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노인과 청년
본문
우리는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5월이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인지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5월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쾌적한 날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기 전으로 우리가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제공합니다. 또한 5월은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하얀 아카시아가 진한 향기를 토해 낼 것입니다. 꽃의 여왕이라 부르는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어날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는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려지기에 부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5월이 아름다운 더 귀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5월은 우리의 가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가정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만 해도 여럿이 됩니다. 그 날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가정과 가족을 생각하게 하는 날들입니다. 우리는 그제 어린이날을 지났고, 내일이면 어버이날을 맞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어린이 주일이고 다음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켜야 옳습니다. 하지만 어제 우리 교회에서 "제 3 회 노인초청위로잔치"를 했고, 내일이면 어버이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부모님들과 관련하여 같이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이들은 자라나는 새싹으로 새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잘 가르쳐서 다음 세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가 바르게 잘 자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말처럼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여러 어른들께서 자녀를 다 길러 보셨기 때문에 이미 다 경험하신 일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가르침과 더불어 본이 되는 삶의 행실들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바른 가치를 배우고 삶을 배웁니다. 우리의 온전한 말과 행실을 통한 가르침이 곧 그들의 인격이 되며 일생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농촌의 모습은 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 농촌은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울고 웃는 소리를 듣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우리 사회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노인초청 잔치를 위해 70세 이상 노인들을 조사해 보니까 나포면 전체로 하면 약 600명이 되고 우리 교회 구역에 사시는 분들만 해도 200명 가깝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아도 절대다수가 노인들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노령화되고, 교회도 노인의 수가 많아지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노인 사회에 나타나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인들에게는 먼저 육체의 힘이 약해집니다. 각종 노인성 질환들이 나타납니다. 허리 다리 무릎이 아픈 것을 비롯해서 고혈압 중풍 등 각종 노인성 질환들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전에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힘있게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 됩니다. 또 그렇게 몸이 약해지다 보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일을 보면 겁 없이 덤벼들었는데 나이가 먹으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내일에 대한 꿈이나 비전보다는 지난 젊었을 때 했던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살게 됩니다. 따라서 노인 사회에서는 활력을 찾기가 힘들게 됩니다.
또 하나 노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해서 모든 일을 포기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나는 나이가 많이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노인들에게 젊은이와 같은 패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노인으로서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젊은이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노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서 그것마저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여기 우리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계신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한가한 시간이나 혹은 잠자리에 드실 때 옛날 생각이 많이 나십니까, 아니면 내일의 꿈과 계획을 많이 가지십니까 또 여러분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시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만일 '내가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나는 지난날보다 내일을 꿈꾸며 살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면 그 분은 몸은 노인이지만 노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늙었느냐 젊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육신의 상태를 가지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20-30대의 젊은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늙어 있으면 늙은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세가 높아도 그 마음이 젊어 있으면 그는 젊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80세와 83세가 된 두 노인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인 아론은 83세였고, 동생인 모세는 80세였습니다. 그런데 80이 넘은 이 두 노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엄청나게 큰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니까 "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이었고 아론은 팔십 삼 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 내라는 명령을 받고 애굽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80세였다고 말씀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나이는 상 노인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신 어른으로서 섬김을 받든지, 아니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방 노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80세의 노인이 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는 나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얼마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느냐,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가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120세가 될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그렇게 오래 산 것은 그 때 사람들은 수명이 길어서 그렇게 다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60만 장정 가운데 100세를 넘긴 사람은 모세를 포함해서 단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60살도 살지 못하고 죽은 자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결코 그 수명이 길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지은 시편 90편에 보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70세 정도 살았고, 건강한 사람이면 80살 정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80의 나이에 젊은이나 할 수 있는 아주 크고 놀라운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일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팔순의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80세의 노인 모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을 모세는 신뢰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모세에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 일을 능히 이룰 수 있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 믿음이 바로 모세에게 놀라운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삶의 능력을 삼고 살아가십니까 80 노인이든 스무 살의 젊은이든 우리 모두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만이 힘이 되며 능력이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노인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나이를 초월하여 주의 크신 역사를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나이를 초월해서 주를 섬긴 사람은 모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까 80이 넘은 노인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을 감당하는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으로 갈렙을 들 수 있습니다. 갈렙은 전날 모세의 명을 받아 40세의 젊은 나이로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입니다. 