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에게 주는 교훈
본문
5월 첫주가 어린이주일이고, 둘째 주는 어버이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1983년 본교단 제68회 총회에서 청년선교활성화를 위하여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이 제20회 청년주일입니다. 매우 의미있는 청년주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뜻깊은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을 중심하여 "청년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릇을 비유하여 귀하게 쓰임받는 일군에 대해서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의 완전한 조건으로서 제일 먼저 깨끗함을 제시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금그릇이라 할지라도 더럽혀져 있으면 그것은 당장 귀하게 쓰여질 수 없습니다. 먼저 깨끗하게 한 후에 귀하에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성품의 소유자가 될 때만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서 쓰여지는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점을 청년 디모데에게 교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그릇이 귀하게 쓰여질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포용력 있는 그릇이 되라.
교회는 큰집과 같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모인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리하여 큰 집에 다양한 그릇이 있듯이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분도 직업도 다르고 환경과 생활이 다르고 체험과 경험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의 능력도 역량도 다르고 취향과 성격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달란트와 은사가 다른 자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는 화합하고 결집시키는 일을 잘하고 어떤 이는 소외된 자들을 잘 돌아보고 어떤 이들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 안에 있는 다양성과 독특성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 보면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교회 안에 다양성과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14-22)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공동체 안에 다양성과 독특성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용력과 수용성이 없는자는 큰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2. 깨끗해야 합니다.
본문21절에 보면 "…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첫째. 귀하게 쓰이게 됩니다.
그릇이 타고난 재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질그릇이 나무그릇이 될 수 없고 은이나 놋그릇이 금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깨끗이 하면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됩니다.
둘째.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거룩하게 쓰임 받는다함은 구별되게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를 선한 일과 사랑의 도구로만 구별하여 쓰임 받게 하십니다.
신구약성경에 선행과 사랑의 도구로 사용된 자가 있는가하면 악역을 맡아 악한 일을 한 자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라 해도 악역을 맡아 일하는 자는 복되다 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할 때 이스라엘을 때리고 채찍하는 도루고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앗수르나 바벨론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가롯 유다가 한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악한도구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아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드라마는 아닙니다.
교회생활이나 인생에 있어서 드라마틱한 면이 있지만 이는 결코 드라마가 아닙니다. 영적 삶 자체요 영적 인생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악역을 맡거나 영적 인생행로에서 악역을 연출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에게 결코 악역을 맡기지 아니합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교만할 때 이스라엘을 채찍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악역을 맡겨주었고 가롯유다가 탐심으로 그 마음이 더러워져 사탄이 역사 할 때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악역을 연출하게 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면 좋을 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오직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의 도루고 사용하십니다. 마음에 교만과 탐심과 정욕으로 더러워진 자는 악역을 맡아 연출하는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오직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의 상급없는 수고를 할 뿐입니다
셋째. 주인에게 합당하게 쓰임 받습니다.
본문 21절 하반절에 보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라고 합니다.
합당하다함은 유용하고 쓸모가 있어 필요하게 쓰여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유익하게 쓰이는 일군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는 ≠ㅏ교회에서도 사회나 국가에서도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어떤 이는 세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와 같이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유익만 취하는 없어야할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자기만 위하여 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있고 꿀벌과 같이 열심히 일하여 자기도 살고 남에게도 도움을 주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청년여러분이 유익한 존재가 되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깨끗케 하는 자가 되기 힘써야 합니다.
넷째. 선한 일에 예비한자가 됩니다.
본문21절 하반절에 보면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예비함이 된다함은 준비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만 꼭 필요한 빼놓을 수 없는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청결입니다. 회개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깨끗한 마음과 성결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하는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딤전1: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선한 일에 사용되도록 준비된 자를 통하여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청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먼저 깨끗케 하십시요. 그리하면 여러분은 귀하고 거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 받는 일군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와 민족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3. 청년들이 지양해야 할 것과 쫓아야 할 것
사도 바울은 본문22절에서 젊은 디모데에게 지양해야 할 것과 좇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청년이 지양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22절 상반절에 보면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욕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정욕은 원칙적으로 성적정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욕이란 향락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욕구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청년의 시기는 자칫 육적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허황된 영광을 구하거나 향락과 쾌락주의에 빠져 인생의 귀중한 시기를 낭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디모데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해도 이러한 청년의 특징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기 때문에 특별히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청년들에게는 넘치는 의욕과 꿈과 희망이 있는 때이지만 반면에 조급함과 편협함과 편견과 참을성이 없는 인내부족의 약점이 있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청년들은 정욕을 멀리하고 인생을 통해서 이룰 꿈이 무엇인지 목표를 정하고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인내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청년의 정욕에 사로잡혀 쾌락과 향락에 사로잡힌 자의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후회와 실패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전도서 11장 9절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아"고 경고했습니다.
