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런 젊은이들을 키웁시다
본문
기원전 약 600년경,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국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요시아 왕통치 후반기, 예루살렘 어느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한 귀공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가 그들을 안락한 예루살렘의 집에 그냥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쇠퇴하고 신흥 바벨론 제국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급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앗수르 - 애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친애굽 세를 유지하던 유다까지 침공해 왔습니다.
결국 느브갓네살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항복시켜 충성을 받아내고, 승리의 노획물로 성전의 보물과 함께 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볼모로 잡아가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바로 나이 16세 정도에 불과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이 취한 식민지 정책 가운데 하나가 피정복 국가를 바벨론에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식민지 국가의 유망한 인재들을 바벨론식 이름으로 창씨 개명하고, 궁중에서 바벨론 학문으로 교육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탁월한 인물은 발탁해서 바벨론 제국의 관리로 채용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유다의 귀족 출신 중 가장 총명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궁중에 들어가게 하였고, 관례에 따라 3년 동안 교육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교육받는 첫날부터 궁궐에서 심상치 않는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이 다니엘서 1장에 나오는 음식물 섭취에 관한 사건이었습니다.
궁중 교육을 받게 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교육생들을 위해 느브갓네살 왕이 특별히 지정해서 제공하던 궁중 산해진미를 거절했습니다. 남들은 먹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들은 그 맛있는 음식들을 일체 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진미들이 모세 오경인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예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음식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는 부정한 동물의 고기이거나, 피를 빼지 않은 고기이거나, 또는 바벨론 신상에게 바쳐졌던 우상의 제물이 썩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진미를 거절하자, 궁중 교육의 책임자였던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아주 난감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들어 주다가, 혹시라도 그들의 초췌한 모습이 왕에게 보여지면,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열흘 동안만 자신들을 테스트 해 보라고 제의합니다. 열흘 동안이라면 음식으로 인한 얼굴의 상태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요, 만약 초췌할 경우 금방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환관장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말대로, 열흘 동안만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소와 물만 먹도록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열흘 후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훨씬 더 복스럽고 윤기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먹은 채소에 어떤 신비한 영양소가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그들의 채소는 그냥 채소일 뿐이었습니다. 식품영양가 면에서 분석한다면, 분명 고기는 채소보다 칼로리가 월등히 높은 고단백 식품이요, 따라서 한참 먹을 10대 청소년들에게 있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여호와 신앙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으로 모든 인생의 체질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결단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건강과 생명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의탁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선하게 여기사, 다른 이방의 젊은이들 보다 몇 배나 더 건강하고 더 윤기있는 모습으로 가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상식을 초월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이런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그들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자란 결과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됐습니까... 3년 동안의 궁중 교육을 마치고 왕 앞에 서는 날이 왔습니다. 각 나라의 젊은이들이 왕 앞에서 마지막 고시를 보는, 바벨론의 관리로 적합한지... 아닌지를 최종 테스트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환관장의 인도 하에 바벨론의 왕과 박수와 술객들 앞에 그들 모두가 섰습니다. 고대 동방의 민족들은 '지혜'를 특별히 숭상하고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동방 제국의 궁중에는 항상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혜자들이 왕을 자문하고 보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왕과 그들 박수 술객들 앞에 서서 세상 지혜와 학문으로 테스트를 받는데, 바벨론의 기존 박수와 술객들을 10배나 압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도대체 이들이 어느 나라 젊은이들이냐... ' 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천성적인 명철함에도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요, 남보다 몇 배나 열심히 학문을 익혔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소년에게 지식과 학문과 명철을 더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꿈을 해몽하는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지혜와 명철로 무장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세상 지혜자들조차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세상의 지혜를 능히 초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와 명철의 근본이라 했으니,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이야말로 모든 세상 지혜를 능히 초월하는 참 지혜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같은 신앙의 지혜자로써 당대의 세상 지혜를 대표하는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들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젊은이들을 가정과 교회에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는 신앙이야말로 학원을 몇 개나 다니고, 몇 백만 원짜리 전문 과외선생을 붙이는 것보다 더 뛰어나니, 거기에 무한한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후 이 젊은이들에게 일생을 좌우하는 큰 도전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 사건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치적이 한참 번성할 즈음, 신하들이 앞다투어 충성 경쟁을 합니다. "임금님의 성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니,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나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신으로 모시게 하옵소서"… 갖은 교활한 말로 아부를 하니, 교만이 극치에 이른 느브갓네살 왕이 그만 꼴깍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남쪽 25리 정도 떨어진 두라 평지에 금으로 만든 큰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하고 숭배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드디어 신상 제막식 날이 다가왔습니다. 