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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하나님께 쓰임받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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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왕 웃시야 때부터 히스기야 때까지 약 60년 간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그의 아버지 아모스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왕과 많은 친분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가 웃시야 왕의 사촌 동생으로 보기도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청년의 때 부름을 받았는데 바로 그때 예기치 않은 슬픔이 그에게 찾아온다.
 그가 그렇게 따르고 함께 했던 웃시야 왕이 죽고 만다. 웃시야 왕은 초기에는 매우 나라를 잘 다스렸다. 통치 초기에는 매우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서 강대국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왕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은 나라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다 빠져 버렸고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상실했다. 앗수르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유다를 자주 침입하며 위협했다. 나라는 극도로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의 영혼은 병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다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1:2-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거늘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목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사야에게 오늘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 어려움이 그에게 찾아 왔을때 그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려운, 총체적인 어려움 앞에서 그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가
그 어려움 앞에서 그는 도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려움을 달래기 위해 술집을 찾아가지 않았고 자기를 위로해줄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 어려움을 안고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 그는 성전에 가서 목놓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여러분은 술을 진탕 나게 먹고 나이트에게 밤을 세우고 소리지르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어려움에 대한 처방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도 "그러면 그렇지 여호와 하나님은 없는 거야"라고 아직 덜 익은 생각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 말아라. 어려움이 왔을 때 괜히 여러분의 부모님께 반항하지말고 여러분의 여자 친구에게 화풀이하지 말아라.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나가야 한다. 내가 아무리 어렵고 슬픈 상황 속에 있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다. 마음이 슬픈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는다. 슬플 때는 마음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여호와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갔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높이 들린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과 스랍(천사)들이 거룩을 노래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절망에 빠진 이사야에게 왜 여호와 하나님은 높이 들려 있는 보좌와 높이 나는 천사들을 보여 주신 것일까 여기에 중요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너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네가 오늘 슬픔을 만났다고 해서 아래를 보지 말라는 것이다.
 너의 신앙의 수준을 낮추지 말라는 것이다. 절망, 슬픔, 괴로움, 답답함, 침체와 정체 속에 있을 때 너는 세상으로 향하지 말라는 것이다. 낮은 곳에 너의 눈을 고정하지 말고 높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청년들이 살아가기에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서도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청년들이 있다. 여러분이 지금 어려운 시기에 있다면, 슬픔에 잠겨있다면,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순간이 온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땅위의 것들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영원의 세계를 준비하고 영원의 세계를 기대하며 그곳에 투자하는 사람이다. 이 땅을 위해 사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고 영원한 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다. 지금 여러분의 관심이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다면 당신은 큰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큰 사람은 관심이 언제나 영원한 땅에 있다. 여러분의 비전을 바꾸라.
청년들이여!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실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쓰신다. 내일을 보지 못하고 오늘만을 위해 사는 자는 영적인 거목이 아니라 하루살이 벌레처럼 초라한 인생이다. 청년들이여! 오늘만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라. 나도 어떤 설교자처럼 여러분에게 도전을 준다. "청년들이여! 두려워하라. 평범한 죽음을"
(찬양: 여호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이사야는 그렇게 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자신의 초라함과 죄악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회개한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제단의 숯불을 가져야 그의 죄악을 깨끗하게 불태워 제하는 회개를 경험케 한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쓰임받고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죄악을 보고 깨끗이 씻어야 한다. 자신의 죄를 씻음받고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부흥을 꿈꾸고 있다. 참된 부흥은 어디에부터 오는 것인가 참된 부흥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어찌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청년부의 부흥을 꿈꾼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영주교회의 부흥을 원한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흥의 역사는 언제나 회개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1907년 대부흥 운동은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영국의 웨슬리 형제, 미국의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대각성 운동은 사회에 만연된 죄악들을 회개하기 시작했을 때 일어났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 침대 밑에 여전히 감추어 놓은 음란 서적은 없는가 내 책상 어딘가에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놓은 음란 CD, 음란 테잎은 없는가 나는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지 않는가 이런 것이 만약 나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이젠 그것을 버려야 한다. 청산해야 한다. 야곱이 우상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다시는 그 우상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했던 것처럼 우리도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이 교회의 부흥을 주도할 수 있다. 여러분이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예배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 앞에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와 싸워 이기지 못하는 무능하고 초라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찬양할때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맛보며 눈물 흘리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이 교회는 부흥한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개하며 눈물 흘릴 때 그 어떤 성도들이 "쟤들 갑자기 왜 저래 이 목사가 뭘 잘못 맥였나"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어린 청년들도 회개하는데 내가 회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호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 회개의 영이 부어지고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고 기도가 이 교회를 달구기 시작하며 성령님의 손에 붙잡혀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데 어찌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취미가 하도 괴상해서 사람들에게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통곡하고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서 회개하는 모습을 즐기는 세디즘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깨끗한 분이다. 거룩해서 죄악과 함께 할 수 없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 원해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신다.
청년들이여!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보다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비전을 부어주신다. 사탄은 우리의 죄를 부각시키고 우리의 연약함을 건드려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실패와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치유하고 회복하길 기뻐하신다.
(찬양: 주를 향한 사랑을)
이렇게 회개하고 죄의 씻음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타까이 외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이 부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윌리엄 캐리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이었다. 그는 구두 만드는 의자 앞에 자신이 직접 종이 조각 하나하나를 오려 붙여 만든 세계 지도를 붙여 놓았다. 왜냐하면 너무 가난하여 세계지도를 살 돈 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는 항상 그 지도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그 후에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선교사 되었고, 훗날 성경을 36개국 언어로 번역했다. 세계를 위해 기도한 캐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를 맡기셨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방에도 세계지도를 붙여놓아라. 세계지도를 보면서 기도하고 비전을 키워나가라.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고 비전을 키우는 만큼 그에게 역사하신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세계를 주신다. 서울을 품고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서울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내가 후암동만을 품으면 여호와 하나님은 후암동만을 주신다. 우리는 웨슬리의 가슴 뜨거운 비전을 생각해야 한다. "세계는 나의 교구(구역)"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웨슬리에게 세계를 맡기셨다. 절대로 여러분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사람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오직 하나의 결단을 해야 한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
스무 살에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를 보내소서"라고 결단했던 이사야를 여호와 하나님은 거침없이 사용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유다 백성에게로 보내셔서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주인임을 선포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애타게 이 나라가, 이 백성들이, 이 사회가, 이 문화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 되기를 위해서 탄식하신다. "과연 누가 여호와 하나님 없는 저 곳에 가서 내가 인생의 주인 됨을 선포하며 살아갈까"
여러분이 이사야가 되라. 이사야와 같이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해라. 여러분이 있기에 소망이 있는 가정. 여러분이 있기에 소망이 있는 직장. 여러분이 있기에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나라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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