그후 45년이 지나 85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백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전날 모세가 약속하기를 내가 원하는 땅은 어느 곳이든지 준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나에게 그 땅을 주십시오. ' 그런데 그가 원한 땅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험난한 산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땅은 아낙 자손이라는 아주 사납고 전쟁을 잘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차지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85세의 나이에 가장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권리가 주어져 있었지만 그가 굳이 험난하고 어려운 땅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수아 14장에 보니까 갈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힘이 세며 전쟁에 능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다 쫓아내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갈렙의 그 패기와 힘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여 얻을 것이라고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갈렙은 45년 전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의 말이 아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던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갈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붙잡는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 약속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을지라도 나이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똑 같이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 주시는 힘으로 능히 이루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시고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 어느 경우에든지 주께서 맡기신 우리의 일들을 능히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또 한 사람 80세의 노인으로 곤경에 처한 다윗 왕을 도왔던 바르실래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성 예루살렘을 버리고 요단을 건너 도망을 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다윗은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랬으니다른 쓸 것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때 부자였던 바르실래가 왕의 피난길에 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보니까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삼하 17:28-29)"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피난길에 필요할 것이 많이 있을 것인데 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여 정성껏 여러 가지 물건들을 준비해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실래의 이런 행동들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반역자 압살롬이 승리하는 날이면 피난길의 왕을 도왔다는 이유로 어떤 형벌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자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이며,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일 지나지 않아 다윗 왕이 반란을 평정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르실래는 환궁하는 왕을 찾아가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되어준 바르실래에게 함께 왕궁으로 가서 살자고 말합니다. 그곳에 가서 후한 대접을 해 줄 것이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다윗의 호의를 겸손히 거절합니다. 사무엘하 19장에 보니까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삼하 19:34-37)"
우리 세대 가운데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바르실래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왕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좋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왕이 그에게 후한 대접과 상을 베풀어준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조그만 것이라고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칭찬을 듣기 원하고, 그에 대한 어떤 대가를 받으려고 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 아무 말이 없으면 괜히 심술이 나고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후한 상급을 사양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는 성숙한 인격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이 바르실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르실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는 모세나 갈렙 혹은 바르실래처럼 70-80이 되신 노인들도 계시고 30-40대의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의 나이가 아닙니다. 육신의 나이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80, 90이 되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그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있으면 그는 청년입니다. 100세가 되었다 해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아직도 섬김의 삶을 살아가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청년의 기백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20대의 젊은이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뭔가 대가를 바라며 섬김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는 늙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육신의 나이를 가지고 내가 노인인가 젊은이인가를 따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항상 청년의 패기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시고, 주의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나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섬기는 자로 살겠다, 나의 삶이 마치는 그 날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 이렇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런 삶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힘없는 노인이 아니라 늘 푸른 청년의 패기와 용기와 아름다움을 항상 간직하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지만 5월이 아름다운 더 귀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5월은 우리의 가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가정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만 해도 여럿이 됩니다. 그 날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가정과 가족을 생각하게 하는 날들입니다. 우리는 그제 어린이날을 지났고, 내일이면 어버이날을 맞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어린이 주일이고 다음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켜야 옳습니다. 하지만 어제 우리 교회에서 "제 3 회 노인초청위로잔치"를 했고, 내일이면 어버이날을 맞이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부모님들과 관련하여 같이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이들은 자라나는 새싹으로 새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잘 가르쳐서 다음 세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가 바르게 잘 자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말처럼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여러 어른들께서 자녀를 다 길러 보셨기 때문에 이미 다 경험하신 일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가르침과 더불어 본이 되는 삶의 행실들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은 바른 가치를 배우고 삶을 배웁니다. 우리의 온전한 말과 행실을 통한 가르침이 곧 그들의 인격이 되며 일생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농촌의 모습은 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 농촌은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울고 웃는 소리를 듣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우리 사회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노인초청 잔치를 위해 70세 이상 노인들을 조사해 보니까 나포면 전체로 하면 약 600명이 되고 우리 교회 구역에 사시는 분들만 해도 200명 가깝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만 보아도 절대다수가 노인들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노령화되고, 교회도 노인의 수가 많아지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노인 사회에 나타나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인들에게는 먼저 육체의 힘이 약해집니다. 각종 노인성 질환들이 나타납니다. 허리 다리 무릎이 아픈 것을 비롯해서 고혈압 중풍 등 각종 노인성 질환들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전에 젊었을 때 하던 것처럼 힘있게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 됩니다. 또 그렇게 몸이 약해지다 보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일을 보면 겁 없이 덤벼들었는데 나이가 먹으면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내일에 대한 꿈이나 비전보다는 지난 젊었을 때 했던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살게 됩니다. 따라서 노인 사회에서는 활력을 찾기가 힘들게 됩니다.
