10년 단위도 아닙니다. 일년 단위도 아니고, 한 달 단위나 일주일이나, 더욱 하루도 아닌 한 시간 단위로 아껴 사용해야 합니다. 하루를 길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 기도회를 참석하면 하루를 한 시간 더 길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잘 부르지 않지만, 우리 학생 때 왜 그렇게 구슬픈 노래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기러기 울어대는 하늘 구만리/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후렴이 정말 인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따뜻한 봄날에 서 있지만 바람이 싸늘 불어 깊은 가을이 오고 산천에 눈이 쌓여서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년의식을 간단히 거행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관례라는 의식처럼 예식화된 성년식이 있는가 하면, 학대를 가하는 민속적인 성년식도 있습니다. 학대를 가하는 성년의식이 더 원초적이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성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태평양에서 폴리네시아에서 채집된 성년식을 보면, 정말 가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벌겋게 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일정시간 동안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들고 있어야 한다든지, 코코넛의 가랑잎을 태워 불덩이 비를 내리는 가운데 벌거벗은 채 일정시간 서 있어야만 한다든지... 또 가시가 돋친 회초리로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피비린내에 굶주린 독개미 집 위에 세워두기도 하였습니다. 북미 인디언의 성년의식은 너무 가혹하여 강단에서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한 학대를 가했습니다. 어떤 부족은 등의 근육을 뚫고 나무에 매어 달기도 했습니다.
성년이 되는 연령에서 이처럼 시련을 가하는 이유는, 부모 슬하에서 나약하게 부모를 의존했던 생활을 벗어나 모든 일에 책임지는 고된 생활로 옮겨가는데 그 고통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련을 겪을 때 비로소 성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인 성에 외아들을 데리고 사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소망이요 기둥 같은 청년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생명의 행렬이었고, 그들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자는 청년이었고,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성의 많은 사람들도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따라나오고 있었습니다.
죽은 청년은 여인의 독자였으니 남편을 잃은 후 가난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소망이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죽은 것입니다. 이제 한 참 일할 나이가 되었고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집안을 일으키고 효성을 다하려던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죽음이란 먼저 남편을 빼앗아가고 이제는 아들까지도 불러가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현실 앞에 모든 사람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무참히 한 여인의 소망을 짓밟아버리고, 인정 사정없이 그의 품에서 아들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에게 먼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절망 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의 위로가 되셨고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손을 쓸 수 없지만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만이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의 행렬에 뛰어 들어오셨고,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말을 나눌 수 있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에 자던 영혼들을 다 불러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흙으로 만드신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던 청년을 살리셔서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죽은 시신을 돌려주기도 하고 부상당한 몸을 돌려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죽었던 아들을 살리셔서 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된 도리도 감당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 다시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기쁨에만 들떠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여러분의 생명을 마쳐야겠습니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겨우 나 자신 먹고 출세하고 놀다가 가는 불행한 지식인들이 되지 말고, 불쌍한 여인들, 불쌍히 마을 사람들, 죽음 앞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수많은 군중을 위하여 생명의 양식을 전하시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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