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장애인]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나타내는 장애인

본문

최근에는 한국사회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높아지고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배려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들에게 사회의 벽은 두텁다. 몇 해 전에 어느 장애인 선교단체에서 장애인 야유회를 개최했는데 40세 가량 된 장애인이 새 소리를 처음 들었노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 동안 그 장애인은 바깥출입을 못했던 것이다. 아마 그 장애인의 가족들은 그 장애인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고 살아서 그랬는지, 장애인 자신이 바깥출입을 할 용기와 의지가 없었는지 모른다. 가족이 장애인을 부끄럽게 여겼거나 장애인 자신에게 바깥출입을 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사회의 그릇된 편견과 냉대가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준다. 사회와 교회가 장애인을 받아주고 격려하는 품을 지녔다면 장애인 가족이 장애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장애인이 바깥출입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지하철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도 하고 금식도 했다. 장애인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일본과 한국은 오랜 세월 유교문화와 군사문화의 지배를 받은 경험을 함께 가지고 있다. 유교는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는 기본적으로 지배엘리트에게 초점을 두고 있고 사회를 주도하는 중심인물을 기르고 사회주류의 가치와 문화를 펼치는데 집중한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불쌍한 인간들을 어질게 대하라는 시혜적 자세를 보일 뿐이다. 유교문화에서 장애인은 주변적 존재 또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공자에게 3천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나 거기에 장애인이 있다거나 공자가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가 장애인과 병든 자를 찾고 예수의 주위에 늘 장애인이 있었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유교문화에 익숙한 일본인과 한국인은 사회의 중심과 표준이 되는 것을 잣대로 생각하니까 소외되어 주변으로 밀려난 장애인을 존중하는 생각이 부족하기 쉽다.
전쟁과 군국주의문화가 지배할 때는 장애인이 설 자리가 없다. 전투능력과 능률만을 생각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쓸모없고 거추장스런 존재로 여겨진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건설이 군사정부 아래서 주도되었기 때문에 건물과 시설과 도로에서 장애인을 배려한 흔적을 보기 어렵다. 육교와 지하도가 많고 건널목에도 턱이 있어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길을 갈 수가 없다.
이렇게 사회를 주도하는 이른 바 잘난 인간들만 존중하고 능률과 쓰임새만을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하고 영혼과 인격이 존귀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힘과 물질만 존중되고 사람다운 삶, 함께 사는 삶을 잃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애인도 사람노릇을 할 수 없지만 장애인에 대해서 비장애인도 사람노릇을 못한다. 장애인이 비인간적으로 짓밟히고 소외당하는 만큼 비장애인들도 비인간적 존재가 된다. 장애인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애인은 비정상인이고 비장애인은 정상인이라는 편견이 지배한다.
그러나 장애인은 결코 비정상이 아니다. 다만 장애를 가져서 불편할 따름이다. 그 불편을 사회제도적으로나 보장구를 통해 제거하면 장애인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장애인은 결코 무능력자가 아니다. 장애인은 “다른 방식으로 능력있는 존재”이다. 장애인도 사랑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와 과학자가 될 수 있다. 꼭 예술가와 과학자가 되어야 위대한 것도 아니다. 사람다움을 느끼고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은 존재이므로 참 사람다움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하는 영혼’으로 나타난다. 장애인은 ‘사랑하는 영혼’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영혼이 살면 사회와 문명이 살고 사랑하는 영혼이 죽으면 사회도 문명도 죽는다. 사랑하는 영혼을 잘 느끼는 장애인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와 문명을 살리는 예수님에게 더 가깝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구원활동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장애인이 창조하고 구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가까이 있음을 성서를 통해 살펴보자.
2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장애인
여호와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심연을 극복하고 말씀으로 생명의 세계를 창조했다. (창세기 1장)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충만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아름답고 좋다고 했다. 그러면 이 아름답고 좋은 세상에 왜 장애의 현실이 생겼는가 창조세계는 완성되어 가는 열린 존재이면서 아름답고 충만한 세계이다. 그러나 미완성의 열린 세계이므로 허무와 혼돈과 어둠의 침투, 죄의 세력의 침투가 가능하다. 특히 사람은 인격적 관계를 지닌 자유의지의 존재이므로 그런 침투의 여지가 크다. 인격적 관계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마음 속으로 삶 속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침투한다. 저 창조를 無化시키려는 혼돈의 심연이 자유의지의 빈틈을 뚫고 침입한다. 본래 이 빈틈은 자유와 아름다움과 다양함을 향한 생명의 완성을 위한 빈틈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바람, 죽음을 이긴 부활생명의 바람, 생명을 소생케 하는 성령의 바람이 부는 빈틈이기도 하다. 그 빈틈에 害와 죄와 악이 저 어둠과 허무와 혼돈의 나락이 힘을 뻗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허무와 혼돈의 심연을 창조의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까지는 완전히 봉쇄하지 않는다.