문무백관 많은 백성들이 참여한 가운데, 느브갓네살 왕의 어명이 떨어집니다. "바벨론의 백성들이여, 악기의 풍악 소리가 들리면 모두 엎드려 절할지어다.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도 살려 두지 않고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죽이리라"... 어마어마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 계획된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평소 남보다 몇 갑절이나 왕의 총애를 받자, 이것이 시기가 나서 모함을 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연구를 해 보니,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끔뻑 죽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도 않고, 절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려고 꾸민 정적들의 모략이 신상을 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 음모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상에 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막식'에 조차 아예 참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은 결국 고소자들에 의해 왕에게 보고가 되었고, 왕은 그들을 불러 친국을 하게 됩니다.
"그대들이 나의 금신상 제막식에 나오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그렇다면 이제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줄 터이니, 풍악이 울릴 때 남들과 보조를 맞춰 절을 하면 용서해 줄 것이지만, 아니하면 너희를 극렬하게 타는 저 풀무불 속에 던져서 죽일 것인즉, 너희를 능히 구원할 자가 누구며, 어떤 신이겠느냐... " 하고 회유하며 협박했습니다. (14-15절)
이때 성경에 보면, 다니엘과 3친구의 대답이 너무나도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신앙의 힘이 배어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왕의 질문이 아무리 엄청나다 하더라도, 일고의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비록 왕이 우리를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실지라도 우리 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니, 능히 우 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왕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 이라는 믿음입니다.
셋째는, 설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대로 살려주지 아니하신다 할 지라도, 금신상에는 절대 절할 수 없으니,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 의 율법이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정말 얼마나 엄청난 신앙입니까...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렇게만 키울 수 있다면, 한 사람이 '일당백'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요,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들보들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결국 이들은 포박을 당한 체,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데운 풀무불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때 그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지, 이들을 들어 던졌던 병사들이 타 죽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장난도 아니요, 모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연히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죽은 앞에서도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그들이 얼마나 부럽습니까... "왕이시여, 당신이 그렇게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요, 비록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이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그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7절)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17절)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당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 - 이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76명의 승객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가던 중, 지중해에서 조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황을 기록한 행27장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으로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파선 상태의 절망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 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파선은 당하되 한 사람도 다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 믿습니다" 라고 위로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바울 사도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결국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믿음대로 그들 모두를 살려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건져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어지러워도,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승리가 내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세 친구의 고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충성된 고백입니다. 과연 뉘 아들들이기에,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그들이 그런 놀라운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1)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때문에 바로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짐케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미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시사,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부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계획에 따라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이요, 섭리입니다.
