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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나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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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대학 시절에 가장 관심이 크고, 꼭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성교제에 대한 문제와 비전(진로, 취직)에 관한 문제와, 자아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대학생들이 모이는 전국 단위의 수련회에서 선택특강을 하는시간에 보면 이 세곳이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그만큼 관심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이 세 가지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2가지의 이야기입니다. 과부의 기도와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것입니다.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갑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마찬가지로 과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고, 자식을 더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힘을 누리던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재판관에게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들어주지 않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서 그 소원을 들어줬느냐 하면 귀찮아서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누가복음 18장 과부의 사건이 '그 봐라 들어주시기까지 귀찮을 정도로 매어 달리면 들어주신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굉장한 열심만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매어달리기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신다고 하는 엉터리같은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지금 무게중심이 '항상 기도하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망치 말아야'에 초점이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을 들어주는데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들어주시지 않는데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비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하면 응답을 받느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응답을 받아야함에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혼동하지 말라고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도시에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재판관이란 우리나라의 판사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에 지방의 수령이었던 사또입니다. 즉 삼권을 다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곳에 한 과부가 와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데 갚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갚아 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번거롭게해서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번거롭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 번 찾아왔다는 횟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합니다.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재판관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강도짓을 하려고 하는데, 어린아이가 울면서 빕니다. "아저씨 제발, 나쁜짓을 하지 말라"고 울면서 빕니다. 또 아니면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방긋이' 웃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수했다면 강도로 치면 마음이 연약한 강도입니다. 그래도 죽여야 강심장의 강도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가 찾아오는 횟수에 마음이 찔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외치는 그 내용의 '정당함'에 마음이 찔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녀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았다면, 그 재판관은 다른 죄목을 덮어 씌워서 감옥에 처넣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비유는 어느 만큼 기도하면 응답을 받느냐가 아니라 어느 만큼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을 수 있느냐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대조적인 내용입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공의로운 재판관이신 여호와 하나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어디 기댈 데도 없는 과부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통점은 전자에 있어서 "도와주십시오"도 정당한 일이고, 후자에 있어서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내 원한을 풀어주십시오"도 정당한 요구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원한을 풀어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원한'은 '원통함'이 훨씬 더 어울립니다.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라"라는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고,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관심이 없어도 아니니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라고 들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필요로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심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게 하시고 들어주시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게 하셨고,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통하여 인격을 성숙시키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난 부분을 깍으시려고 하는지 사람들마다 이유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느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태도와 안타까움은 약화가 되거나, 무효가 되거나, 외면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낙망치 말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성교제에 관한 문제
앞에서 말씀드린 3가지 중에서 이성교제에 관한 문제가 단연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에만 해도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이말삼초(2末初)에 복사꽃을 잡아라" 이 말은 여학생은 2학년 말이나, 3학년 초가 되면 남자 복학생 4학년과 교제를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일초 땡이라고 합니다. 즉 1학년 초에 연애를 못하면, 졸업할 때까지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기다림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학년 말이나 삼학년 초가 되면, 대학이 어떤 곳인지도 알고, 자기가 전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사람에 대해서도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진위여부를 어느 정도는 잘 가릴 수 있는 나이. 자신의 앞길에 대해서도 설정할 수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일초 땡은 눈에 보이는데로 택하는 경박한 사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실한지,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택할 때에도 외모만 중요합니다. 재작년에 결혼교실을 할 때에, 오신 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요즈음 남자들은 사람을 택할 때에 3가지를 보는데 얼굴, 외모, 미모를 본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남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흐름이 그렇습니다.
키를 크게해 주는 수술
올해 초에 TV에 키를 크게 해 주는 수술에 이야기가 방송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러시아의 의사가 장애인들을 위해서 만들었는데, 이제는 키를 크게 하는 수술로 더 유명하다고 합니다.
발목 위쪽의 뼈를 잘라서 3-4㎝정도를 띄워서 고정을 합니다. 그러면 그만큼 뼈가 커지면 그만큼의 키가 자라는 것입니다. 또 무릎 위의 뼈를 자릅니다. 아래와 같이 또 3-4㎝정도를 띄워서 고정을 합니다. 그래서 뼈가 자라면 7㎝정도 키가 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버스가 서면, 자꾸 뼈가 부러지지는 것입니다.
한 여대생은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자 작다는 이유로 취지직이 않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어떤 여성은 뼈가 자라기는 자랐는데 뒤쪽의 아킬레스건은 자라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발 뒷굽이 땅에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키가 큰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평생 키가작아서 그것으로 콤플렉스에 쌓여 지내느니, 이래도, 또 늙어서 고생을 하더라도 키가 큰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한참 울었습니다. 외모중심주의, 본질을 중요시 하지 않는데서 오는 속상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어려운 시기가 결정적인 결단을 해야할 때, 외적인 것이 해결함을 주지 못합니다. 내면적인 것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이성친구를 오랫동안 구하고자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옆 친구는 나보다 믿음이 별로인 것 같은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면, 나에게는 더 좋은 사람을 주실 것을 믿고 잘 가꾸고 계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 가장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의 드렸던 기도가 이러합니다. 11-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냥 '기도했다'고 되어 있지만 좀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Prayed about himself, 또는 prayed to himself입니다. 즉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과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신의 의에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강도도 아니오 불의한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 옆에 있는 세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일주일에 2번씩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인들이 공식적으로 금식한 날은 대속죄일에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일주일에 2번을 했던 것입니다. 그 금식일이 월요일과 목요일입니다. 그 날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던 날이 월요일이고, 내려온 날이 목요일이라고 합니다. 모세를 추종했던 그들은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던 속셈은 딴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이 바로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금식을 하는 사람은 하얗게 칠하고, 곡하는 사람들처럼,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순종을 세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소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목록이었습니다. 우리도 하지 않은 것만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모르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에 가면 여호와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란 사실입니다.