왜 인간의 몸과 마음이 손상되고 파괴되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피조물이 파괴되고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물이 파괴되고 상처받을 가능성 속에서 자유롭고 아름답고 다양하게 완성되기를 바란다. 모든 생명은 모든 영혼은 상처받을 가능성, 고통 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고통과 상처를 받을 수 있음, 파괴되고 죽을 수 있음은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유한한 물질세계, 상처받을 수 있는 육신 안에서 신적 생명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유한 속에서 무한을 성취하는 것, 물질 안에서 정신을, 육신 안에서 영혼을, 인간적 삶에서 신적 영광을, 세속적 삶에서 초월적 거룩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물이, 인간이 고통받고 파괴되는 가능성을 허락했고 고통과 파괴의 현실을 감수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스스로 무한한 아픔을 느끼면서 인간의 고통과 파괴를 감수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의 아픔과 상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 생명의 원천이고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아픔과 파괴에서 더욱 예민하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아픔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업은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지와 저 허무와 혼돈과 어둠의 심연이 맞서기 때문이다. 생명파괴와 고통의 현장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파괴의 세력이 충돌하는 자리이다. 바로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발휘되고 생명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상처와 약한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의미가 밝히 드러난다. 거기서 공동체적 관계와 삶이 실현되고, 허무와 혼돈과 어둠의 나락을 이기는 창조적 생명력이 솟구쳐야 한다.
장애의 현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지와 목적에 어긋난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이고 창조를 완성하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의 현실을 극복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장애의 현실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허무와 혼돈과 어둠의 현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의 현실을 딛고 창조세계를 완성해야 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입증한다. 장애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여호와 하나님, 장애의 현실에 굴복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 창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하고 보살피는 손길은 장애우의 상처받은 삶을 향한다. 장애우에게서 창조를 성취하려고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의지가 장애우에게서 성취되어야 한다.
장애인의 장애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장애를 지닌 자로만 규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비신앙적이다. 장애우는 장애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일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다. 장애우에게서 장애만을 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를 보아야 한다. 장애우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능력이 남아 있다. 장애우도 영혼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낄 수 있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우는 남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목말라 하고 공동체적인 삶을 갈구한다. 장애우에게서 삶의 아름다움과 힘이 더 순수하게 드러날 수 있다. 장애우들의 믿음과 삶의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힘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약함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약함과 상처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듯이 장애인의 상처받은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죽음을 앞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적으로는 체념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장애우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게 된다. 입으로 또는 발가락으로 아름다운 시를 쓰고 뛰어난 그림을 그리며 심한 장애를 안고서 위대한 사랑을 꽃피우는 장애우들에게서 믿음과 삶의 기적을 본다. 장애우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힘과 사랑의 능력을 가장 생생히 볼 수 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의 삶에서 창조와 구원의 사업을 수행하신다.
3 고난의 종과 장애인
구약성서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구원의 길과 방식을 알 수 있다. 고난의 종은 볼품없는 존재, 멸시를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존재이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이사 53,3)이다.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다”(53,4).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53,5). ‘고난의 종’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백마를 탄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고 고난받고 죽어 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온다는 말씀은 인류구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한다.
고난의 종은 세상의 죄악, 고난과 슬픔의 밑바닥까지 체험하는 자이다. 세상의 죄악과 슬픔의 깊이를 아는 자만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과 영혼을 건져 줄 수 있다. 그런 고난의 종만이 인간의 삶의 깊이와 마음의 깊은 속으로 들어 올 수 있다. 그런 고난의 종만이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고난의 종에 관한 성서의 말씀은 자신의 고통은 자기 혼자 겪어야 한다는 개인적이고 평면적인 사고를 넘어서 고난의 공동체성, 고난의 연대성에 이르게 한다. ‘너’의 고난에서 나의 고난을 본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로서 서로 하나로, 한 가족으로 결합되어 있다. 고난의 종이 겪는 아픔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서 모든 사람의 고통과 이어지고 통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는 어떤 고통도 무의미하거나 헛되지 않다. 어떤 고통도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닿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느 누구의 아픔도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우주생명세계를 울리고 형제 자매의 마음에 닿고 형제자매의 마음을 움직인다.