일찍이 세 친구는 이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그렇게 아니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거기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이 있는 줄 알고,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2)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계명을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풀무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지니라"(출20:3-4절)... 그들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그들이 담대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명까지도 완전히 맡겨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록 나를 풀무불 가운데 죽게 하신다 할지라도, 이미 나는 나의 전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때문에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라는 신앙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숙명적인 체념이 아니라, 어떤 손해,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의 발로였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떻게 10대의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담대한 신앙이 자랄 수 있었을까... 깊은 감탄사와 더불어, 우리도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야 겠다는 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일제 36년 치하에서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의 제물로 쓰러져 갔습니다. 당시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는 한국교회를 두 부류로 분열시켰습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에 불과한 것이니 절을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과, 절대불가의 입장으로 대립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뜻을 정한 사람들은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나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라는 신앙이 있었기에, 비록 거적에 싸여 죽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강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예수를 믿는 일 때문에, 이런 물리적인 강압이나 외형적인 핍박을 당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만,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 나 자신과 싸움, 주변과의 갈등 등은 부단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시험이 있다면, 물질이라는 맘몬 - 금신상입니다. 이 금신상 앞에 절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고, 세상 문화라는 금신상 앞에서 좌절하고 번민하는 교회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의 마음은 바울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세상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물질 앞에 무릎 꿇고, 세상 앞에 절하고, 과학을 숭배하고, 명예에 꺾이면서,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과 젊은이들이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다니엘과 세 친구 같은 신앙인이 귀한 것이요,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렇게 키워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키워야 이런 젊은이들을 우리가 양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시흥교회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작케 하신 일이 '교회장학사업'이요, 매년 2월 셋째주일을 '장학주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꿈나무인들 어찌 하루아침에 자랄 수 있겠습니까... 온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과 투자가 있어야만,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 같은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꾼들'을 이 제단에서 배출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개인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기관으로는 남녀전도회, 권사회가 마음과 뜻을 모아 헌신하므로서 불과 6년 만에 1억8천여만원의 '교회장학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년 20명 가까운 중. 고. 대학생, 신대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도 우리 '교회장학기금'이 10억원은 돼야, 교회 안의 학생들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극빈 청소년들에게까지 장학금을 줄 수 있고, 나아가 농어촌 미자립교회, 개척교회 교역자나 성도들의 자녀들까지 격려의 손길을 뻗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까지 금천구 안의 시흥교회로만 머물러 있을 것입니까...
할 일은 많은데 일군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다니엘과 세 친구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신앙의 용사들이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인재들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믿음의 사람을 키워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불평없이 순종할 줄 아는 충성된 일꾼들을 키워내는 우리 시흥제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유다의 요시아 왕통치 후반기, 예루살렘 어느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한 귀공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가 그들을 안락한 예루살렘의 집에 그냥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쇠퇴하고 신흥 바벨론 제국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급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앗수르 - 애굽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친애굽 세를 유지하던 유다까지 침공해 왔습니다.
결국 느브갓네살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항복시켜 충성을 받아내고, 승리의 노획물로 성전의 보물과 함께 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볼모로 잡아가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바로 나이 16세 정도에 불과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이 취한 식민지 정책 가운데 하나가 피정복 국가를 바벨론에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식민지 국가의 유망한 인재들을 바벨론식 이름으로 창씨 개명하고, 궁중에서 바벨론 학문으로 교육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탁월한 인물은 발탁해서 바벨론 제국의 관리로 채용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유다의 귀족 출신 중 가장 총명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궁중에 들어가게 하였고, 관례에 따라 3년 동안 교육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교육받는 첫날부터 궁궐에서 심상치 않는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이 다니엘서 1장에 나오는 음식물 섭취에 관한 사건이었습니다.
