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서라
본문
올해 청년부 주제는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서라"입니다.
청년부가 토요일에 집회를 갖다가 주일예배로 드린지 꼭 1년이 되었습니다.
1년전 98년 1월 4일 첫 예배를 드릴 때 38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대충 헤아려봐도 7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1년만에 꼭 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중에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박목사님께 지금 이렇게 부흥하면 올해안에 100명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과 목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소식지에 쓴대로 그것은 내 소망이자 확신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2시 청년부 예배를 드리며 청년들이 마음속에 청년부 예배가 주일 낮예배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아내었습니다.
청년은 1부, 2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청년부 예배를 드려도 그것이 주일 낮예배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염려하는 것은 청년부 예배 한번 드리고, 나는 주일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되는 것이 염려스럽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수주일의 완전한 개념은 주일 낮예배 한번드리는 것만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날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나서 오락을 한다거나 술마시거나 쾌락을 찾아서 바쁘게 보냈다면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함께 삶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예배를 오전과 저녁에 두 번 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주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하게 예배드렸다는 것의 외적 싸인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게 아침과 저녁에 예배를 드렸어도 중간에 쾌락을 따라 살았다면 온전한 주일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전과 저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루를 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예배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청년 예배는 오후에 드리는데 어떻게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충족시켜주겠느냐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교회 구조의 다양성과 환경의 변화로 사실은 그게 조금씩 바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를 기억하고 하루에 두 번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어떤 사람은 그런 형식이 무슨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데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처럼 2시에 드리는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그 의미가 조금은 퇴색될 수 있지만, 그래도 주일을 온전히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교사나 1,2부 성가대 봉사를 하고 2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를 오후예배로 혹은 저녁예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오직 2시 예배만 드리고 마는 사람은 되도록 저녁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새벽예배만 드리고 놀러갑니다.
물론 그날 바빠서 그럴 수 밖에 없어서 새벽예배만이라도 드렸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생각이 굳어져서 주일날 아무예배나 한번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있어서 낮예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주일 낮예배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를 위해서 산다는 고백을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예배에 대한 위상이 선민교회 내에서 제대로 자리매김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 청년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부흥할 수 있는 기초가 놓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청년부가 주일 낮예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고 여러분야에서 마음껏 봉사할 수 있도록 99년도를 시작하게 되어서 기쁨니다.
이제 우리 청년부가 99년에 들어와서 해결해야 될 문제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내부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내적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이제는 성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야 되겠고, 청년부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숙해야 되겠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숙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청년부 내에서의 어떤 갈등이나 교회 문제로 시험당하거나, 그래서 그 일들때문에 주의 일을 힘있게 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벗어나서 강한 믿음과 온전한 신앙으로 바로 세워지는 청년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또 당부할 일들이 많이 있을 텐데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질 것을 당부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당부한 것 중에는,
첫째가 믿음안에 있는가 입니다.
믿음안에 있는가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사탄의 종으로 태어납니다.
생각과 감정과 성품까지 전부 사탄에게 세뇌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문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양분되어 있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물론 아이에게서 순수함과 깨끗함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본래 선하기 때문에 순수함과 깨끗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악하지만 그 악을 행할 힘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순수하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정하기 싫고 모순 같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학을 연구한 어느 교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양파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양파의 껍질을 처음부터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고, 아무리 벗겨봐야 양파 껍질만 나오지, 알맹이나 핵심이없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인간을 연구하고 그 속을 들여다 보아도 양파처럼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에게 많은 것을 덧칠하고 옷입혀 놓아도 결국 남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고 귀하다고 해도 인간속에서는 그 어떠한 구원의 조건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양파와 같은 인간에게 선과 의로움과 구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양파가 노력한다고 그 속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본성을 변화시켜줄 외적인 힘이 작용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변화시켜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타락된 인간이기에 여기에 영적인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롭게 태어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안에 있는가 시험해 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성적인 내용이 바뀌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본질이 바뀐 우리의 모습은 또 다시 사탄적 본성으로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러한 우리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세상의 유혹적인 것을 보면, 어느새 옛 성품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악한 본성이 드러나고, 죄의 성향들이 나도 모르나 드러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거듭났음에도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매사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우리 안에 계십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다가 한두달 교회 안나와도 내 안에 계셨던 주님은 늘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역사하셔서 나를 감동시키고 주님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은 인간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변덕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시편62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내가 주안에 거하는 것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주님은 내 안에 영원히 거하시나 나는 주님안에 영원히 거하질 못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따라 움직였지 주님보고 살지를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각종 고시에 붙으면 여호와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 같다가도, 떨어지거나 직장을 얻지 못하면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시는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나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란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린 적도 없고 우리를 떠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떠나고 주님안에 거하기를 거부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5절 처음부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와 구별된 전혀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 두는 것처럼 새 사람은 새로운 질서와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은 1999년도 첫주일입니다.