네가 고난 당하는 것은 나 때문이고 우리 때문이라고 하는 깨달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깨달음이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나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나와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네가 고통을 당한다는 깨달음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깨달음이다. ‘너의 고난’ 앞에서 나 자신을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서로 손잡고 하나되는 일이 일어난다. 구원과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다.
고난의 종은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의 종, 메시아인데, 병을 앓고 고통받는 자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장애인의 병과 고통을 대신 지고 고난받는 자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장애인을 멀리하는 분도 아니고 장애인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분도 아니다. 장애인은 고난의 종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오늘 고난 당하는 장애인에게서 ‘고난의 종’을 발견할 수 없을까 초라하고 배척받는 장애인의 고난 당하는 모습은 고난의 종을 연상시킨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에게 그런 고난의 짐을 지우셨을까 장애인이 죄가 많아서 일까 장애인은 세상의 죄와 짐을 지고,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지고 가는 어린양이 아닌가 장애인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이 완벽하고 흠 없는 인간,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구원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장애인은 흠 많고, 허물이 많은 존재이다. 장애인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지고 있는 고통은 그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다. 그가 원해서 겪는 고통도 아니다. 장애인은 그런 고통을 지도록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요, 세상에서 그런 고난을 지도록 정해진 존재이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에게 그런 큰 고난을 지우셨을까 비장애인이 겪어야 할 고난까지 그들에게 지우신 것은 아닐까 인간들이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셨다. 장애인과 손잡고 참된 생명에 이르도록 하셨다. 인간의 죄책과 공동체적 책임을 깨우쳐 주시려고 장애인에게 고통스런 짐을 지우셨다. 새 세상, 영원한 생명, 맑은 영혼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에게 고난을 지우셨다.
또한 장애인은 남모르는 깊은 고통과 슬픔을 안고 있으며 세상의 죄악의 깊이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장애인은 고난의 종과 통한다. 장애인의 한숨과 눈물, 절규와 호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4. 장애인과 예수의 생명회복운동
예수시대의 민중은 정치군사적으로 로마군과 헤롯 왕가의 압제를 받았고, 헬레니즘세계의 군사종교문화의 지배를 받았고, 사제귀족들과 바리사이파로부터 종교적 억압을 당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었을 뿐 아니라 외래적인 문화의 영향으로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사제귀족들과 바리사이파와 같은 종교적 지배층으로부터는 종교적으로 부정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티나는 질병박물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온갖 질병이 만연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택하여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를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누가 4, 18) 예수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장애인의 치유와 해방을 포함한다. 예수는 마치 병자와 장애인을 치유하고 돌보러 온 분처럼 병자들, 장애인들에게 집중한다. 그의 주위에는 늘 수 많은 장애인들이 몰려들었다. 못 걷는 이, 한쪽 손 마른 사람, 눈먼 사람, 귀머거리 그리고 그밖에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온갖 질병을 지닌 사람들이 그에게 오거나 그가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고쳐 주었다. 장애인들의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해방하여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회복시켰다. 그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한 마디로 생명회복운동이었다.
옥에 갇힌 요한이 예수에게 “당신이 메시아냐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느냐”고 제자들을 통해 물었을 때, 예수는 이 본문과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짐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눅 7, 22) 예수가 메시아냐 아니냐는 사변적인 논의 대신에 예수는 지금 하고 있는 일, 장애인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보여 준다.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함으로써 메시아의 사명이 성취된다.
1) 장애인의 짐을 짊어진 예수: 고통받는 생명의 감수성(마태 8:16-17)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의하면 고난의 종 예수는 연약함과 질고를 짊어짐으로써 치유와 구원을 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고난의 종으로서의 삶과 죽음이었다.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과 슬픔, 한(恨)의 깊이를 온전히 맛봄으로써 세상을 구원할 공동체를 만들 자격을 지녔다. 그 바닥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 예수는 죄악과 고통의 깊이를 알고 짊어진 분이다. 예수는 장애인의 깊은 고통을 짊어지고 생명공동체의 구원에로 이끈다.
