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신앙이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
본문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은행잎, 오렌지, 개나리꽃, 바나나, 금목걸이, 참외, 병아리, 해바라기 등에서 연상되는 색이 무슨 색입니까
당연히 노란색입니다.
은행잎도 노란색이고 오렌지도 노란색이고 개나리꽃도 노란색이고 전부 노란색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전부 다 똑같은 색입니까
말로는 노란색이라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색은 아닙니다.
노란색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의 수많은 노란색들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물감으로 노란색을 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노란색 물감인데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집니다.
노랗다 못하여 붉은색이 감돌만큼 짙은 노란색도 있고 하얀색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는다는 말 속에는 상당히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이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백점, 안 믿으면 빵점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믿음이 어느 만큼 자라느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고3 수험생에게 있어서 대학에 합격하느냐,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학에 합격한 학생과 떨어진 학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학생이나 그런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나 그 부모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생들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대학생들만 모인 자리에서는 대학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는 합격했는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공부 잘하는지가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교회 밖에서는 얘깃거리가 됩니다만 교회 안에서는 전혀 얘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믿기는 믿되 어느 만큼 믿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본문을 빌려 말씀드리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는데, 어느 만큼 자라고 있는지 따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우리 교회가 지금이 좋은 교회 같습니까, 3년 후가 좋은 교회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지금이 좋은 교회입니까 5년 후나 10년 후가 더 좋은 교회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이 쥐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보다 3년 후에 더 좋은 교인이 되면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 3년 후가 더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계속 정상적으로 자라기만 하면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 5년 후, 10년 후가 훨씬 더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5년이나 10년 후보다 지금이 더 좋은 교회입니다.
본래 좋은 교회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교인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좋은 교인이 없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좋은 교회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기꺼이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여행한 거리는 무려 1,500km입니다.
우리 나라를 가리켜서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가 삼천리라는 얘기입니다.
삼천리면 1,200km입니다.
우리 나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가 1,200km인데, 아브라함이 여행한 거리는 무려 1,500km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1,500km를 간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하물며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0년 전에 1,500km를 여행했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까지 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 아브라함이 겪은 일을 기록하면 책으로 몇 권 분량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당시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생했고 또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5)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서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간단하게 한 줄로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저한테 신경 좀 써주십시오. 제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좀 알아주십시오.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오면서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고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가나안에 온 다음에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 교회에 처음 나올 적의 결심이 어느 만큼 남달랐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됩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점점 더 자라야 합니다.
처음 믿기 시작할 때보다는 1년 믿었을 때가 더 신앙이 좋아야 하고, 1년 믿었을 때보다는 3년 믿었을 때가 더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고 있는 우리는 본성상 죄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전부 다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 우리가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잘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말씀이 없어도 우리가 다 알아서 원수를 사랑하면 성경에 그런 말씀이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원수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면서 지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집에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런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뻔합니다.
모든 애들이 공부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자발적으로 지금보다 더 신앙이 좋아지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런 말씀이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본성상 여호와 하나님과 반대이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신앙에 있어서는 늘 게으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숙제만 하고서는 공부 다 했다고 하는 것이나, 세수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얼굴에 물만 묻히고는 세수했다고 우기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습니다.
신앙 생활 한다면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 참석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잘하라고 하면 ‘알았어요, 앞으로는 교회 잘 나올게요. ’가 고작입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늘 최소한의 책임을 감당하기에 급급합니다.
좋은 대학에 욕심 내는 것만큼 좋은 신앙에 욕심을 내지도 않고 돈을 벌려고 열심 내는 것만큼 예수를 더 잘 믿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것이 어느 만큼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앉아 있으면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 한 줄 압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만 장차 엄청난 일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땅을 치면서 후회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내용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연하게 교회에 안 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보다 더 신앙이 좋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최소한의 신앙 책임만 하면서 마냥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산 낙지를 드셔보셨습니까
저는 토막토막 잘려서 다리만 꿈틀대는 산 낙지를 먹을 때마다 짓궂은 생각이 듭니다.
“얘네들이 자기가 죽은 것을 알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자기 몸이 다 잘려서 한 점 한 점 사람들이 집어먹고 있는데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다리를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그게 참 궁금합니다.
