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애굽으로 보내진 아브라함
본문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우리 속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 설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믿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 핵심 주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네 본토 친척들에게서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할 때, 그가 이미 믿음을 갖고 있어서 "네"하고 믿음으로 떠난 것이라면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절망감밖에 배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믿음으로 본토 친척집을 떠났고 또 말년에 얻은 아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떳떳이 바칠 수 있었다"고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기만 해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설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 출발 지점에서부터 믿음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그렇지 않았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출발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애굽에 내려간 사건은 그가 타락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결론은 뻔해집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애굽에 내려가서 수모를 당하게 된 모습을 보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이 믿음의 타락이 아니라면 거기서 아내를 빼앗겼던 사건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되는가'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타락이 아니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밀어서 가나안까지 들여보내셨다가 다시 그를 애굽으로 몰아내시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점들을 가지고 본문을 추적해 봅시다.
아브라함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사건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어쫓으셨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해 놓고 당했던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두 가지 문제를 풀어봅시다.
먼저 그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진 것이고(창13:1-12) 또 하나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드는(창14:1-16) 놀라운 담대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졌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앞의 과에서도 그가 자기 본토 친척집을 떠날 때 혼자 나오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와 조카까지 함께 나와야 했던 상황적 배경을 설명했지만 그 시대는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말해야 할 만큼 살벌한 시대입니다. 물건이 많고 쓸 만한 사람이 많으면 언제, 누가, 어떻게 뒤엎고 사람은 노예로, 재물은 자기의 약탈품으로 빼앗아갈지 모르는 때입니다.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고 안면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만큼 험한 시대입니다.
그뿐입니까 창세기 14:1,2에 나타난 사건은 아홉 왕이 싸우는데 창세기 14:12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카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318명을 거느리고 쳐들어가 빼앗겼던 조카와 재물을 다 찾아온 사건이 나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에게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배짱은 애굽에서 생겼습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간 사건은 신앙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 신앙을 논할 수준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일 안 갔다가는 큰일이라도 떠질 것처럼 꿈에 본 환상이 너무나 생생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 번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란에서도 나타나시고 또 세겜에서도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어달립니다.
믿음의 훈련지, 애굽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떠나온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기근 속에서라도 자신을 먹일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연스럽게 물이 있는 곳, 자기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 자기네가 먹고 살 수 있는 곳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까지 갑니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자기 아내가 걱정입니다. 너무 예쁘니까 아내를 뺏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라가 자기 동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빠가 되는 이에게는 후하게 대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기로 하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랬더니 그곳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정말인 줄 알고 사라를 빼앗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을 어기고 내려가서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치신 거다. 그래서 그가 회개했다. "라고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마십시오. 이때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로 왕이 회개합니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회개를 합니까 바로 왕은 한밤중에 유명한 권투선수 타이슨에게 얻어맞은 무명선수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 문명국의 통치권이 그에게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한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뺏은 것 하나 때문에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 얻어맞은 것입니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브라함에게 "다 데리고 가라. " 하고는 금은 보화까지 줍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얻어맞았다. "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아브라함은 믿음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크게 놀라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바로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도박하듯이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은 꺼내 놓은 도박이 아닙니다. 우리를 설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넘치는 사랑의 열심입니다. 그 설득에 녹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들을 설득해 오십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 중에 잘못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믿지 않고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일단 믿어보고 이야기합시다. " 우리들은 곧잘 이렇게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은 아침에 출근할 때 버스를 타지요 그때 그 운전기사를 믿고 타지 않습니까 그 차가 일정한 노선대로 갈 것을 믿고 타지 않습니까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일단 믿어보고 이야기합시다. " 우리가 믿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확률이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 " 이렇게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해 오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만큼 이것이 가장 멋있고 명확하게 나타난 예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그 훈련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왕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바로가 벌벌 떨자 아브라함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크게 놀랐습니다. 거기사 그의 믿음은 드디어 첫 눈을 뜹니다. '아,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구나!'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감히 롯과 헤어지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너는 너 갈 데로 가라.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다. 네가 이리고 가면 난 저리로 가겠다. "(창 13:8,9)
이것은 대단한 결정입니다. 그가 때문에 애굽까지 왔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 그가 이제 무엇을 믿고 무슨 배경으로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굽에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이구나. 어쨌든 바로보다 세구나. ' 이것을 배우고 온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신앙생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간섭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이삭을 요구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맨 마지막에 요구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교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힘을 내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혹시 애굽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직접 경험시켜주시기 보다는 옆의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실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저에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러분들의 기도로 힘을 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도부탁드립니다.