궁중 교육을 받게 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교육생들을 위해 느브갓네살 왕이 특별히 지정해서 제공하던 궁중 산해진미를 거절했습니다. 남들은 먹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들은 그 맛있는 음식들을 일체 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진미들이 모세 오경인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예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음식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는 부정한 동물의 고기이거나, 피를 빼지 않은 고기이거나, 또는 바벨론 신상에게 바쳐졌던 우상의 제물이 썩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진미를 거절하자, 궁중 교육의 책임자였던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아주 난감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들어 주다가, 혹시라도 그들의 초췌한 모습이 왕에게 보여지면,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열흘 동안만 자신들을 테스트 해 보라고 제의합니다. 열흘 동안이라면 음식으로 인한 얼굴의 상태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요, 만약 초췌할 경우 금방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환관장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말대로, 열흘 동안만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소와 물만 먹도록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 열흘 후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보다 훨씬 더 복스럽고 윤기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먹은 채소에 어떤 신비한 영양소가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그들의 채소는 그냥 채소일 뿐이었습니다. 식품영양가 면에서 분석한다면, 분명 고기는 채소보다 칼로리가 월등히 높은 고단백 식품이요, 따라서 한참 먹을 10대 청소년들에게 있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여호와 신앙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으로 모든 인생의 체질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결단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건강과 생명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의탁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선하게 여기사, 다른 이방의 젊은이들 보다 몇 배나 더 건강하고 더 윤기있는 모습으로 가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상식을 초월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이런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그들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자란 결과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됐습니까... 3년 동안의 궁중 교육을 마치고 왕 앞에 서는 날이 왔습니다. 각 나라의 젊은이들이 왕 앞에서 마지막 고시를 보는, 바벨론의 관리로 적합한지... 아닌지를 최종 테스트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환관장의 인도 하에 바벨론의 왕과 박수와 술객들 앞에 그들 모두가 섰습니다. 고대 동방의 민족들은 '지혜'를 특별히 숭상하고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동방 제국의 궁중에는 항상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혜자들이 왕을 자문하고 보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왕과 그들 박수 술객들 앞에 서서 세상 지혜와 학문으로 테스트를 받는데, 바벨론의 기존 박수와 술객들을 10배나 압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도대체 이들이 어느 나라 젊은이들이냐... ' 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천성적인 명철함에도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요, 남보다 몇 배나 열심히 학문을 익혔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소년에게 지식과 학문과 명철을 더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다니엘에게는 이상과 꿈을 해몽하는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지혜와 명철로 무장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세상 지혜자들조차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세상의 지혜를 능히 초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와 명철의 근본이라 했으니,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이야말로 모든 세상 지혜를 능히 초월하는 참 지혜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같은 신앙의 지혜자로써 당대의 세상 지혜를 대표하는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들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젊은이들을 가정과 교회에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는 신앙이야말로 학원을 몇 개나 다니고, 몇 백만 원짜리 전문 과외선생을 붙이는 것보다 더 뛰어나니, 거기에 무한한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후 이 젊은이들에게 일생을 좌우하는 큰 도전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 사건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치적이 한참 번성할 즈음, 신하들이 앞다투어 충성 경쟁을 합니다. "임금님의 성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니,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나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신으로 모시게 하옵소서"… 갖은 교활한 말로 아부를 하니, 교만이 극치에 이른 느브갓네살 왕이 그만 꼴깍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남쪽 25리 정도 떨어진 두라 평지에 금으로 만든 큰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하고 숭배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드디어 신상 제막식 날이 다가왔습니다. 문무백관 많은 백성들이 참여한 가운데, 느브갓네살 왕의 어명이 떨어집니다. "바벨론의 백성들이여, 악기의 풍악 소리가 들리면 모두 엎드려 절할지어다.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도 살려 두지 않고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죽이리라"... 어마어마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 계획된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평소 남보다 몇 갑절이나 왕의 총애를 받자, 이것이 시기가 나서 모함을 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연구를 해 보니,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끔뻑 죽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도 않고, 절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려고 꾸민 정적들의 모략이 신상을 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 음모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상에 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막식'에 조차 아예 참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은 결국 고소자들에 의해 왕에게 보고가 되었고, 왕은 그들을 불러 친국을 하게 됩니다.
"그대들이 나의 금신상 제막식에 나오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그렇다면 이제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줄 터이니, 풍악이 울릴 때 남들과 보조를 맞춰 절을 하면 용서해 줄 것이지만, 아니하면 너희를 극렬하게 타는 저 풀무불 속에 던져서 죽일 것인즉, 너희를 능히 구원할 자가 누구며, 어떤 신이겠느냐... " 하고 회유하며 협박했습니다. (14-15절)
이때 성경에 보면, 다니엘과 3친구의 대답이 너무나도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신앙의 힘이 배어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왕의 질문이 아무리 엄청나다 하더라도, 일고의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비록 왕이 우리를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실지라도 우리 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니, 능히 우 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왕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 이라는 믿음입니다.