2) 깨끗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
청년들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교만과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깨끗한 신앙인과 교제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건전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본문 22절 중반절에 보면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고 합니다.
순수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건전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나 교회에 부정적인 시작과 생각을 가지고 비판하고 흠집이나 내는 불건전한 신앙인과 교제를 끊고 순수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깡패나 폭력배와 어울리게 되면 깡패나 폭력배가 되기 쉽습니다. 도박꾼과 어울리면 도박꾼이 되기 쉽고, 사기꾼과 어울리면 사기꾼이 될 가능성이 많고 육체의 정욕대로 먹고 마시고 취하고 발산하는 무절제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탕아가 되기 쉽습니다.
젊어서 누구와 어울리고 교제하느냐에 따라 제2의 인생이 탄생됩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자기의 할 일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남의 하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과 시각을 가지고 무분별한 비판이나 일삼는 자들과 어울리면 부정적인 신앙인과 사회인이 되기 쉽습니다. 건전한 신앙인과 건전한 사회인과 어울리고 교제하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 건전한 사회인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이 됩니다.
3) 청년이 좇아야 할 것
청년들이 추구하며 좇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집니다. 무엇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 돈만을 추구하는 자는 배금주의가 될 것이고, 향락만 추구하는 자는 향락주의자가 되어질 것이고, 명예를 따르는 자는 명예주의자가 되어질 것이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명자가 될 것이고, 일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는 일군이 될 것이고, 헌신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는 헌신자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청년들이 의미와 가치를 두고 따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좇아야 할 최고의 덕목들입니다. 여기서 좇아간다고 하는 말은 피하라고 하는 말보다 적극적인 말입니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할 동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끝까지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좇아야 할 네 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의입니다.
의는 성품이나 행동에서 윤리적인 정직성을 의미합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삶입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해와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깊은 애정을 의미합니다.
넷째. 평화입니다.
평화는 미움이나 갈등이나 언쟁이나 다툼이 없는 교제와 조화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적 기초적 원리인 믿음과 사랑 안에 인화가 중요합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우리 성도들이 좇아야 할 덕목중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이러한 덕목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사회와 교회가 변하고 개혁이 되어집니다.
청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을 뜻과 섭리가 있어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민족의 풍요로운 꿈이 되시고 생명이 넘치는 청년들이 되기 원합니다.
오늘 뜻깊은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을 중심하여 "청년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릇을 비유하여 귀하게 쓰임받는 일군에 대해서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의 완전한 조건으로서 제일 먼저 깨끗함을 제시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금그릇이라 할지라도 더럽혀져 있으면 그것은 당장 귀하게 쓰여질 수 없습니다. 먼저 깨끗하게 한 후에 귀하에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성품의 소유자가 될 때만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서 쓰여지는 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점을 청년 디모데에게 교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그릇이 귀하게 쓰여질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포용력 있는 그릇이 되라.
교회는 큰집과 같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모인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리하여 큰 집에 다양한 그릇이 있듯이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분도 직업도 다르고 환경과 생활이 다르고 체험과 경험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의 능력도 역량도 다르고 취향과 성격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달란트와 은사가 다른 자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는 화합하고 결집시키는 일을 잘하고 어떤 이는 소외된 자들을 잘 돌아보고 어떤 이들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 안에 있는 다양성과 독특성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 보면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교회 안에 다양성과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14-22)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공동체 안에 다양성과 독특성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용력과 수용성이 없는자는 큰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2. 깨끗해야 합니다.
본문21절에 보면 "…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첫째. 귀하게 쓰이게 됩니다.
그릇이 타고난 재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질그릇이 나무그릇이 될 수 없고 은이나 놋그릇이 금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깨끗이 하면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됩니다.
둘째.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거룩하게 쓰임 받는다함은 구별되게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를 선한 일과 사랑의 도구로만 구별하여 쓰임 받게 하십니다.
신구약성경에 선행과 사랑의 도구로 사용된 자가 있는가하면 악역을 맡아 악한 일을 한 자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라 해도 악역을 맡아 일하는 자는 복되다 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할 때 이스라엘을 때리고 채찍하는 도루고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앗수르나 바벨론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가롯 유다가 한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악한도구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아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드라마는 아닙니다.
교회생활이나 인생에 있어서 드라마틱한 면이 있지만 이는 결코 드라마가 아닙니다. 영적 삶 자체요 영적 인생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악역을 맡거나 영적 인생행로에서 악역을 연출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에게 결코 악역을 맡기지 아니합니다.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교만할 때 이스라엘을 채찍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악역을 맡겨주었고 가롯유다가 탐심으로 그 마음이 더러워져 사탄이 역사 할 때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악역을 연출하게 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면 좋을 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오직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의 도루고 사용하십니다. 마음에 교만과 탐심과 정욕으로 더러워진 자는 악역을 맡아 연출하는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오직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의 상급없는 수고를 할 뿐입니다
셋째. 주인에게 합당하게 쓰임 받습니다.