산 낙지를 먹을 때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선회를 먹을 때도 그렇습니다.
식당에 따라서 생선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접시에 담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선을 어떻게 회를 쳤는지 살점은 전부 다 회쳐져 있는데 생선은 아가미를 뻐끔거리기도 하고 눈을 껌뻑거리기도 합니다.
어떤 생선은 꼬리를 퍼덕거리기도 합니다.
저는 그때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 “얘가 지금 자기가 죽은 줄 알까”
사람들이 자기 살점을 한 점씩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고 있는데도 접시에 누워서 눈을 껌뻑거리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불신자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의 영혼이 야금야금 먹히는 줄도 모르고 숨이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나 이미 다 회쳐진 자기 몸을 사람들이 한 점씩 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눈을 껌뻑거리는 생선이나 결국 같은 신세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그렇다 치고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예수를 외면한 채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불신자의 모습이나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그 예수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최소한의 신앙 책임으로 때우는 신자들의 모습이나 결국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이 자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상당한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집에서 엄마와 아이의 뜻이 서로 다르면 누가 불이익을 당합니까
엄마와 아이의 뜻이 다르면 아이가 엄마에게 야단맞지, 아이가 엄마를 야단치는 법은 없습니다.
철이 덜든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억울할지 몰라도 조금만 철이 들면 알게 됩니다.
자기와 엄마가 서로 뜻이 다를 때는 엄마 생각이 옳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한 몸 편한 것에 관심이 있고 부모는 자녀가 잘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접어놓고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자기에게도 유익입니다.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부모의 관심은 자녀가 잘되는 것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우리가 잘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고 또 구원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는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어느 만큼 좋아져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만큼 좋아져야 합니다.
우리 신앙이 예수님만큼 좋아져야 한다고 하면 아마 황당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이런 내용은 성경의 기록을 들출 필요 없이 이치적으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비둘기나 양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슈퍼에 가서 1,000원을 내면 1,000원어치 물건을 사야 본전인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만큼 되어야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본전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한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도록 계속 자신을 분발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책임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구원 얻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너희는 이다음에 천국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는 말씀만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다음 과정, 구원 이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좋겠습니까, 천국이 좋겠습니까
말하나마나 여기보다는 천국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왜 빨리 천국에 안가고 여기에 삽니까
우리야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빨리 천국에 안 데려가시고 고생스런 이 땅에 살게 내버려두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뭐든지 하시는 분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면 뭐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살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 얻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부르는 날까지 이 땅에서 힘써 자기의 신앙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일입니다.
저는 남보다 잘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굳이 꼽으라면 당구는 남보다 잘 칩니다.
남들보다 당구를 잘 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남들 잘 때 잠 안 자고,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 하면 됩니다.
남들이 하는 것 다 따라하고 무슨 수로 당구를 잘 칩니까
저는 대학 다니는 동안 수업은 빼먹어도 당구장은 빼먹지 않았습니다.
등교 길에 당구장에 들렀다가 아예 학교를 안 가고 하루 종일 당구만 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시험 때는 별 수 없이 벼락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모든 과목을 당일치기로 끝냈습니다.
시험 전 날 밤새서 공부하고 시험 보고 나면 집에 와서 잠깐 눈 붙이고 또 꼬박 밤새서 공부하고…… 시험기간 내내 밤을 샜습니다.
평소에 워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수 없었습니다.
저도 시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대학은 보통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기 때문에 금요일에 시험이 끝납니다.
그런데 저는 마지막 시험을 앞둔 목요일에는 밤을 새지 않았습니다.
금요일에 시험이 끝나면 당구장에 가야 하는데 밤을 새면 제 컨디션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적을 덜 받는 한이 있어도 베스트 컨디션으로 당구를 치는 그 큰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제 생각이었습니다.
고수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집념과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잘해봐야 아무런 쓸데없는 당구도 그럴진대 하물며 진리와 생명에 직접 연결되는 신앙에 있어서의 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청년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고수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 지금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과연 어떤 점이 문제인지 심각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 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지 않았는데도 그냥 그렇다 치고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하든지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신앙 고수가 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자랍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예수를 믿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그것이 예수님께는 ‘본전’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또한 우리 교회가 같이 자라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은행잎, 오렌지, 개나리꽃, 바나나, 금목걸이, 참외, 병아리, 해바라기 등에서 연상되는 색이 무슨 색입니까
당연히 노란색입니다.
