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들이여! 일어나 찬송하라
본문
마더 테레사는 맨주먹으로 남자 수도원 15개와 여자 수도원 17개를 일군 여인입니다. 그녀는 일평생을 여호와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녀는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고대하던 시간이 마침내 왔습니다. 나의 신랑이여! 이제 우리가 만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
주변에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레사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고 그 화상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일평생 동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죽음이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마더 테레사처럼 구속받은 사람들인데 왜 그런 삶에 뛰어들지 못할까하는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은 시입니다. 시편 107편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2절) 하신 대로 구속함을 받은 자의 간증이요 찬양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 합니다.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자의 찬양입니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2-3). 이 말씀은 구속함을 받은 자의 간증입니다.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107편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구속함을 받은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건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일제 식민통치 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주먹을 불끈 쥐시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십니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할아버지뻘이나 되는 어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는 말을 하면서, 그 흥분이 절정에 달할 때도 있습니다. 온갖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십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으신 노인들이시지만 일본인들이 놋그릇에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뺐어갔다는 말에는 "이런 죽일 ×들" 이라며 인상까지 쓰기도 합니다. 옆에서 그 분들의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진짜 나쁜 ×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한·일전만 하면 그 종목이 뭐가 됐던 간에 "그 ×들한테는 무조건 이겨야 돼요"라고 말씀하시며 열을 올리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몹시 기뻐하시는 할머니는 "그것 때문에 해방이 될 수 있었다"는 것에 감격할 정도입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 시대의 고통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또한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을 유리하는 백성으로 절망의 땅 끝까지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표현하기를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4,5절)라고 했습니다. 그 고통이 전혀 끝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삶의 고통이 그러할 때도 있습니다. 전혀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의 끝을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고통의 끝을 삶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6절)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건져내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이것이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합니다. 주만 바라보는 신앙은 모든 고통을 이겨내는 우리 인생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시카고는 도시 계획이 가장 잘 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황소 한 마리가 전신주를 받아 그것이 쓰러지면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이 시카고 전체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시카고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기자들이 불타고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실 때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 꺼주시지 않고 계시지요 그리고 목사님은 왜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기자들이 빈정거리며 묻자 무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저 불타고 있는 예배당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 달라고 기도해 왔소. 바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저 예배당이 불타고 있는 것이라오. 큰 예배당을 지으려면 저 건물 철거 비용이 엄청나게 들텐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두 불태워주시니 그 비용이 들지 않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소"
"그럼 큰 예배당을 지을 돈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나는 수표와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금고, 이 성경을 가지고 나왔소. 그러므로 당신은 얼마 안 있어서 불탄 예배당보다 더 크고 웅 장한 예배당이 지어진 것을 볼 것이오. "
정말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는 놀라운 교회가 세워졌고, 지금의 무디 교회와 무디 신학교는 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을 배출하며 세계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더 큰 소망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성취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 길을 걸어 온지 40년만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아니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때부터 약 600년만에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해야 더 옳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말씀 하나를 붙잡고 60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120년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며 큰비를 기다려 왔고, 출애굽 시나리오를 위해 모세는 40년간의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3년 동안 훈련받았던 사도 바울 역시 오랜 훈련의 기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 훈련을 잘 마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자기 목숨을 구제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창 20: 1). 의인 노아는 술에 취해 아들에게 하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창9: 20-23).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사람입니다(출 2: 12). 더군다나 바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가둔 사람이었습니다. (행 8: 3)
저는 오늘 믿음의 선조들도 별 볼일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인도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가는 그 길이 안전한 길입니까 오늘 이것을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자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경배와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구경만 하는 사람이며,
세 번째는 어떤 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며, 복음을 위하여 물질 드리기에 힘쓰고, 자신의 삶을 바쳐 헌신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인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절)라고 노래합니다. 무엇에 주린 영혼입니까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 6). 물질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아닙니다. 명예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도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행복의 기준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하는 것보다 "얼마나 만족하느냐, 얼마나 자족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잘 살기 보다는 바로 살 때가 되었습니다. 돈이 우선이 아니라 행복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따뜻한 찰밥을 먹어도 찰밥은 목이 메인다며 불평불만이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숭늉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워도 이것도 못 먹는 사람이 더 많으니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소중한 것을 끝까지 간직할 수 있는 사람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십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만족을 주시며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함은 받은 우리 청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 여호와 하나님께 꼭 해야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절)는 말씀처럼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녀는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고대하던 시간이 마침내 왔습니다. 나의 신랑이여! 이제 우리가 만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