2) 장애인에 대한 종교적 편견의 극복: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애인(요한9,1-3)
예수는 장애인에 대한 종교,사회적 편견을 벗겨주신 분이다. 예수 당시의 통념에 의하면 장애는 죄의 결과이고 장애인은 저주받은 자, 부정한 자이다. 따라서 장애인은 가장 소외된 자였다. 요한복음 9장 1-3절의 말씀은 장애인에 대한 예수의 자세가 그 시대인들의 자세와 얼마나 다른지를 알려 준다. 예수와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만났다. 제자들은 “저 사람이 눈먼 것이 저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장애인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당시 유다교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당시 유다교는 질병을 죄탓으로 돌렸다. 제자들은 장애인의 장애를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았다. 장애는 죄의 결과,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표시였다. 장애를 운명론적으로 저주의 현실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장애를 죄나 운명적 저주로 보는 것은 유다교뿐 아니라 고대의 거의 모든 종교들과 문화들에 나타나는 그릇된 태도이다.
이런 태도에는 몇 가지 잘못된 생각이 들어 있다. 첫째 이들은 인과응보적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 해방하고 살려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죄와 허물을 가차없이 처벌하는 율법주의적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과거에 매인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그들은 장애인의 삶을 운명론적으로 이해했다. 장애를 부모의 죄나 장애인 자신의 죄로 돌리는 한,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장애를 수치스럽고 욕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애인을 수치스러운 존재, 저주받은 존재로 멸시하고 배척할 수 있다. 셋째 개인주의적, 방관자적 관점에서 장애인을 보았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나는 나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방관자적 입장에서 장애인을 보고 평가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장애인이 나와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공동체적 안목이 없었다.
예수는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장애인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율법주의적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거부하고 운명론적 관점도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방관자적 태도도 부정한다. 예수는 장애인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과 직결시킨다. 예수는 여기서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한다. “장애인의 장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다. ”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장애인을 평가할 수 없다.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다.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를 만들었다거나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일은 바로 장애를 극복하는 데서 드러난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능력이 장애인에게서 드러나야 한다. 예수는 장애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수는 장애인을 장애의 상태에 체념적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장애로부터 해방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웠다. 예수는 장애인을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세웠다. 예수가 장애인의 삶에 개입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3) 장애인과 벌이는 희년잔치
예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인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이웃과의 사귐 속으로 이끈다. 시각장애인, 다리를 저는 이, 나병환자, 청각장애인들은 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들이고 사회의 밑바닥에 버려진 자들이다. 이들과 사회의 지배층 사이에는 깊은 골, 먼 간격, 높은 벽이 있다. 예수는 이 깊은 골과 높은 벽을 공동체 파괴의 현실을 단번에 넘는다. 그리하여 장애인 민중과 함께 희년 잔치,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의 희년 잔치에서는 장애인이 더 이상 장애 때문에 차별 받지 않고 억눌리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를 지녔기 때문에, 아픔과 슬픔이 컸기에 더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린다.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처럼 장애인이 예수님 곁에, 여호와 하나님 품의 가장 깊은 안쪽에 앉는다. 희년잔치는 생명잔치이다. 생명이 고갈된 사람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잔치다.
장애인은 몸의 고통 속에서 생명의 감수성을 얻는다. 장애인들처럼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회의 부조리를 먼저 깨닫고 새로운 사회가 오는 것을 먼저 안다.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둔감하지만 불의를 당하는 사람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예민하다. 억압하고 지배하는 자들은 현재의 사회를 유지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가 오는 것을 싫어하고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눌린 사람들은 새 시대를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민감하게 포착한다. 그러므로 눌린 자들, 특히 장애인들의 고통과 그 고통에서 나오는 소리는 사회의 불의와 악을 드러내는 소리이다. 이 소리를 끝까지 외면하는 사회는 불의와 악 속에서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고통의 소리를 예민하게 들어야 한다.