이번 한주도 열심히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설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 출발 지점에서부터 믿음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그렇지 않았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출발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애굽에 내려간 사건은 그가 타락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결론은 뻔해집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애굽에 내려가서 수모를 당하게 된 모습을 보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이 믿음의 타락이 아니라면 거기서 아내를 빼앗겼던 사건은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되는가'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타락이 아니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밀어서 가나안까지 들여보내셨다가 다시 그를 애굽으로 몰아내시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점들을 가지고 본문을 추적해 봅시다.
아브라함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사건에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어쫓으셨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해 놓고 당했던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두 가지 문제를 풀어봅시다.
먼저 그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진 것이고(창13:1-12) 또 하나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드는(창14:1-16) 놀라운 담대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졌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앞의 과에서도 그가 자기 본토 친척집을 떠날 때 혼자 나오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와 조카까지 함께 나와야 했던 상황적 배경을 설명했지만 그 시대는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말해야 할 만큼 살벌한 시대입니다. 물건이 많고 쓸 만한 사람이 많으면 언제, 누가, 어떻게 뒤엎고 사람은 노예로, 재물은 자기의 약탈품으로 빼앗아갈지 모르는 때입니다.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고 안면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만큼 험한 시대입니다.
그뿐입니까 창세기 14:1,2에 나타난 사건은 아홉 왕이 싸우는데 창세기 14:12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카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318명을 거느리고 쳐들어가 빼앗겼던 조카와 재물을 다 찾아온 사건이 나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에게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배짱은 애굽에서 생겼습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간 사건은 신앙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 신앙을 논할 수준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일 안 갔다가는 큰일이라도 떠질 것처럼 꿈에 본 환상이 너무나 생생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 번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란에서도 나타나시고 또 세겜에서도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어달립니다.
믿음의 훈련지, 애굽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떠나온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기근 속에서라도 자신을 먹일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연스럽게 물이 있는 곳, 자기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 자기네가 먹고 살 수 있는 곳으로 양식을 구하러 애굽까지 갑니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자기 아내가 걱정입니다. 너무 예쁘니까 아내를 뺏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라가 자기 동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빠가 되는 이에게는 후하게 대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기로 하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랬더니 그곳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정말인 줄 알고 사라를 빼앗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을 어기고 내려가서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치신 거다. 그래서 그가 회개했다. "라고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마십시오. 이때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로 왕이 회개합니다.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회개를 합니까 바로 왕은 한밤중에 유명한 권투선수 타이슨에게 얻어맞은 무명선수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 문명국의 통치권이 그에게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한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뺏은 것 하나 때문에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 얻어맞은 것입니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브라함에게 "다 데리고 가라. " 하고는 금은 보화까지 줍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얻어맞았다. "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아브라함은 믿음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크게 놀라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바로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도박하듯이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믿음은 꺼내 놓은 도박이 아닙니다. 우리를 설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넘치는 사랑의 열심입니다. 그 설득에 녹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들을 설득해 오십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 중에 잘못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믿지 않고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일단 믿어보고 이야기합시다. " 우리들은 곧잘 이렇게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은 아침에 출근할 때 버스를 타지요 그때 그 운전기사를 믿고 타지 않습니까 그 차가 일정한 노선대로 갈 것을 믿고 타지 않습니까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일단 믿어보고 이야기합시다. " 우리가 믿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확률이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 " 이렇게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해 오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만큼 이것이 가장 멋있고 명확하게 나타난 예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그 훈련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왕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바로가 벌벌 떨자 아브라함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가장 크게 놀랐습니다. 거기사 그의 믿음은 드디어 첫 눈을 뜹니다. '아,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구나!'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감히 롯과 헤어지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너는 너 갈 데로 가라.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다. 네가 이리고 가면 난 저리로 가겠다. "(창 13:8,9)
이것은 대단한 결정입니다. 그가 때문에 애굽까지 왔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 그가 이제 무엇을 믿고 무슨 배경으로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굽에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이구나. 어쨌든 바로보다 세구나. ' 이것을 배우고 온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신앙생활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간섭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이삭을 요구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맨 마지막에 요구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교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힘을 내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혹시 애굽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직접 경험시켜주시기 보다는 옆의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실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저에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러분들의 기도로 힘을 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도부탁드립니다.
이번 한주도 열심히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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