사람은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그 해에 새로운 것으로 새롭게 채워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못만난 친구를 몇 년후에 만나면 딴 사람같아 보입니다.
1999년도 틀림없이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지식으로 감성으로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에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되고 성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채우시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했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그리스도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채워진 여러분의 가슴과 열정속에 세상을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안에,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행하는 일들과 소망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1999년도 한해는 정말 육신을 좇다가 실패하고 가슴아파하는 한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바른 삶을 사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생각과 지식과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선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신정에 전직 대통령집에 고아원 아이들이 찾아갔을 때 금일봉을 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회단체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간다고 하고, TV가 이 일을 보도할 테니까,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선과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허락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속에 있는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고 나의 선행이 기록되기 위한 목적이 전제된 선행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선행만이 진정한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1999년 한해는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반석같은 믿음으로 세워지는 청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999년은 세 번째 시작하는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은 세 번째 천년기간안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실제로 활동해야할 시기는 2천년대입니다.
우리가 살아갈뿐 아니라 나의 아들과 딸들이 살아갈 2천년대에 주님이 오실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정말 1999년 한해를 잘 보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강한 것을 기뻐하고 온전하게 되기를간절히 원했습니다.
우리의 약할 때, 사도가 사도적 권징과 권능을 사용하지 않을때를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하여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기독교인이면서 세속에 물들어서 타락한 모습으로 교회다니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역자들이 다 원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말씀을 통하여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받고 치유되어서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모임들을 통하여 더욱 그리스도안에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도 "이를 위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바라보는 제자들과 수 많은 교인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로 세워지기를 구한 것은,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됐다면 징계를 하고 사도의 권세로 엄하게 다스릴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 떨어져 있어서 내가 약할 때 너희의 강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다시 만났을 때 징계와 채찍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칭찬과 바르게 세워주는 것으로 만나기를 원하기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멀리 떨어져 사도적 권세가 약할 때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위해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1999년도에는 우리 청년부가 그리스도안에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말입니다.
속칭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잘나가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간구한 것처럼, 저도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1월 첫주일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일부터는 분명히 어떻게 어떻게 살겠다는 각오아래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 내가 그리스에서 벗어나서 세상가운데 있지 안나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1999년 한해 내내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질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부가 2천년을 맞이하는 내년이맘때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강한 청년부가 될 줄로 믿습니다.
청년부가 토요일에 집회를 갖다가 주일예배로 드린지 꼭 1년이 되었습니다.
1년전 98년 1월 4일 첫 예배를 드릴 때 38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대충 헤아려봐도 7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1년만에 꼭 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중에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박목사님께 지금 이렇게 부흥하면 올해안에 100명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과 목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소식지에 쓴대로 그것은 내 소망이자 확신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2시 청년부 예배를 드리며 청년들이 마음속에 청년부 예배가 주일 낮예배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아내었습니다.
청년은 1부, 2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청년부 예배를 드려도 그것이 주일 낮예배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염려하는 것은 청년부 예배 한번 드리고, 나는 주일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되는 것이 염려스럽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수주일의 완전한 개념은 주일 낮예배 한번드리는 것만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일은 내 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날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나서 오락을 한다거나 술마시거나 쾌락을 찾아서 바쁘게 보냈다면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함께 삶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예배를 오전과 저녁에 두 번 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주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하게 예배드렸다는 것의 외적 싸인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게 아침과 저녁에 예배를 드렸어도 중간에 쾌락을 따라 살았다면 온전한 주일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전과 저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루를 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는 개념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예배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청년 예배는 오후에 드리는데 어떻게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충족시켜주겠느냐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교회 구조의 다양성과 환경의 변화로 사실은 그게 조금씩 바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를 기억하고 하루에 두 번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어떤 사람은 그런 형식이 무슨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데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처럼 2시에 드리는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그 의미가 조금은 퇴색될 수 있지만, 그래도 주일을 온전히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교사나 1,2부 성가대 봉사를 하고 2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를 오후예배로 혹은 저녁예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오직 2시 예배만 드리고 마는 사람은 되도록 저녁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새벽예배만 드리고 놀러갑니다.
물론 그날 바빠서 그럴 수 밖에 없어서 새벽예배만이라도 드렸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생각이 굳어져서 주일날 아무예배나 한번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있어서 낮예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주일 낮예배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주를 위해서 산다는 고백을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예배에 대한 위상이 선민교회 내에서 제대로 자리매김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 청년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부흥할 수 있는 기초가 놓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청년부가 주일 낮예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고 여러분야에서 마음껏 봉사할 수 있도록 99년도를 시작하게 되어서 기쁨니다.