은행잎도 노란색이고 오렌지도 노란색이고 개나리꽃도 노란색이고 전부 노란색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전부 다 똑같은 색입니까
말로는 노란색이라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색은 아닙니다.
노란색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의 수많은 노란색들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물감으로 노란색을 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노란색 물감인데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집니다.
노랗다 못하여 붉은색이 감돌만큼 짙은 노란색도 있고 하얀색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는다는 말 속에는 상당히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이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백점, 안 믿으면 빵점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믿음이 어느 만큼 자라느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고3 수험생에게 있어서 대학에 합격하느냐,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학에 합격한 학생과 떨어진 학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학생이나 그런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나 그 부모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생들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대학생들만 모인 자리에서는 대학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는 합격했는지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공부 잘하는지가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교회 밖에서는 얘깃거리가 됩니다만 교회 안에서는 전혀 얘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믿기는 믿되 어느 만큼 믿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본문을 빌려 말씀드리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는데, 어느 만큼 자라고 있는지 따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우리 교회가 지금이 좋은 교회 같습니까, 3년 후가 좋은 교회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지금이 좋은 교회입니까 5년 후나 10년 후가 더 좋은 교회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이 쥐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보다 3년 후에 더 좋은 교인이 되면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 3년 후가 더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계속 정상적으로 자라기만 하면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 5년 후, 10년 후가 훨씬 더 좋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5년이나 10년 후보다 지금이 더 좋은 교회입니다.
본래 좋은 교회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교인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좋은 교인이 없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닌지, 좋은 교회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기꺼이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여행한 거리는 무려 1,500km입니다.
우리 나라를 가리켜서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가 삼천리라는 얘기입니다.
삼천리면 1,200km입니다.
우리 나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가 1,200km인데, 아브라함이 여행한 거리는 무려 1,500km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1,500km를 간다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하물며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0년 전에 1,500km를 여행했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까지 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 아브라함이 겪은 일을 기록하면 책으로 몇 권 분량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당시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생했고 또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5)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서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간단하게 한 줄로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저한테 신경 좀 써주십시오. 제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좀 알아주십시오.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오면서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고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가나안에 온 다음에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 교회에 처음 나올 적의 결심이 어느 만큼 남달랐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됩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점점 더 자라야 합니다.
처음 믿기 시작할 때보다는 1년 믿었을 때가 더 신앙이 좋아야 하고, 1년 믿었을 때보다는 3년 믿었을 때가 더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고 있는 우리는 본성상 죄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전부 다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 우리가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잘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말씀이 없어도 우리가 다 알아서 원수를 사랑하면 성경에 그런 말씀이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원수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면서 지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집에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런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뻔합니다.
모든 애들이 공부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자발적으로 지금보다 더 신앙이 좋아지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런 말씀이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본성상 여호와 하나님과 반대이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신앙에 있어서는 늘 게으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숙제만 하고서는 공부 다 했다고 하는 것이나, 세수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얼굴에 물만 묻히고는 세수했다고 우기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습니다.
신앙 생활 한다면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 참석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잘하라고 하면 ‘알았어요, 앞으로는 교회 잘 나올게요. ’가 고작입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좋은 신앙’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늘 최소한의 책임을 감당하기에 급급합니다.
좋은 대학에 욕심 내는 것만큼 좋은 신앙에 욕심을 내지도 않고 돈을 벌려고 열심 내는 것만큼 예수를 더 잘 믿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것이 어느 만큼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앉아 있으면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 한 줄 압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만 장차 엄청난 일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다음에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땅을 치면서 후회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내용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연하게 교회에 안 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지금보다 더 신앙이 좋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최소한의 신앙 책임만 하면서 마냥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산 낙지를 드셔보셨습니까
저는 토막토막 잘려서 다리만 꿈틀대는 산 낙지를 먹을 때마다 짓궂은 생각이 듭니다.
“얘네들이 자기가 죽은 것을 알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자기 몸이 다 잘려서 한 점 한 점 사람들이 집어먹고 있는데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다리를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그게 참 궁금합니다.