셋째는, 설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대로 살려주지 아니하신다 할 지라도, 금신상에는 절대 절할 수 없으니,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 의 율법이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정말 얼마나 엄청난 신앙입니까...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렇게만 키울 수 있다면, 한 사람이 '일당백'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요, 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들보들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결국 이들은 포박을 당한 체,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데운 풀무불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때 그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지, 이들을 들어 던졌던 병사들이 타 죽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장난도 아니요, 모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연히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죽은 앞에서도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그들이 얼마나 부럽습니까... "왕이시여, 당신이 그렇게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요, 비록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이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그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7절)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17절)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난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당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 - 이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76명의 승객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가던 중, 지중해에서 조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황을 기록한 행27장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으로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파선 상태의 절망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 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파선은 당하되 한 사람도 다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 믿습니다" 라고 위로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바울 사도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결국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믿음대로 그들 모두를 살려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건져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어지러워도,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승리가 내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세 친구의 고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충성된 고백입니다. 과연 뉘 아들들이기에,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그들이 그런 놀라운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1)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때문에 바로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충성을 다짐케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미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시사,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구원하시고자, 창세 전부터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계획에 따라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이요, 섭리입니다.
일찍이 세 친구는 이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그렇게 아니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거기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이 있는 줄 알고,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2)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계명을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풀무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지니라"(출20:3-4절)... 그들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그들이 담대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명까지도 완전히 맡겨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록 나를 풀무불 가운데 죽게 하신다 할지라도, 이미 나는 나의 전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때문에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라는 신앙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숙명적인 체념이 아니라, 어떤 손해,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의 발로였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떻게 10대의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담대한 신앙이 자랄 수 있었을까... 깊은 감탄사와 더불어, 우리도 이런 젊은이들을 키워야 겠다는 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일제 36년 치하에서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의 제물로 쓰러져 갔습니다. 당시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는 한국교회를 두 부류로 분열시켰습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에 불과한 것이니 절을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과, 절대불가의 입장으로 대립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뜻을 정한 사람들은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었나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라는 신앙이 있었기에, 비록 거적에 싸여 죽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강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예수를 믿는 일 때문에, 이런 물리적인 강압이나 외형적인 핍박을 당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만,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 나 자신과 싸움, 주변과의 갈등 등은 부단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시험이 있다면, 물질이라는 맘몬 - 금신상입니다. 이 금신상 앞에 절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고, 세상 문화라는 금신상 앞에서 좌절하고 번민하는 교회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의 마음은 바울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세상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물질 앞에 무릎 꿇고, 세상 앞에 절하고, 과학을 숭배하고, 명예에 꺾이면서,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과 젊은이들이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다니엘과 세 친구 같은 신앙인이 귀한 것이요,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렇게 키워야 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키워야 이런 젊은이들을 우리가 양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시흥교회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작케 하신 일이 '교회장학사업'이요, 매년 2월 셋째주일을 '장학주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꿈나무인들 어찌 하루아침에 자랄 수 있겠습니까... 온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과 투자가 있어야만,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 같은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꾼들'을 이 제단에서 배출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개인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기관으로는 남녀전도회, 권사회가 마음과 뜻을 모아 헌신하므로서 불과 6년 만에 1억8천여만원의 '교회장학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년 20명 가까운 중. 고. 대학생, 신대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도 우리 '교회장학기금'이 10억원은 돼야, 교회 안의 학생들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극빈 청소년들에게까지 장학금을 줄 수 있고, 나아가 농어촌 미자립교회, 개척교회 교역자나 성도들의 자녀들까지 격려의 손길을 뻗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언제까지 금천구 안의 시흥교회로만 머물러 있을 것입니까...
할 일은 많은데 일군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다니엘과 세 친구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신앙의 용사들이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인재들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믿음의 사람을 키워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불평없이 순종할 줄 아는 충성된 일꾼들을 키워내는 우리 시흥제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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