이제 우리 청년부가 99년에 들어와서 해결해야 될 문제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내부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내적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이제는 성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야 되겠고, 청년부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숙해야 되겠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숙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청년부 내에서의 어떤 갈등이나 교회 문제로 시험당하거나, 그래서 그 일들때문에 주의 일을 힘있게 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벗어나서 강한 믿음과 온전한 신앙으로 바로 세워지는 청년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또 당부할 일들이 많이 있을 텐데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질 것을 당부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당부한 것 중에는,
첫째가 믿음안에 있는가 입니다.
믿음안에 있는가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사탄의 종으로 태어납니다.
생각과 감정과 성품까지 전부 사탄에게 세뇌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문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선설과 성악설로 양분되어 있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물론 아이에게서 순수함과 깨끗함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본래 선하기 때문에 순수함과 깨끗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악하지만 그 악을 행할 힘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순수하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정하기 싫고 모순 같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학을 연구한 어느 교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양파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양파의 껍질을 처음부터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고, 아무리 벗겨봐야 양파 껍질만 나오지, 알맹이나 핵심이없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인간을 연구하고 그 속을 들여다 보아도 양파처럼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에게 많은 것을 덧칠하고 옷입혀 놓아도 결국 남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고 귀하다고 해도 인간속에서는 그 어떠한 구원의 조건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양파와 같은 인간에게 선과 의로움과 구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양파가 노력한다고 그 속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본성을 변화시켜줄 외적인 힘이 작용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변화시켜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타락된 인간이기에 여기에 영적인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롭게 태어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안에 있는가 시험해 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성적인 내용이 바뀌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본질이 바뀐 우리의 모습은 또 다시 사탄적 본성으로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러한 우리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세상의 유혹적인 것을 보면, 어느새 옛 성품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악한 본성이 드러나고, 죄의 성향들이 나도 모르나 드러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거듭났음에도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매사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우리 안에 계십니다. 교회 열심히 나오다가 한두달 교회 안나와도 내 안에 계셨던 주님은 늘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역사하셔서 나를 감동시키고 주님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은 인간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변덕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시편62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내가 주안에 거하는 것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주님은 내 안에 영원히 거하시나 나는 주님안에 영원히 거하질 못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따라 움직였지 주님보고 살지를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각종 고시에 붙으면 여호와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 같다가도, 떨어지거나 직장을 얻지 못하면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것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시는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나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란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린 적도 없고 우리를 떠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떠나고 주님안에 거하기를 거부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5절 처음부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와 구별된 전혀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 두는 것처럼 새 사람은 새로운 질서와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은 1999년도 첫주일입니다.
사람은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그 해에 새로운 것으로 새롭게 채워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못만난 친구를 몇 년후에 만나면 딴 사람같아 보입니다.
1999년도 틀림없이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지식으로 감성으로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에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되고 성장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채우시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이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했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그리스도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채워진 여러분의 가슴과 열정속에 세상을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안에,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행하는 일들과 소망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1999년도 한해는 정말 육신을 좇다가 실패하고 가슴아파하는 한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바른 삶을 사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생각과 지식과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선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신정에 전직 대통령집에 고아원 아이들이 찾아갔을 때 금일봉을 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회단체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간다고 하고, TV가 이 일을 보도할 테니까,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선과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허락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속에 있는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고 나의 선행이 기록되기 위한 목적이 전제된 선행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선행만이 진정한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1999년 한해는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반석같은 믿음으로 세워지는 청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999년은 세 번째 시작하는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은 세 번째 천년기간안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실제로 활동해야할 시기는 2천년대입니다.
우리가 살아갈뿐 아니라 나의 아들과 딸들이 살아갈 2천년대에 주님이 오실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정말 1999년 한해를 잘 보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강한 것을 기뻐하고 온전하게 되기를간절히 원했습니다.
우리의 약할 때, 사도가 사도적 권징과 권능을 사용하지 않을때를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하여서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기독교인이면서 세속에 물들어서 타락한 모습으로 교회다니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역자들이 다 원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말씀을 통하여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받고 치유되어서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모임들을 통하여 더욱 그리스도안에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도 "이를 위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바라보는 제자들과 수 많은 교인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로 세워지기를 구한 것은,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됐다면 징계를 하고 사도의 권세로 엄하게 다스릴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 떨어져 있어서 내가 약할 때 너희의 강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다시 만났을 때 징계와 채찍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칭찬과 바르게 세워주는 것으로 만나기를 원하기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멀리 떨어져 사도적 권세가 약할 때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위해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1999년도에는 우리 청년부가 그리스도안에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말입니다.
속칭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잘나가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간구한 것처럼, 저도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1월 첫주일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일부터는 분명히 어떻게 어떻게 살겠다는 각오아래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 내가 그리스에서 벗어나서 세상가운데 있지 안나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1999년 한해 내내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질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부가 2천년을 맞이하는 내년이맘때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강한 청년부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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