산 낙지를 먹을 때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선회를 먹을 때도 그렇습니다.
식당에 따라서 생선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접시에 담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선을 어떻게 회를 쳤는지 살점은 전부 다 회쳐져 있는데 생선은 아가미를 뻐끔거리기도 하고 눈을 껌뻑거리기도 합니다.
어떤 생선은 꼬리를 퍼덕거리기도 합니다.
저는 그때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 “얘가 지금 자기가 죽은 줄 알까”
사람들이 자기 살점을 한 점씩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고 있는데도 접시에 누워서 눈을 껌뻑거리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불신자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의 영혼이 야금야금 먹히는 줄도 모르고 숨이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나 이미 다 회쳐진 자기 몸을 사람들이 한 점씩 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눈을 껌뻑거리는 생선이나 결국 같은 신세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그렇다 치고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예수를 외면한 채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불신자의 모습이나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그 예수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최소한의 신앙 책임으로 때우는 신자들의 모습이나 결국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이 자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상당한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집에서 엄마와 아이의 뜻이 서로 다르면 누가 불이익을 당합니까
엄마와 아이의 뜻이 다르면 아이가 엄마에게 야단맞지, 아이가 엄마를 야단치는 법은 없습니다.
철이 덜든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억울할지 몰라도 조금만 철이 들면 알게 됩니다.
자기와 엄마가 서로 뜻이 다를 때는 엄마 생각이 옳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한 몸 편한 것에 관심이 있고 부모는 자녀가 잘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접어놓고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자기에게도 유익입니다.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부모의 관심은 자녀가 잘되는 것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우리가 잘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고 또 구원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는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어느 만큼 좋아져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만큼 좋아져야 합니다.
우리 신앙이 예수님만큼 좋아져야 한다고 하면 아마 황당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이런 내용은 성경의 기록을 들출 필요 없이 이치적으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비둘기나 양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슈퍼에 가서 1,000원을 내면 1,000원어치 물건을 사야 본전인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만큼 되어야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본전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한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도록 계속 자신을 분발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책임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구원 얻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너희는 이다음에 천국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는 말씀만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다음 과정, 구원 이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좋겠습니까, 천국이 좋겠습니까
말하나마나 여기보다는 천국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왜 빨리 천국에 안가고 여기에 삽니까
우리야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빨리 천국에 안 데려가시고 고생스런 이 땅에 살게 내버려두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뭐든지 하시는 분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면 뭐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살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 얻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부르는 날까지 이 땅에서 힘써 자기의 신앙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일입니다.
저는 남보다 잘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굳이 꼽으라면 당구는 남보다 잘 칩니다.
남들보다 당구를 잘 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남들 잘 때 잠 안 자고, 남들 공부할 때 공부 안 하면 됩니다.
남들이 하는 것 다 따라하고 무슨 수로 당구를 잘 칩니까
저는 대학 다니는 동안 수업은 빼먹어도 당구장은 빼먹지 않았습니다.
등교 길에 당구장에 들렀다가 아예 학교를 안 가고 하루 종일 당구만 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시험 때는 별 수 없이 벼락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모든 과목을 당일치기로 끝냈습니다.
시험 전 날 밤새서 공부하고 시험 보고 나면 집에 와서 잠깐 눈 붙이고 또 꼬박 밤새서 공부하고…… 시험기간 내내 밤을 샜습니다.
평소에 워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수 없었습니다.
저도 시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대학은 보통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기 때문에 금요일에 시험이 끝납니다.
그런데 저는 마지막 시험을 앞둔 목요일에는 밤을 새지 않았습니다.
금요일에 시험이 끝나면 당구장에 가야 하는데 밤을 새면 제 컨디션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성적을 덜 받는 한이 있어도 베스트 컨디션으로 당구를 치는 그 큰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제 생각이었습니다.
고수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집념과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잘해봐야 아무런 쓸데없는 당구도 그럴진대 하물며 진리와 생명에 직접 연결되는 신앙에 있어서의 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청년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고수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 지금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과연 어떤 점이 문제인지 심각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 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지 않았는데도 그냥 그렇다 치고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하든지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신앙 고수가 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자랍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예수를 믿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그것이 예수님께는 ‘본전’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또한 우리 교회가 같이 자라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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