또 하나 노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해서 모든 일을 포기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나는 나이가 많이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노인들에게 젊은이와 같은 패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노인들에게는 노인으로서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젊은이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노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서 그것마저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여기 우리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계신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한가한 시간이나 혹은 잠자리에 드실 때 옛날 생각이 많이 나십니까, 아니면 내일의 꿈과 계획을 많이 가지십니까 또 여러분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시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만일 '내가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나는 지난날보다 내일을 꿈꾸며 살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면 그 분은 몸은 노인이지만 노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늙었느냐 젊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육신의 상태를 가지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20-30대의 젊은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늙어 있으면 늙은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세가 높아도 그 마음이 젊어 있으면 그는 젊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80세와 83세가 된 두 노인을 볼 수 있습니다. 형인 아론은 83세였고, 동생인 모세는 80세였습니다. 그런데 80이 넘은 이 두 노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엄청나게 큰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니까 "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이었고 아론은 팔십 삼 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 내라는 명령을 받고 애굽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80세였다고 말씀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나이는 상 노인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신 어른으로서 섬김을 받든지, 아니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방 노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80세의 노인이 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는 나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얼마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느냐,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가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120세가 될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그렇게 오래 산 것은 그 때 사람들은 수명이 길어서 그렇게 다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60만 장정 가운데 100세를 넘긴 사람은 모세를 포함해서 단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60살도 살지 못하고 죽은 자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결코 그 수명이 길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지은 시편 90편에 보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70세 정도 살았고, 건강한 사람이면 80살 정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80의 나이에 젊은이나 할 수 있는 아주 크고 놀라운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일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팔순의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80세의 노인 모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을 모세는 신뢰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모세에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 일을 능히 이룰 수 있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 믿음이 바로 모세에게 놀라운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삶의 능력을 삼고 살아가십니까 80 노인이든 스무 살의 젊은이든 우리 모두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만이 힘이 되며 능력이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노인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나이를 초월하여 주의 크신 역사를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나이를 초월해서 주를 섬긴 사람은 모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까 80이 넘은 노인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을 감당하는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으로 갈렙을 들 수 있습니다. 갈렙은 전날 모세의 명을 받아 40세의 젊은 나이로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입니다. 그후 45년이 지나 85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백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전날 모세가 약속하기를 내가 원하는 땅은 어느 곳이든지 준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나에게 그 땅을 주십시오. ' 그런데 그가 원한 땅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험난한 산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땅은 아낙 자손이라는 아주 사납고 전쟁을 잘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차지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85세의 나이에 가장 좋은 땅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권리가 주어져 있었지만 그가 굳이 험난하고 어려운 땅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수아 14장에 보니까 갈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힘이 세며 전쟁에 능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다 쫓아내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갈렙의 그 패기와 힘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여 얻을 것이라고 말씀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갈렙은 45년 전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의 말이 아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던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갈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굳게 붙잡는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 약속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을지라도 나이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똑 같이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 주시는 힘으로 능히 이루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시고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 어느 경우에든지 주께서 맡기신 우리의 일들을 능히 잘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또 한 사람 80세의 노인으로 곤경에 처한 다윗 왕을 도왔던 바르실래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성 예루살렘을 버리고 요단을 건너 도망을 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다윗은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랬으니다른 쓸 것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때 부자였던 바르실래가 왕의 피난길에 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보니까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삼하 17:28-29)"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피난길에 필요할 것이 많이 있을 것인데 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여 정성껏 여러 가지 물건들을 준비해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실래의 이런 행동들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반역자 압살롬이 승리하는 날이면 피난길의 왕을 도왔다는 이유로 어떤 형벌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자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이며,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일 지나지 않아 다윗 왕이 반란을 평정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르실래는 환궁하는 왕을 찾아가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되어준 바르실래에게 함께 왕궁으로 가서 살자고 말합니다. 그곳에 가서 후한 대접을 해 줄 것이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다윗의 호의를 겸손히 거절합니다. 사무엘하 19장에 보니까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삼하 19:34-37)"
우리 세대 가운데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바르실래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왕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좋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구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왕이 그에게 후한 대접과 상을 베풀어준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조그만 것이라고 좋은 일을 했다 싶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칭찬을 듣기 원하고, 그에 대한 어떤 대가를 받으려고 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 아무 말이 없으면 괜히 심술이 나고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후한 상급을 사양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는 성숙한 인격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이 바르실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르실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는 모세나 갈렙 혹은 바르실래처럼 70-80이 되신 노인들도 계시고 30-40대의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의 나이가 아닙니다. 육신의 나이를 초월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80, 90이 되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그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있으면 그는 청년입니다. 100세가 되었다 해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아직도 섬김의 삶을 살아가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청년의 기백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20대의 젊은이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뭔가 대가를 바라며 섬김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는 늙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육신의 나이를 가지고 내가 노인인가 젊은이인가를 따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항상 청년의 패기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시고, 주의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나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섬기는 자로 살겠다, 나의 삶이 마치는 그 날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 이렇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런 삶을 기뻐하시며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힘없는 노인이 아니라 늘 푸른 청년의 패기와 용기와 아름다움을 항상 간직하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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