본문 21절 하반절에 보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라고 합니다.
합당하다함은 유용하고 쓸모가 있어 필요하게 쓰여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유익하게 쓰이는 일군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케 하는 자는 ≠ㅏ교회에서도 사회나 국가에서도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어떤 이는 세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와 같이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유익만 취하는 없어야할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자기만 위하여 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있고 꿀벌과 같이 열심히 일하여 자기도 살고 남에게도 도움을 주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청년여러분이 유익한 존재가 되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깨끗케 하는 자가 되기 힘써야 합니다.
넷째. 선한 일에 예비한자가 됩니다.
본문21절 하반절에 보면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예비함이 된다함은 준비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만 꼭 필요한 빼놓을 수 없는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청결입니다. 회개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깨끗한 마음과 성결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하는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딤전1: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선한 일에 사용되도록 준비된 자를 통하여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청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먼저 깨끗케 하십시요. 그리하면 여러분은 귀하고 거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 받는 일군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나라와 민족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3. 청년들이 지양해야 할 것과 쫓아야 할 것
사도 바울은 본문22절에서 젊은 디모데에게 지양해야 할 것과 좇아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청년이 지양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22절 상반절에 보면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욕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정욕은 원칙적으로 성적정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욕이란 향락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욕구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청년의 시기는 자칫 육적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허황된 영광을 구하거나 향락과 쾌락주의에 빠져 인생의 귀중한 시기를 낭비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디모데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해도 이러한 청년의 특징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기 때문에 특별히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청년들에게는 넘치는 의욕과 꿈과 희망이 있는 때이지만 반면에 조급함과 편협함과 편견과 참을성이 없는 인내부족의 약점이 있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청년들은 정욕을 멀리하고 인생을 통해서 이룰 꿈이 무엇인지 목표를 정하고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인내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청년의 정욕에 사로잡혀 쾌락과 향락에 사로잡힌 자의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후회와 실패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전도서 11장 9절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아"고 경고했습니다.
2) 깨끗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
청년들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교만과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깨끗한 신앙인과 교제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건전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본문 22절 중반절에 보면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고 합니다.
순수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건전한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나 교회에 부정적인 시작과 생각을 가지고 비판하고 흠집이나 내는 불건전한 신앙인과 교제를 끊고 순수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신앙인들과 어울리라는 것입니다. 깡패나 폭력배와 어울리게 되면 깡패나 폭력배가 되기 쉽습니다. 도박꾼과 어울리면 도박꾼이 되기 쉽고, 사기꾼과 어울리면 사기꾼이 될 가능성이 많고 육체의 정욕대로 먹고 마시고 취하고 발산하는 무절제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 탕아가 되기 쉽습니다.
젊어서 누구와 어울리고 교제하느냐에 따라 제2의 인생이 탄생됩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자기의 할 일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남의 하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과 시각을 가지고 무분별한 비판이나 일삼는 자들과 어울리면 부정적인 신앙인과 사회인이 되기 쉽습니다. 건전한 신앙인과 건전한 사회인과 어울리고 교제하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 건전한 사회인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이 됩니다.
3) 청년이 좇아야 할 것
청년들이 추구하며 좇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집니다. 무엇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 돈만을 추구하는 자는 배금주의가 될 것이고, 향락만 추구하는 자는 향락주의자가 되어질 것이고, 명예를 따르는 자는 명예주의자가 되어질 것이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명자가 될 것이고, 일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는 일군이 될 것이고, 헌신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는 헌신자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청년들이 의미와 가치를 두고 따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좇아야 할 최고의 덕목들입니다. 여기서 좇아간다고 하는 말은 피하라고 하는 말보다 적극적인 말입니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할 동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 열심을 다해 끝까지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좇아야 할 네 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의입니다.
의는 성품이나 행동에서 윤리적인 정직성을 의미합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삶입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해와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깊은 애정을 의미합니다.
넷째. 평화입니다.
평화는 미움이나 갈등이나 언쟁이나 다툼이 없는 교제와 조화를 의미합니다. 기독교적 기초적 원리인 믿음과 사랑 안에 인화가 중요합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우리 성도들이 좇아야 할 덕목중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이러한 덕목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사회와 교회가 변하고 개혁이 되어집니다.
청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을 뜻과 섭리가 있어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민족의 풍요로운 꿈이 되시고 생명이 넘치는 청년들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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