② 율법주의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의무도 목록을 정해놓고 지켰습니다. 1년에 한번할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을 했고, 수입의 십일조만 하면 되었는데, 조미료의 십일조까지 했습니다. 그런 목록이 틀렸다기 보다 그런 목록이 자신의 본질상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행한 경건으로 다른 죄들을 무마하고 있다면 우리가 바리새인입니다.
③ 남과 비교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절대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두달란트를 남긴 사람에해 하신 칭찬이 똑같다는 데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신앙은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진로에 관한 문제
고학년이 되고, 졸업에 임박할수록 진로에 관한 문제는 우리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일에 걸맞는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그 외식함 때문에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지만 그의 전문성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몇 자인 것을 알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지키는 것을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공에 대해서 어떠합니까 전공이 적성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할 일에 대한 태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바리새인의 전문가다움을 갖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
또 한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금 징수원입니다.
로마는 이상한 세금 징수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찰제도였습니다.
로마는 일정지역에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정해 놓은 다음에 가장 높은 세금을 내겠다는 사람에게 낙찰을 하는 제도였던 것입니다. 세금 징수원은 자기가 바치겠다고 말한 액수만 바치면 나면 나머지는 자기 몫이었습니다.
당시에 신문이나 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얼마를 세금을 내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또 세금 징수자가 자기 몫으로 돌아올 양이 얼마인지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이 쓰여질 당시에 로마에 사는 사람들은 2가지의 세금을 내어야만 했습니다. 공세와 국세가 그것입니다. 공세는 조세이고, 국세는 관세입니다.
공세에는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① 토지세가 있는데 이것은 농사지은 곡식의 1/10과 포도주나 과일을 농사한 사람은 1/5을 내었습니다. ② 소득세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자기 소득의 1/100을 내었습니다. ③ 인두세가 있었는데요 14세에서 65세까지 남자에게서 반세겔씩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관세인 국세는 항구나 시장을 드나드는 상품에 대해서 수입세, 수출세 등의 세금을 매기고, 특정한 도로를 지나가는 마차 등에 대해서는 도로세 등을 내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어디서나 행인을 멈추게 하고 그의 보따리 안을 뒤적여 그 안에 있는 물건에 대해 세금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산 속에는 사나운 맹수가 있고, 거리에는 포악한 세리가 있다. "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에 백성들이 일본 순사보다 더 싫어 했던 사람은 순사 밑에 빌붙어 순사의 발을 빨며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한국인이 세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세리는 면허증을 가진 강도다" 세리가 얼마나 세금을 많이 걷어서 백성을 힘들게 했던지 '공식적인 강도'라고 했습니다.
이 세리가 기도드린 내용이 이러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세리는 자신의 행위가 주님 앞에서 어떤 상태인지를 알았고, 또 자신의 본질이 형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이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합니다. 여기에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심리학적이거나 정신의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는 용어로 말씀을 드리면 '以信稱義'입니다. 신약에 유일하게 나오는 개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이 행위에 관한 법률적인 문제로 세리를 고소해서 재판을 걸었는데, 바리새인이 패소를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이요, 세리는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집어 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그러니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별로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신칭의 은혜를 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다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리라고 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듣고, 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바리새인의 고통스러운 관점에 서 읽는다면 예수님의 원 의도에 훨씬 더 가까이 나아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는 '또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가 아닙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정문일침을 놓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상에 관한 문제
세 번째가 자아상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 앞의 두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을 잘합니다. 취직도하고, 결혼도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문제는 절대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속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결정적인 잘못은 바로 자신의 겉 사람―자신의 종교적인 행위―이 자신인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의 속사람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알았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말로 가능하지만, 자기 속에 있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치심도 있고, 열등의식도 있고, 피해의식 등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쓴 뿌리가 되어 자기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또 괴로워합니다.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라 목사가 되었지만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한 성인아이의 고백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이분은 목사가 되었지만 아내를 구타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문제를 해결을 받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술 심부름을 자주 시켰습니다. 그런데 가기가 싫습니다. 거기에서 수치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술 심부름을 시킬 때, 그래도 큰 것으로 한 병 사 오너라 하면, 기분 좋게 다녀올텐데, 꼭 반병만 사오라고 합니다. 사실 가기가 싫은 이유가 그 가게의 주인집 딸이 자신의 동창입니다. 그러니 갈 때마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반병의 술을 외상으로 사오라고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분에서 생겼던 부정정인 감정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수치심, 열등감, 두려움, 공포심, 죄의식,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 결단력이 없음. 성적인 탐닉, 흑백논리, 외로움, 은폐하기, 상습적인 거짓말, 우울증 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를 싸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수용하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도 성인아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과부와 같은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자세와 바리새인과 같이 전문적인 실력을 기르며, 세리와 같은 신앙을 갖게 될 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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