주변에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레사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고 그 화상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일평생 동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죽음이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마더 테레사처럼 구속받은 사람들인데 왜 그런 삶에 뛰어들지 못할까하는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은 시입니다. 시편 107편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2절) 하신 대로 구속함을 받은 자의 간증이요 찬양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 합니다.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자의 찬양입니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2-3). 이 말씀은 구속함을 받은 자의 간증입니다.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107편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구속함을 받은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건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일제 식민통치 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주먹을 불끈 쥐시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십니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할아버지뻘이나 되는 어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는 말을 하면서, 그 흥분이 절정에 달할 때도 있습니다. 온갖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십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으신 노인들이시지만 일본인들이 놋그릇에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뺐어갔다는 말에는 "이런 죽일 ×들" 이라며 인상까지 쓰기도 합니다. 옆에서 그 분들의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진짜 나쁜 ×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한·일전만 하면 그 종목이 뭐가 됐던 간에 "그 ×들한테는 무조건 이겨야 돼요"라고 말씀하시며 열을 올리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몹시 기뻐하시는 할머니는 "그것 때문에 해방이 될 수 있었다"는 것에 감격할 정도입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 시대의 고통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또한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을 유리하는 백성으로 절망의 땅 끝까지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표현하기를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4,5절)라고 했습니다. 그 고통이 전혀 끝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삶의 고통이 그러할 때도 있습니다. 전혀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통의 끝을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고통의 끝을 삶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6절)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건져내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이것이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합니다. 주만 바라보는 신앙은 모든 고통을 이겨내는 우리 인생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합니다.
시카고는 도시 계획이 가장 잘 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황소 한 마리가 전신주를 받아 그것이 쓰러지면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이 시카고 전체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시카고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기자들이 불타고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실 때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 꺼주시지 않고 계시지요 그리고 목사님은 왜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기자들이 빈정거리며 묻자 무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저 불타고 있는 예배당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 달라고 기도해 왔소. 바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저 예배당이 불타고 있는 것이라오. 큰 예배당을 지으려면 저 건물 철거 비용이 엄청나게 들텐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두 불태워주시니 그 비용이 들지 않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소"
"그럼 큰 예배당을 지을 돈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나는 수표와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금고, 이 성경을 가지고 나왔소. 그러므로 당신은 얼마 안 있어서 불탄 예배당보다 더 크고 웅 장한 예배당이 지어진 것을 볼 것이오. "
정말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는 놀라운 교회가 세워졌고, 지금의 무디 교회와 무디 신학교는 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을 배출하며 세계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더 큰 소망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성취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 길을 걸어 온지 40년만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아니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때부터 약 600년만에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해야 더 옳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말씀 하나를 붙잡고 60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120년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며 큰비를 기다려 왔고, 출애굽 시나리오를 위해 모세는 40년간의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3년 동안 훈련받았던 사도 바울 역시 오랜 훈련의 기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 훈련을 잘 마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자기 목숨을 구제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창 20: 1). 의인 노아는 술에 취해 아들에게 하체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창9: 20-23).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죽였던 사람입니다(출 2: 12). 더군다나 바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가둔 사람이었습니다. (행 8: 3)
저는 오늘 믿음의 선조들도 별 볼일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인도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가는 그 길이 안전한 길입니까 오늘 이것을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자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경배와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구경만 하는 사람이며,
세 번째는 어떤 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며, 복음을 위하여 물질 드리기에 힘쓰고, 자신의 삶을 바쳐 헌신의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인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절)라고 노래합니다. 무엇에 주린 영혼입니까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 6). 물질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아닙니다. 명예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도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행복의 기준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하는 것보다 "얼마나 만족하느냐, 얼마나 자족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잘 살기 보다는 바로 살 때가 되었습니다. 돈이 우선이 아니라 행복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따뜻한 찰밥을 먹어도 찰밥은 목이 메인다며 불평불만이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숭늉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워도 이것도 못 먹는 사람이 더 많으니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소중한 것을 끝까지 간직할 수 있는 사람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십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만족을 주시며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함은 받은 우리 청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 여호와 하나님께 꼭 해야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절)는 말씀처럼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