5 장애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믿음으로 옳다고 인정받는 삶”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의인론(義認論)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죄인인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옳다고 인정받는다”. 죄를 지은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행위를 하거나 공적을 쌓음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다시 말해 죄인이 의로운 인간으로 되어야 구원받는 게 아니라 죄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할례나 안식일, 정결과 부정에 대한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외적인 잣대로 사람의 존재와 삶을 갈라 놓고 차별하는 차별주의이다. 할례를 받았나 안 받았나, 안식일을 지키나 안 지키나, 정결예법을 따르나 안 따르나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만으로를 내세움으로써 이런 차별주의를 버리고,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긍정하고 소중히 여긴다.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더러움,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죄를 지었거나 선행을 했거나를 떠나서, 아니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존재와 삶을 긍정하고 받아 준다는 말이다. 인간이 부족하고 잘못을 저지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값없이 우리를 받아 준다. 율법주의자들은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와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함도 많고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율법의 표준에 따라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믿음만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믿음만으로!’의 신학은 존재와 삶의 신학이다.
외적인 표준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율법주의는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폭력이다. 비장애인의 표준으로 장애인을 판단하는 것은 장애인의 존재와 삶에 대한 비장애인의 편견이고 폭력이다. 믿음으로 편견없이 장애인을 보면 장애인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다. 군인들의 표준적인 절도있는 걸음걸이나 모델들의 걸음걸이만이 멋지고 자연스러운가 나는 1988년 장애인 올림픽 선수촌에서 장애인들의 걸음걸이도 멋지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올림픽 선수촌은 장애인들의 축제마당이요, 해방촌처럼 보였다. 장애인들은 기쁨과 활력이 넘쳤고, 각기 자기식으로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걷는 걸음걸이가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비장애인들의 걸음걸이는 직각을 이루고 모가 난다면 장애인들의 걸음걸이는 곡선을 이루고 리드미컬하며 다양하다. 나는 그 때 장애인의 존재와 삶의 편안함과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장애인의 존재와 삶이 아름답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 때 존재와 삶의 새로운 충격과 해방감을 맛보았다.
외모나 업적으로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존재와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신앙자세를 가질 때 장애인들의 외모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다. 세상의 편견이나 기준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는 믿음과 사랑으로 사람의 존재와 삶을 보고 느낀다. 그래서 어린이는 존재와 삶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어린 나의 딸은 나를 세상에서 멋진 남자로 안다. 믿음과 사랑으로 존재와 삶을 대할 때 참된 사귐과 관계를 나눌 수 있다. 어떤 조건이나 기준을 가지고 대하면 존재와 삶, 영혼과 몸을 나누고 통하는 사귐을 가질 수 없다. ‘너’의 존재와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자유롭고 편안한 사귐을 시작할 수 있다.
장애인도 자신 속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려야 한다. 장애인 자신도 이 편견과 차별의식을 버려야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장애인의 아픔을 나누면서 장애인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모습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함께 경험하고 장애인의 고통을 함께 느낌으로써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장애인이 어떻게 차별의식을 버릴 수 있을까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보면, 장애인도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는 장애인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자신의 존재와 삶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장애인의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실패한 작품이 아니며 버림받을 존재가 아니다. 반대로 상처받은 존재로서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의 대상이며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날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장애인은 남모르는 깊은 고통을 안고 산다. 세상의 죄악과 슬픔의 깊이를 안다. 십자가에서만 드러나는 죄악과 슬픔의 깊이를 아는 장애인이 소중하다. 그 깊이를 알아야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장애인의 간절한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교회가 장애인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장애인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해야 한다. 장애인의 기도가 교회를 살리고 축복을 가져온다.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림은 위압적이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흙처럼 낮고 겸허하며 소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참된 왕으로 온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말구유나 십자가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권력과 돈으로 다스리면, 사랑과 진리는 가리워지고 영혼의 자발성과 믿음은 약해진다. 낮고 천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다스리면 사랑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영혼은 자유롭고 힘있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낮고 힘없는 장애인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로, 자발적 헌신성에로 부른다. 사랑과 진리, 믿음과 희망의 나라, 더불어 사고 서로 살리는 공동체적 삶으로 부른다. 장애인의 존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장애인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장애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에 참여한다.
세상적인 강함과 능력과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은 없다. 인위적 행동으로 가득찬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기계화되고 합리화되고 물질화된 세상에서, 모든 것이 계산되고 계획되는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살고 절망과 죽음을 뚫고 생명을 사는 장애인의 존재와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증거할 수 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